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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리스 리먼: 오늘의 에세이-과학주의 재장전

 

 

과학주의 재장전

Scientism Reloaded

 

―― 리스 리먼(Jalees Rehman)

 

"과학주의 되찾기" 운동이 탄력을 받고 있다. 최근에 <<실재에 대한 무신론자의 안내서: 환상 없는 삶을 즐기기(The Athesit's Guide to Reality: Enjoying Life without Illusions)>>라는 책에서 미국 철학자 알렉산더 로젠버그(Alexander Rosenberg)는, 무신론자들은 "과학주의"라는 낱말을 별칭으로 간주하는 대신에 그것을 수용하여 무신론자들의 세계관을 서술하는 적극적인 술어로 사용해야 한다고 넌지시 말한다. 또한 로젠버그는 "과학주의"라는 술어가 현재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서술적 설명을 제시한다.

 

과학주의―명사; 과학주의적인―형용사.

 

과학주의는 두 가지 관련 의미가 있는데, 둘 다 경멸적이다. 이 의미들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과학주의는 과학적 방법이나 발견 결과들을 자체의 적절한 영역을 벗어난 문제들, 특히 인문학에 의해 다루어지는 문제들에 부적절하게 또는 잘못되게 적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두 번째 의미는 더 일반적이다. 과학주의는 과학의 방법들을 가장(또는 유일하게) 믿음직한 탐구 도구로서 과신하는 것이고, 최소한 과학의 발견 결과들 가운데 가장 잘 확증된 것들이 존재하는 유일한 객관적 진리라는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는 믿음이다.

 

"과학주의"에 대한 로젠버그의 설명은 유익한데, 그것이 과학과 과학주의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탐구 도구로서의 과학적 방법을 데이터를 수집하고 해석하는 데 적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반면에, "과학주의"는 여타의 탐구 도구들에 대한 과학적 방법의 탁월성 또는 우위성을 조장하는 문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견해들을 가리킨다. 과학주의적 견해를 수용하는 과학자들이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과학주의가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 극단과 몇몇 종교적 제도에서 만연하는 공격적인 반과학적 태도에 대한 매우 필요한 균형추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데올로기적 과학 때리기에 대한 보루로서 과학주의를 지지하는 것에 관하여 우려하는 과학자들도 있는데, 그것이 목욕물과 함께 아이도 버리는 기미를 보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건강한 회의주의, 즉 독단적 견해들의 해체와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자기 비판의 과정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과학적 방법의 수위성에 관한 이데올로기적 입장들을 과학에 주입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자세에 기꺼이 반대하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과학의 힘의 근거를 훼손할 수 있을 것이다.

 

줄기세포의 신호전달 메커니즘들과 대사 활동을 탐구하는 과학자로서 나는 "과학주의"라는 우산 아래 포섭되는 몇몇 운동들의 등장에 관해 우려하는데, 그것들이 과학적 발견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진보는 현존하는 과학적 개념들의 한계와 결점들을 인식하는 것과 더 새로운 과학적 관찰 결과들에 의해 적절히 설명될 수 없는 과학적 견해들을 반박하는 것에 의존한다. 과학적 발견 결과들의 타당성에 대한 과신은 그런 논박 행위들을 억압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줄기세포 생물학 분야에서 가장 널리 인용된 과학 논문들 가운데 일부는 재현될 수 없는데, 부분적으로는 몇몇 초기 실험 결과들의 타당성에 대한 과신 때문에 그것들은 과학과 의학에 대단히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십 년 전 쯤에 나는 심혈관 복구과 재생을 향상시키기 위한 줄기세포와 전구세포의 사용을 처음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나의 많은 공동연구자들과 나는 2001년에 뉴욕 의과대학의 과학자 집단이 저명한 과학 저널 <<네이처>>에 발표한 최신 논문을 보고 흥분했다. 그 논문은 주입된 성체 골수 줄기세포가 기능성 심장세포로 성공적으로 전환되어 새로운 심장 조직을 생성함으로써 심근 경색 후에 심장 기능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성체 재생세포의 사용은 매우 매력적인 선택지였는데, 그것 덕분에 환자들이 자신의 세포로 치료받을 수 있을 것이고 배아 줄기세포와 관련된 윤리적 및 정치적 논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동물 연구는 다른 과학자들이 뒷받침하는 실험과 인간 연구들을 발표했을 때 훨씬 더 탄력을 받았다. 게다가 2002년에 심장학자 보도 슈트라우어(Bodo Strauer)가 이끈 독일 연구집단이 인간 성체 골수세포가 심근 경색 환자들에게 안전하게 주입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성체 세포가 심장 기능도 향상시키는 듯 보인다는 점을 보여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런 발견 결과들에 의해 야기된 소동은 과학자들에게만 결코 한정되지 않았다. 그 발견 결과들은 매체에 널리 보도되었으며, 나는 심근 경색 후에 환자들은 일상적인 골수 주입 시술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심혈관 질환은 곧 과거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외과의사들과 가진 수많은 토론을 떠올린다. 심지어 한 동료는 골수세포의 사용이 심혈관 재생과 관련된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쟁점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내 경력 선택을 재고하라고 충고했다.

