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장정일: 오늘의 인용-이 땅의 진보는 뇌사했다

 

"

혁명을 혁명과 유사한 가짜 혁명(개혁)과 구분해 주는 것은, 개혁과 달리 혁명에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혁명은 영구혁명이기에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기치는 또다시, 철저히 혁명에 귀속된다. 반면 개혁에는 끝이 있다. 그렇다면 카페인 없는 커피, 니코틴 없는 담배, 사정 없는 발기와 같이 혁명 없는 개혁의 패를 다잡은 이 땅의 진보가 가닿을 곳은 어딜까? 바로 ‘공정한 우파’, ‘상식이 통용되는 우파’, ‘존경받을 수 있는 우파’다. 혁명의 이상을 폐기한 진보는 그 목표를 향해 한발씩 전진한다. 지은이[이택광]가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자음과모음, 2012) 개정판 서문에 쓴 “한국 사회에서 진보로 알려진 것들이 대체로 보수주의에 속한다”는 말은 일점 의혹 없는 진실이다. 이들은 ‘이석기 부류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국가보안법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양비론으로 기각되기 쉽지만, 제대로 된 진보나 자유민주주의자가 ‘이석기 부류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국가보안법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 비하자면 고자질을 넘어 박해에 가까운 주장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장난감 총’을 웃음거리로 삼는 꾀를 쓴다. 그들은 그런 조롱을 동원해서 자신의 남루(‘혁명 없다!’)와 탈이데올로기 본색을 감추었고, 장난감 총을 희화화하는 일에 재미를 들여 혁명의 잠재성과 그것에 대해 사유할 기회(conference)마저 몽땅 내버렸다. 진보는 뇌사했다.

"

―― 장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