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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크리츨리: 서평-존 그레이의 신 없는 신비주의, <<동물들의 침묵>>에 관하여

 

존 그레이의 신 없는 신비주의: "동물들의 침묵"에 관하여

John Gray's Godless Mysticism: on "The Silence of Animals"

 

 ―― 사이먼 크리츨리(Simon Critchley)

 

인간들은 그저 살생 무기만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살생자 유인원이다. 우리는 심술궂고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며 탐욕스러운 호미니드, 즉 널리 읽힌 2002년의 책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Straw Dogs)>>에서 존 그레이가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상황은 더 나빠진다. 우리는 끊임없이 삶에 대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형이상학적 갈망―이것이 항상 우리를 종교의 품에 안기도록 추동한다―을 지닌 살생자 종이다. 오늘날의 형이상학은 "자유주의적 인간주의(liberal humanism)"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진보, 이성의 능력, 그리고 인류의 완전성에 대한 유사종교적 신념을 지닌다. 현대의 전형적인 진보적 인간주의자들은 오바마주의자들인데, 그들은 세계에 대한 개입에 관해 끝없는 기괴한 대화를 나누고, 역사란 두 진영, 옳은 진영과 그른 진영이 있으며 그들은 자연적으로 옳은 진영에 속한다고 확신한다.

 

그레이의 가장 강렬한 혐오는 진보라는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데, 진보라는 관념은 여러 책에서 그의 목표가 되었고 <<동물들의 침묵(The Silence of Animals)>>의 꽤 밋밋한 처음의 대략 80쪽 부분에서도 계속된다. 그는 과학의 영역에서 진보는 사실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좋은 점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토머스 드 퀸시(Thomas De Quincey)가 말했듯이, 인간 고통의 4분의 1은 치통에서 비롯되고, 그래서 마취 치과술의 발견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진보에 대한 신념은 우리가 없이 살아가야 하는 미신이라고 그레이는 주장한다. 특히 그는, 진보에 대한 믿음의 순전한 유해성의 증거로서 콩고의 식민주의에 관한 콘라드의 글과 소비에트 공산주의(냉전은 그레이의 글쓰기에 계속해서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에 관한 쾨슬러의 글을 인용한다. 데카르트와는 반대로, 그는 인간의 부조리성이 세상에서 가장 균일하게 공유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망상에 대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이다. 그레이의 경우에, 진보의 실재성에 대한 자유주의적 인간주의자의 확신은 섭리에 대한 기독교적 믿음의 간신히 세속화된 판본이다.

 

나치 판사 칼 슈미트를 염두에 두고서 존 그레이는 <<추악한 동맹(Black Mass)>>(2007)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근대 정치는 종교사의 한 장이다." 정치는 종교적 구원의 은밀한 대체물이 되었으며, 세속주의는 자체적으로 하나의 종교적 신화다. <<동물들의 침묵>>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오늘날 비신앙은 종교가 아니라 세속적 신념을 의문시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그레이를 가장 불편하게 하는 것은 세상에서 일치단결된 인간의 행위가 명백히 불가능한 정치적 목적을 가능하게 하고 인류의 완전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어떤 신념에 기반을 둔 유토피아적인 정치적 기획들이다. <<추악한 동맹>>에서 그가 명시적으로 표명하듯이, 그는 노먼 콘(Norman Cohn)의 1957년 책 <<천년왕국의 추구(The Pursuit of the Millennium)>>로부터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비판을 도출한다. 콘이 암시했지만 그레이가 큰 소리로 선언하는 것은 서양 문명은 천년왕국주의적 사유의 중요한 역할에 비추어 규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구원은 집단적이고, 이 땅에 존재하고, 즉각적이고, 전면적이며, 기적적이다. 초기 기독교 믿음에 뿌리를 두고 중세 유럽에서 엄청나게 가속화되는 것은 자코뱅주의에서 볼셰비즘, 스탈린주의, 나치즘, 그리고 마르크스-레닌주의, 무정부주의, 또는 상황주의적 이데올로기들 같은 다양한 변양태들까지 일련의 유혈 유토피아적 정치 기획들에서 자체의 근대적 연속성을 발견한다. 그것들은 모두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대신에 우리를 지옥에 빠뜨렸다.

