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레비 브라이언트: 온티콜로지-유물론

 

 

- 아래 글은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가 객체지향 존재론(OOO)인 온티콜로지(Onticology)의 유물론에 관하여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옮긴 것이다.  

 

――――――――――――――――――――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의 유물론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는, "물질을 수동적인 재료,  적나라한 내적인 날것으로" 여기는 유물론이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물질은 순전히 수동적이며, 왁스와 도장을 새긴 가락지 사이의 관계와 비슷한 방식으로 고려된다. 여기서 물론 왁스가 물질이다. 그렇다면 도장을 새긴 반지는 무엇인가? 이런 종류의 유물론에서 대답은 항상 같은데, 바로 인간의 지향성과 활동이다. 물질은 인간의 개념이든, 언어이든, 기호이든, 노동이든, 인간적인 것들의 각인을 받을 뿐인 수동적인 재료로서 여겨진다. 대체로 물질은 그것에 형상을 각인하려는 인간의 의지에 저항하는 것으로 다루어진다. 물질은 자체의 어떤 행위주체성도 인정받지 못한다. 대신에 물질은 우리의 형상 각인을 묵묵히 기다린다. 우리가 헤겔과 함께 "객관적 정신"이나 "외화된 정신"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또는 마르크스와 함께 "죽은 노동"으로서의 물질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이런 종류의 유물론을 승인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것은 결코 유물론이 아니라 오히려 내밀한 관념론(crypto-idealism)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이것이 내밀한 유물론이라면, 그것이 물질 속에 외화된 인간 사유를 의미가 있는 유일한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물질은 인간의 개념과 의도를 나르는 매체, 탈것에 불과한 것처럼 취급된다. 여기서 우리의 분석 양식은 자연 전체가 우리의 반영, 거울에 불과한 양식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유물론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헤겔과 칸트의 방식을 본받아 개념과 사유만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 제도, 실천, 그리고 "물질적 조건"을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이하게도, 이런 "유물론"에서 우리는 자연 전체를 우리 자신의 목적, 의도, 개념, 의미, 기타 등등의 외화된 반영으로 취급한다. 이런 "유물론"에서는 아무튼 인간적인 것들이 여전히 중심적인 준거점이고 물질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의도를 외화하는 캔버스와 같은 것이다. 루크레티우스가 죽어서 의식이 소멸되지 않았다면 그는 무덤에서 돌아누웠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베넷(Bennett)이 찬성하고 온티콜로지가 지지하는 그런 종류의 유물론은 비인간적 존재자들을 본격적인 행위소나 행위자들로 취급한다. 여기서 비인간적 존재자들은 결코 인간의 의도와 목적을 위한 왁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의도로 환원불가능한 나름대로의 행위자들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각인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재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목적을 넘어서고 조건지우는 방식으로 행한다. 그것들은 인간의 의도에 단순히 저항하여 우리의 목표와 목적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생기있는 방식으로 전개한다. 소에 관해 말하는 두 가지 방식을 고려하자. 내밀한 관념론적 유물론자는, 인구가 증가할 수 있게 한 믿음직한 식량 자원을 제공하도록 인간이 소를 길들이고, 토지를 개간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사육하는 역사로서의 소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지만,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다. 반면에, 온티콜로지는 소들이 숲과 자신들의 포식자들에 대항한 오랜 전쟁에 어떻게 인간들의 협력을 얻었고, 인간들을 길들였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진화론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의미 있는 유일한 것은 서로 다른 유기체들이 자신들의 번식 가능성을 향상시키는 전략들을 고안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이런 렌즈를 통해 바라보면, 소들이 지방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활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숲을 개간하고 그들을 포식자들로부터 보호하게 만들어 그들의 번식 가능성을 향상시켰다고 말하는 것도 똑같이 타당하다. 