 

2004년에 2001년 <<네이처>> 논문에 대한 반박 논문이 역시 <<네이처>> 저널에 발표되었을 때 이 흥분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두 개의 미국 줄기세포 연구집단이 수행한 협동연구는 2001년 논문의 발견 결과들을 재현할 수 없었다. 그 과학자들은 성체 골수세포의 기능성 심장세포로의 그 어떤 유의미한 전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많은 외과의사, 과학자, 그리고 환자들이 심근 경색 후 골수세포 치료의 타당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이미 확립해버린 상태였다. 수백 명의 심근 경색 환자들이 골수세포 주입을 포함하는 임상 시험에 등록한 상태였다. 태국 또는 멕시코에서 병원들은, 환자들이 심장에 대한 골수세포의 침습성 주입의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에 금전적 지불의 견지에서 그리고 안전의 견지에서 고액의 가격으로, 전 세계의 심장 환자들에게 골수 주입 시술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소수의 등록된 환자들에 대한 최초의 임상 연구들이 골수세포 주입의 유익한 효과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후속 연구들은 초기의 이런 성공들을 확증할 수 없었다. 골수세포 주입이 심근 경색 환자들에게 치료법적 편익을 제공할지라도 이 편익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과학자들은 관찰된 편익이 골수에 포함된 소량의 줄기세포와 인과적으로 무관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점점 더 깨닫게 되었다. 골수 줄기세포가 기능성 심장세포가 되는 대신에 일부 골수세포들이 반드시 새로운 심장 조직을 생성하지는 않은 채 심장 기능을 조금 향상시키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어 단백질을 단순히 방출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최근에 들어 2013년에 지금까지 이루어진 심근 경색 환자들에 대한 가장 큰 규모의 골수세포 치료 가운데 하나가 발표되었으며 세포 주입 후 심장 기능 향상에 대한 아무 증거도 보여주지 않았다.

 

지나고 나서 보니까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우리가 왜 최초의 발견 결과들에 대해 더 회의적이지 않았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배아 줄기세포에 비해 성체 골수 줄기세포는 골수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세포 유형들이 아닌 세포 유형들로 분화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제한적이다. 게다가 심근 경색 환자들에 대한 성공적인 치료를 보고한 임상 연구들은 환자들의 정제되지 않은 골수세포를 사용했다. 그런 정제되지 않은 표본의 줄기세포 함량은 대략 1% 이하였는데, 이것은 주입된 골수세포의 99%가 줄기세포가 아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골수 속 매우 소량의 진짜 줄기세포가 충분한 양의 박동하는 심장 세포로 전환되고 심지어 새로운 기능성 심장 조직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비판적 사유와 건강한 회의주의, 과학의 동료평가 절차와 심지어 상식도 우리로 하여금 이런 주장들과 관련된 문제들에 경각심을 갖도록 했었어야 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실패했다. 과학자, 외과의사, 그리고 환자들이 새로운 심장 조직을 만들어낸다는 전망에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그들은 대단히 필요한 회의주의를 유예했을 것이다. 대단히 인정받는 과학 저널에 발표된 과학적 데이터의 타당성에 대한 과신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실험을 수행한 과학자들의 무의식적인 인지적 편향들과 대안적 설명들에 대한 무시도 후속 시험을 견뎌낼 관념들의 전파에 기여했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부정행위도 하나의 인자였을지도 모르는데, 심근 경색 환자들에 대한 골수세포 주입과 관련된 최초의 임상 연구들을 수행한 심장학자가 그 실험들을 수행하고 보고한 방식에서 저지른 방대한 오류들에 대한 조사가 현재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적 발견 결과들의 타당성에 대한 과신, 과학주의가 초래하는 일종의 확신과 관련된 문제들을 예시하는 한 사례일 뿐이다. 그런 사례들은 결코 줄기세포 생물학에 한정되지 않는다. 암 연구의 과학적 재현 가능성에 대한 최근의 분석은 발표된 암 생물학 논문들 가운데 11%만이 독립적으로 실증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리고 다른 과학 연구 분야들도 마찬가지로 동료평가를 거친 발표된 과학 논문들의 재현 불가능성 문제를 겪고 있을 것이다.

 

과학적 데이터의 해석과 발표에 대한 현재의 접근방식들이 심각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는 과학자들의 수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과학적 발견 결과들의 타당성에 대한 과신은 흔히 부적절하며, 그리고 과학적 결과가 객관적 진리를 나타낸다는 주장은 특히 높은 비율의 실험 결과들이 동료 과학자들에 의해 재현될 수 없을 때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이런 특수한 맥락에서 과학의 동료평가 절차의 실패들로부터 교훈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견해들은 "과학주의" 비판가들의 견해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나 자신을 비롯하여 많은 과학자들이 여전히 "과학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꺼려한다.