 

<<추악한 동맹>>에서 그레이는 그런 유토피아적 정치 기획의 에너지가 어떻게 좌파에서 우파로 이동했는지 보여주려는 설득력 있는 시도를 행한다. 부시, 블레어 등은 테러와의 전쟁을 속박되지 않은 개인적 자유와 자유시장의 새로운 미합중국 세기를 강화할 종말론적 투쟁으로 그 틀을 규정했다. 새천년의 처음 몇 년 동안 종교적 열정이 "강경한 신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기획를 고무했다. 폭력은 자유민주주의적 지상천국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전면적인, 고전적인 군사적 침공이 무인 비행기 공습과 표적 암살 같은 계산된 비겁으로 대체되었지만, 미합중국 같은 이른바 민주주의적인 체제들이 테러에 대응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주장하면서 테러를 전개하는 전쟁 상태의 세계상은 여전히 우리와 대단히 많이 관련되어 있다.

 

칼 슈미트는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비판 때문에 독재를 지지하는 논변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레이는 자신의 자유주의 혐오 때문에 어디에 이르게 되는가? 그는 자유주의적 인간주의에서 독을 식별하지만, 해독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레이가 "정치적 현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많은 고대 사회들이 수용했고 많은 비서구 사회들이 여전히 수용하듯이, 우리도 세계는 끊임없는 갈등 상태에 처해 있다는 점을 수용해야 한다. 전쟁 시기 후에 평화 시기가 이어지고, 또 다시 전쟁이 이어질 뿐이다. 돌아서 가는 것은 돌아서 온다. 계속 돈다. 역사는 발전 또는 심지어 몰락이라는 직선보다 순환으로서 더 잘 이해된다.

 

그런 끊임없는 갈등에 직면하여 그레이는 우리는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삶의 비극적인 우연성을 수용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결코 아무 해결책도 없는 도덕적 및 정치적 딜레마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보편적 인권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주의적 세계 질서 같은 유해한 백일몽이나 역사는 인간 행위를 보증하는 목적론적인, 섭리적인 목적이 있다는 유해한 망상을 버리게 되어야 한다. 심지어 우리는 인간의 삶은 어떤 보편적인 진보 이야기의 일화를 이루는 서사라는 오바마주의적(본질적으로, 은밀한 콩트주의적 또는 은밀한 생시몽주의적) 망상을 버려야 한다.

 

보수주의를 천년왕국적인 강경한 신자유주의로 기괴하게 왜곡하는 것에 맞서서 그레이는 전통적인 버크주의적 토리주의의 핵심적인 신념을 옹호하기를 바란다. 후자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취약성에 대한 현실주의적 수용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결점이 있고 잠재적으로 사악한 인간들이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바로 그 최악의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을 문명화된 제약을 신봉하는 입장, 즉 최소로 나쁜 것들의 정치다. 슬프게도, 정치인들 가운데 아무도 이런 논변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듯 보이는데, 특히 영국 노동당 같은 냉소적인 실용주의적 좌파 자유주의자들보다 더 유토피아주의자들이 되어버린 현대의 모든 보수주의자들이 가장 그렇다.

 

 

그레이의 경우에, 인간의 오만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표현은 인간들이 지구를 환경 파괴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관념이다. 인간들은 항상 어떤 열망하는 형이상학적 기획의 미명 아래 폭력, 힘, 그리고 테러를 전개할 살생자 유인원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환경을 구원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게다가―그리고 이것이 특별히 유쾌한 급진전이다―지구는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레이는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을 차용한다. 항상 더워지고 있는 지구는 파종성 영장류 질환(disseminated primatemaia), 즉 인간이라는 역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호모 라피엔스는 한때 아름다웠고, 잘 꾸며졌으며, 그리고 널찍했던 집에 득실거리게 되어버린 불결한 해충처럼 지구를 야만스럽게 약탈하고 있다. 1600년에 인구는 약 오억 명이었다. 1990년대에 인구는 같은 수만큼 증가했다. 그리고 가속화는 계속되고 있다. 그레이가 가이아 가설로부터 차용하는 것은 이 역병이 자체 원인인 바로 그 인간들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구를 관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 되돌리는 대규모의 인구 감축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1600년으로 되돌아 가자!

 