그렇지만 길들이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로 하여금 소 사육과 숲 개간과 같은 일련의 실천을 개발하게 하여 그들이 더 많은 목초지를 확보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소들이 우리를 길들였다는 것만이 아니다. 인류에 대한 소들의 공모는 훨씬 더 깊다. 또한 소들은 식량으로 소들에 의존하는 인구에 극심한 선택 압력도 주입한 듯 한데, 고단백 음식을 견뎌낼 수 없는 우리 종의 구성원들을 제거하고 견뎌낼 수 있는 구성원들을 선택했다. 많은 인구의 유전자 자체를 소들이 바꾼 듯 하다. 스쿠(Scu)가 주장했듯이 우리는 고기에 중독되어 있다. 이 중독은 부분적으로 소들 자체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계발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좋다거나 또는 이것이 우리의 추악하고 생태학적으로 파괴적인 가축 취급 관행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유념하자. 나는 소들의 진화에 다양한 서로 다른 목적들이 개입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것들은 인간의 목적들을 포함한다. 다른 것들은 닭, 소, 돼지, 양, 기타 등등의 비인간들을 포함한다. 우리가 깊이 의존하는 다양한 다른 식물들뿐 아니라 밀과 같은 다양한 풀에 대해서도 똑같이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술, 사회집단, 그리고 책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사회학은, 라투르가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Reassembling the Social)>>을 비롯하여 다른 곳에서 지적했듯이, 전적으로 달라진다. 행위소들의 세계가 인간들과 비인간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내밀한 관념론적 유물론자들의 방식으로, 사회학은 전적으로 인간들에 관한 영역일 뿐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인간들은 항상 인간들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비인간들을 포함하는, 다양한 서로 다른 행위주체들 사이에 거주하기 때문에 인간들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결코 없을 것이다. 이런 비인간들은 결코 인간의 의도들을 위한 왁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도들로 환원시킬 수 없는 모든 종류의 차이들을 나름대로 도입한다. 따라서 비대칭성이 나타난다. 화이트헤드(Whitehead)에 따르면, 인간들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 사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은 목성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과정들이나, 또는 더 최근까지 산호초의 사회학에 대해서도 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또 어떤 때에는, 그 밖에 다양한 비인간적 행위소 또는 행위자들을 많이 포함함에도 불구하고, 도시와 같이 인간들을 포함하는 사회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다른 행위자들을 고려하지 않는 어떤 사회적 분석도 끔찍하게 왜곡되고 오도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생기적 유물론자와 객체지향 존재론자에게 의문은 항상 "그것이 무엇을 행하는가?"일 것이다. 비인간적 행위소들을 그저 인간의 의도들을 위한 왁스로 환원시키는 어떤 형태의 분석도 거부될 것이다. 근본적인 분할선이 놓여 있다.

 

후쿠시마 원전의 핵 용융을 관찰하면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몇 가지 물음은 다음과 같다. 지진이 어떤 차이를 초래했는가? 지진해일이 어떤 차이를 초래했는가? 원자력 발전소는 어떤 차이를 초래했는가? 이 모든 것들이 영향을 미치는 특정한 조건에서 무엇을 행하는가? 요점은 자본, 자본주의, 그리고 이해관계와 같은 것들의 역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이런 사회 또는 연합의 조립체들 내의 진정한 행위자들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이 모든 행위주체들을 만나는 결과로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들이 발생하는가? 우리가 기표, 개념, 의미의 층위에 여전히 머무르는 한, 이런 층위의 분석은 여전히 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비인간적 행위주체들, 인간의 의도들로 환원시킬 수 없는 모든 종류의 행위주체들이 우리를 조건지우는 기회와 방식 둘 다를 놓친다. 요점은 인간들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자들 사이에서 인간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유물론"은 사람들을 존재의 주권자와 주인으로 계속 여기는 일신교적 서사의 특징을 지닌다. 유물론적이라고 아무리 많이 고집하는 것에 상관없이 그런 입장이 어떻게 유물론적일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 유물론이나 실재론을 만들지는 않는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