 

로젠버그는 "과학주의"라는 낱말과 관련된 문제들을 예시한다. "과학주의"는 흔히 별칭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과학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과학적 방법 적용의 부적절성에 관한 건설적인 논의를 방해할 것이다. "도덕의 쟁점들은 과학적 실험으로 해결될 수 있는가?"와 같은 물음은 중요한 문제일 것이지만, 무차별적으로 "과학주의"라는 술어를 도입하는 것은 그 문제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다루지 못하게 한다.

 

"과학주의"라는 술어와 관련된 나머지 다른 한 주요한 쟁점은 그것의 모호성이다. "과학주의"가 과학적 발견 결과들의 타당성에 대한 도가 지나친 확신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과학은 어떤 경계 내에 머물러야 한다는 관념 같은 다양한 별개의 개념들을 포괄한다면 "과학주의"라는 술어를 논의하기가 어렵다. 나는 한 실험실에서 얻어진 과학적 결과가 객관적인 과학적 진리를 구성하는지 여부에 대한 현실적인 재평가를 요청하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인문학의 영역을 침범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과학적 탐구 형식들을 금지하는 경계선을 만들어내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래서 나는 "과학주의"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는 대신에 "과학 신비(science mystique)"라는 술어를 도입하여 과학적 결과들의 무오류성에 대한 과도한, 거의 신비주의적인 확신을 비판한다.

 

"과학주의"라는 표현과 더불어 "과학주의"의 문화도 수용되어야 한다는 로젠버그의 견해는 과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가 논쟁적인 에세이 "과학은 당신의 적이 아니다: 무시당한 소설가들, 궁지에 몰린 교수들, 그리고 정년보장을 받지 못한 역사가들에 대한 열정적인 호소(Science Is Not Your Enemy: An impassioned plea to neglected novelists, embattled professors, and tenure-less historians)"를 발표했을 때 큰 격려를 받았다. 로젠버그와 마찬가지로 핑커는 "과학주의"라는 표현을 재건하기를 바라며 적극적인, 과학을 긍정하는 세계관을 가리키는 데 그것을 사용한다. 불행하게도, 핑커는 "과학주의"의 문화에 관한 건설적인 대화에 참여하는 대신에 그 에세이 전체에 걸쳐 인문학에 대한 빈정거리는 태도를 드러낸다. 인문학에 대한 존중과 관련된 그의 관념은 고전 철학자들이 현대 신경과학을 알았었더라면 훨씬 더 나았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핑커는 역의 명제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이 철학에 관해 더 많이 안다면 훨씬 더 나을 것인가? 핑커는 계속해서 과학자들을 역동적인 전진하는 사상가들로 묘사하는 반면에, 인문학자들은 그들의 지적인 관성에 의해 필경 위축될 것이다.

 

"여러 대학 총장과 교무처장들이 내게 과학자가 자신의 사무실에 방문할 때 그것은 어떤 흥미로운 새로운 연구 기회를 알리고 그것을 추구할 자원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넋두리를 늘어 놓았다. 인문학자가 들를 때 그것은 항상 그러했던 상황에 대한 존중을 항변하는 것이다."

 

핑커는 과학의 재현 가능성 쟁점들을 얼버무리고 과학의 동료평가의 한계점들에 관해 아무 언급도 없이 현재의 동료평가 체계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재확인한다.

 

"이런 좋은 의미에서 과학주의는 "과학"으로 불리는 직능 조합의 구성원들이 특별히 현명하거나 고귀하다는 믿음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공개적인 논쟁, 동료평가, 그리고 이중 맹검법을 비롯한 과학을 규정하는 실천들이 인간인 과학자들이 저지르기 쉬운 오류와 죄악들을 회피하도록 명시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는 스티븐 핑커에 대응하는 뛰어난 에세이를 적었는데, 그 글은 핑커의 주장에 내재하는 결점들을 논의하고 과학주의 또는 "과학 신비"의 문화를 조장하는 것이 과학에 이롭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또한 나는, "과학주의"라는 술어를 제거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물리학자 션 캐롤(Sean Carrol)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가 과학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제거하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조잡하게 규정된 이 술어가 매우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학주의"라는 술어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간에, "과학주의"의 문화에 대한 비판가들과 옹호자들 사이의 논쟁들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과학주의"라는 무익한 낱말이나 인문학에 대한 논쟁적인 태도들을 재건하는 것은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이런 논쟁에 기여할 가능성이 없다. 과학자들과 비과학자들에게 난제는 비합리적인 반과학 때리기라는 의제를 조장하지 않은 채 과학에 대한 정당한 비판들을 수용하고 다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