그레이의 저작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물에 잠긴 세계에 대한 신이 날 정도로 반인간주의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이며, 사실상 발라드주의적인 전망이다. 지구가 인간들을 처리할 때, 지구는 회복될 것이고 인간 문명이라는 일시적인 현상은 영원히 망각될 것이다. 지구 온난화는 지구가 자체의 비인간적인 긴 역사 동안 겪어 온 주기적인 열병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지구는 회복되어 지속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럴 수 없으며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레이는 하이데거의 잔류 인간주의(동물들은 세계 속에서 빈곤하고, 바위와 돌은 세계가 없다고 마르틴은 단언한다)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그는 <<형이상학의 극복>>으로 출판된 하이데거의 단편들의 모음집에서 제시된 사유 노선에 매우 가깝다. 1936년과 1946년 사이에 쓰여진 이 단편들은 내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가장 황량하고 가장 계시적인 묵상이다. 그것들의 중심에는 니체에 대한 그의 의도적인 독법의 렌즈를 통해 걸러진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너무나 빗나간 비판적 참여가 놓여 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명상을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행위만으로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이데거 사후에 출판된 1966년 슈피겔 지와의 인터뷰의 제목에서 그 진술에 대한 대답이 발견된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하이데거와 그레이의 경우에는 불행하게도 아무 신도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를 현재의 혼돈에 빠뜨린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정치적 자발주의가 근대성의 고뇌의 원동력이라면, 과업은 우리가 아무 의지 없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그레이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행위 개념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으로 데려 간다. 이상화된 실천이라는 아렌트적 환상이든, 공적인 참여와 개입이라는 자유주의적 관념이든, 또는 행동의 선전과 관련된 좌파적 망상이든 간에, 행위는 잠깐 동안 무의미의 위협을 막아냄으로써 우리 같은 살생자 유인원들에게 위안을 제공한다. 그레이의 저작의 본원적인 핵심은, 멋지지 않는 듯 보일지라도, 행위에 맞서 사색의 이상―아리스토텔레스의 비오스 테오레티토스든 에피쿠로스 학파의 아타락시아든 간에―을 집요하게 옹호하는 것이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의 마지막 문장에서 그레이가 말하듯이, "그냥 바라보는 것은 목적으로 하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런데 그레이의 이데올로기적인 절묘한 처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비관주의에 의해 뒷받침되는 유사 버크주의적 자유주의 비판과 도교의 어떤 계보와의 융합이다. 더 특수하게, 그레이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내경>>의 미묘한 역설들에서 굉장히 멋지게 표현된 장자의 극도로 회의주의적인 환상설이다. 장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삶에서 쾌락을 느끼는 것이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 그 대답은 나는 모른다는 것이고, 게다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난로 앞의 응큼한 데카르트보다 훨씬 더 나아간 장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꿈을 꾸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그리고 꿈을 꾸는 중에 꿈 속의 꿈을 해석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당신과 공자는 둘 다 꿈이고, 당신을 꿈이라고 하는 나도 꿈이다." 꿈에서 벗어날 길은 전혀 없고, 그래서 포기해야 하는 것은 이른바 실재에서 어떤 닻을 발견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형이상학적 열망이다.

 

호모 라피엔스는 파괴적이고 무의미한 의미 추구를 포기하게 되어야 하고, 삶의 목적은 의미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어야 한다. 장자의 압도적인 역설들에서 그레이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삶이 꿈에서 깨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심지어 깨어나고 싶은 욕망도 전혀 없는 꿈이라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환상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환상들이 우리의 자연적 구성의 요소들이라면, 그것들을 그냥 수용하는 것이 어떤가? <<추악한 동맹>>의 결말 부분에서 그레이는 이렇게 적고 있다. "도교는 개인적 담론을 죽음과 부활이라는 우주적 과정과 동일시했고 개인적 담론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 자유라고 가르쳤다."[290] 유토피아주의적 사상가들과의 동행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신비주의자, 시인, 그리고 쾌락주의자들"의 말에서 위안을 찾아야 한다.

 

그런 것이 <<동물들의 침묵>>에서 그레이가 계속 이어가는 위안을 주는 동행이다. 이 책에는 진보에 대한 비판과 자유주의적 인간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 같은 그레이의 독자들에게 친숙한 것들이 많이 있다. 또한 융의 몽매주의, 치료법의 승리, 그리고 집단 무의식 같은 끔찍한 유령들로 프로이트적 공허를 채우려는 욕망에 맞서는 데 사용되는 필립 리프(Philip Rieff)의 고전적 해석에 바탕을 둔, 도덕주의자로서의 프로이트에 대한 확고한 옹호 같은 환영할 만한 것도 많이 있다. 그런데 <<동물들의 침묵>>에서 새로운 것은 대체로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을 읽은 경험에 바탕을 둔, 그가 "신 없는 신비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지지하는 그레이의 논변이다(2011년 그레이의 <<불멸화위원회>>에서 스티븐슨이 여러 번 카메오로 등장하는 것은 참이다). <<동물들의 침묵>>에서 스티븐스는 그것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고정점이다.

