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윤리학에서 병리의 문제

 

"

윤리(학)을 철저히 생각할 때 나는 일종의 이율배반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한편으로는, 어쨌든 정동이 없다면 그 어떤 윤리적 행위도 가능하지 않다. [...] 경험적 증거뿐 아니라 철학적 전통도 이 점을 시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어떤 이유 때문에 뇌 손상을 겪게된 사람들은 도덕적 박약자가 되고, 바른 행위를 결정할 수 없음에도 추리 역량은 유지한다[...]. 그런데 칸트도 이 점을 인식했다. [...] 그는 도덕적 행위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수한 종류의 정동―"도덕적 법칙에 대한 존중" [...]―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윤리(학)을 정동에 정초할 수 없는 까닭은, 간단히 서술하면, 사람들은 그런 정동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 대해 분노를 경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완전히 무관심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바다표범을 때려 죽이는 것이 역겨운 일, 절대적으로 구역질나고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결코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며 그 행위를 외투용 모피를 수집하는 일과 관련된 순전히 공리적인 문제일 뿐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그 사유 과정은 타인들을 노예화하는 과정에서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 윤리(학)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정초설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코 멀리 나아갈 수 없다.

 

이것이 칸트가 윤리학은 "병리적인(pathological)" 것에 의거할 수 없다고 말한 까닭이다. 그는 이것을 대단히 문자 그대로의 방식으로 의미했다. 파토스(pathos)=육체=느낌. 칸트는 "심적 문제" 또는 "통제할 수 없는" 정동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동 자체를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없고(스피노자),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느끼지는 않으며(흄, 폰 윅스퀼), 그래서 윤리(학)의 근거는 무엇이든 감정이 아닌 것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레비나스―그의 글이 매우 아름답다고 인식함에도 불구하고―가 진지한 윤리적 사유에 제공할 것을 많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고 그런 사람이 그렇고 그런 얼굴에 대해 그렇고 그런 무한한 의무를 경험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결코 많지 않다. 마찬가지로 인종, 계급, 국적, 민족, 성적 성향 등이 상이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타자의 얼굴을 만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는 이 얼굴이 자신들의 목적에 대한 걸림돌일 뿐이다. 레비나스는 이런 상황에서 제시할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다. [...] 타자와의 관계에 관한 문제 전체는 우리가 얼굴로 인식하지 않는 타자의 얼굴에 관한 문제다. 다시 말해서, 윤리적 사유는 이런 현상학적 경험이 실패해버린 다른 층위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그런 병리를 경험하지 않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수사학의 층위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를 즐겨라. 그렇지만 윤리적 논의에 관해서라면 그를 잊어라. [...]

 

흄은 그 문제를 훨씬 더 잘 이해했다. 흄은 우리가 자신의 이익에 먼저 관심을 가지고, 나중에 타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배워야만 하는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개체들이라는 자유주의적 관념을 거부했다. 흄의 경우에, 우리는 맨 먼저 타자들―형제, 부모, 마을 사람들[...]―에 대한 공감에 의해 규정된다. 그런데 이것은 아직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습―사회적 존재자들―일 뿐이다[...]. 흄의 경우에, 문제는 [...] 자신의 가족. 친구, 인종, 성별, 민족 집단의 외부에 있는 사람/존재자, 즉 이방인에 대한 공감을 어떻게 갖게 되는가라는 의문이다. 진정한 윤리(학)은 우리가 애초에 성향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익명의 얼굴, 다른 얼굴, 동물 얼굴, 광물 얼굴, 형체가 손상된 공간 등―에 대한 공감을 어떻게 계발하기 시작할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시작된다. 정동이 없다면 그 어떤 윤리적 행위도 가능하지 않지만, 또한 정동은 자연적으로 또는 우연한 경험의 결과로서 오지 않는다. 우리의 인지적/정동적 틀지우기, 우리의 문화에 적응된 정동의 한계를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이것은 정동의 구성 또는 파이데이아(교육)을 필요로 한다. 또한 그것은 윤리(학)의 중요한 차원으로서의 미학(감각학)을 의미한다.

"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