 

삼 부로 이루어진 <<동물들의 침묵>>의 각 부는 스티븐슨의 인용문들에 의해 틀이 짜여지고 안내된다. 그레이의 주의를 끄는 듯 보이는 것은 스티븐슨의 후기 시―예를 들면, 스티븐슨이 죽기 일 년 전 1954년에 출판된 <<시 모음집(Collected Poems)>>에서 "바위(The Rock)"라는 표제 아래 묶인 25편의 시―의 순전한 꾸밈없음이다. 스티븐슨의 시는 자의식적으로 실재와 상상의 두 극 사이를 움직인다. "키웨스트에서 질서의 관념(The Idea of Order at Key West)"라는 시에서처럼 그의 가장 워즈워드적인 분위기에서 그 두 극은 융합되거나 창조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듯 보이곤 했다. 상상이 실재를 파악하여 변신시킨다. 그런데 말년의 시들에서는 딱딱하고, 차가우며, 수축된 실재가 무대 중심을 차지한다. 상상력은 고갈된 듯 보인다. 이 말년 시들―스티븐슨에게 항상 중요한―의 계절은 초기 시의 화려한 플로리다 풍의 풍경에서 코네티컷 주 겨울의 끝나지 않는 가혹한 냉기로 변한다.

 

<<마음의 끝에 서 있는 야자나무(The Palm at the End of the Mind)>>에 실린 마지막 시 "그저 존재함에 관하여(Of Mere Being)"에서 스티븐스는 "마지막 사유를 넘어서는" 것, 즉 "인간의 의미 없는, / 인간의 느낌 없는, 낯선 노래'를 부르는 새에 관해 이야기한다. 스티븐스는 사물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라고 말하는 듯 보인다. 나무, 새, 새의 노래, 새의 깃털, 나무가지들을 흔드는 바람.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그레이의 경우에, "스티븐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저 존재함은 우리의 허구들이 때때로 가리킬 수도 있는 순수한 공허다." 말하자면, 세계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점을 수용할 때, 우리를 우리가 만든 의미 너머로 데려가는 길이 나타난다.

 

역설적으로, 그레이의 경우에, 실존의 가장 큰 가치는 세상에 실체라는 것은 전혀 없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무無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레이가 우리가 사색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를 넘어선 무, 언어 뒤에 있는 공허다. 그의 철학은 배후에 아무것도 없는 급진적인 유명론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잘 자각하고 있듯이, 그레이는 베케트에 가깝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는 우리가 끊임없이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감옥이다. 언어적 전환의 그 어떤 편안한 신조 대신에, 그레이는 언어적인 것들로부터의 탈주를 상상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는 비인간적 침묵을 지향해야 한다.

 

마지막 시들에서 스티븐스는 시 속에서 시를 포기함으로써 할 수 있는 한 가까이 방향을 바꾼다. 그것은 시에 대립하는 것들에 관한 시다. 우리가 모른 채 응시하는 딱딱한 낯선 실재. 우리가 가진 전부는 사물에 관한 관념들일 뿐, 사물 자체가 아니다. 접촉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텅 비고, 기억의 마루들은 깨끗이 닦이며, 아무 의미도 없이 무는 우리 너머로 흐른다. 그레이가 인용하지 않은 말년의 시 "맑은 날 그리고 무기억(A Clear Day and No Memories)"에서 스티븐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오늘 공기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다.

무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 의미도 없이 우리를 가로질러 흐른다,

우리들 가운데 아무도 이전에 여기 있었던 적이 없던 것처럼

그리고 지금도 없는 것처럼, 이런 피상적인 광경,

이런 보이지 않는 활동, 이런 감각 속에서.

 

 

그레이가 우리 안에 기르기를 바라는 것은 "이런 감각", 즉 자아를 자체로부터 그리고 끊임없는 의미 만들기로부터 떼어내어 다양하고 특수한 상태의 사물들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요점은 인간적인 것들의 한계를 벗어나서 식물, 새, 풍경, 그리고 심지어 도시 경관들을 관찰하면서 겪을 수 있는 더 거대한 비인간적 경험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이동을 실행하는 것이다. 스티븐스는 또 하나의 "처럼(as if)"으로 계속 말한다(그리고 책 전체가 가정접속사를 사용하여 쓰여졌다).

 

무가 자체의 영구적인 냉기 속에, 하나의 수법,

하나의 필수적인 가정, 하나의 비영구적인 것,

 매우 바라던 하나의 환영을 포함한 것처럼.

 

시는 욕망으로부터 선택된 말들이지만, 영구적인 것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말들이다. 환영을 만들어내면서 시는 비영구성을 가정한다.  이것이 스티븐스가 무의 수법―그것의 작업, 그것의 공예, 그것의 창작성―으로 여기는 것이다. 무는 추상적이다. 무는 변해야 한다. 무는 쾌락을 제공해야 한다.

 

그레이의 신 없는 신비주의는 자아를 지우고자 하는 종교적 형식들의 신비적 실천에 공통적인 고행 형식들(단식, 정신 집중, 그리고 기도)를 유지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대자아" 또는 신과의 어떤 합일에 대한 더 고등한 경험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비인간적 세계로의 전환을 야기하기 위해서 행해질 것이다. 신 없는 신비주의는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에 대한 욕구, 의미에 대한 욕구 자체로부터 구해낼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으로부터의 구원. 여기서 무의미성은 보통의 것들, 감각들의 삶의 성취일 것이다. 이런 사유 노선은 철학자 유진 태커(Eugene Thacker)가 비인간적인 것들의 신비주의라고 불렀던 것―행성의 먼지 속에서 표현되는 기후학적 신비주의―에 매우 근접하게 된다.

 

 

<<동물들의 침묵>>에는 뜻밖의 지역적 영웅이 있다. J. A. 베이커(J. A. Baker, 1926-1987). 부끄럽게도, 그레이의 책을 읽기 전에는 내가 몰랐던 책 <<송골매(The Peregrine)>>의 저자. 그 책은 첼름스퍼드와 해안 사이에 좁게 펼쳐진 에섹스 교외에서 송골매를 관찰하며 10년을 보낸 기록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 풍경을 꽤 잘 알고 있거나, 아니면 한때 알았었다. 그것은 매끈한 들판, 진흙 둑, 하구, 그리고 서에서 동으로 왕복하는 거대한 구름들이 있는 방대한 하늘의 밋밋한 최소주의적 풍경이다. 강렬한 목가적인 서술들로 베이커는 인간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이 포식자 새의 눈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내려다 보면서, 매는 저 아래의 대형 과수원이 가느다란 선들과 녹색의 길쭉한 조각들을 남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 녹색 섬들이 혀처럼 비죽이 나와 있는 하구가 청은색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베이커는 미치지 않았었다. 그는 인간 세계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며, 자신이 송골매가 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레이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깥쪽과 위쪽을 바라보려고 시도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충분히 탈피하는 것과 관련된 규율이다(베이커의 경우에 시간, 장소, 그리고 반복의 고행. 길쭉한 작은 띠 형태의 동일한 교외 지역을 다시 찾아가는 데 보낸 여러 날, 여러 달, 그리고 여러 해). 여기서 사색은 햄릿 같은 유형의 것, 즉 자아의 동요를 가라앉히려는 내향적 시도가 아니다. 그것은 감각들의 개발을 통한 자아의 외향적 소멸이다. 시도되고 있는 것는 동물과 자연 전체에 대한 비(非)인간형상적 관계인데, 여기서는 송골매가 매를 부리는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다. 그레이의 신 없는 신비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벗어나서 밖을 그저 바라보기를 요청한다. 이것은 들리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일반적으로 축약된 경구 형식으로 읽히는 쇼펜하우어는 19세기의 가장 인기 있는 철학자였다. 쇼펜하우어 류의 경구적 비관주의는 독자들에게 그들의 비참함에 대한 이유들을 제공하며 그들의 절망감과 무력감을 강화하는 말들을 제시한다. 확고하게 방어되는 개념적 궁지에 몰려서 알고 있지만 움직일 수 없는 채로 그냥 앉아 있는 것보다 더 세련된 지적인 쾌락을 제공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것이 아도르노, 또는 어떤 면에서 아감벤을 읽을 때 느끼는 전율이다. 그것이 바로 니체가 "유럽의 불교"라고 불렀던 것이다.

 

때때로 나는 존 그레이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쇼펜하우어적인 유럽 불교도라고 생각한다. 그가 제안하는 것은, 자유주의적 인간주의의 거짓된 동굴의 우상들을 올바르게도 잡석으로 축소시키는 유쾌하게 비관적인 문화적 분석이다. 지난 십 년 동안의 명랑한 진보주의적인 복음주의적 무신론에 대항하여 그레이는 다윈주의적 자연주의와 여전히 일치하는 인간의 사악함을 지지하는 강력한 논변을 제시한다. 그것은 수동적 허무주의를 낳는데, 그것은 대단히 유혹적인 세계관이다. 비록 나는 그 유혹은 궁극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수동적 허무주의자는 대단히 세련된 초연함으로 세계를 바라보며 세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수동적 허무주의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세계 속에서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사색적 거리를 두고 물러나서 시, 송골매 관찰, 또는 아마도 노년의 루소("식물학은 할 일 없는 한가한 고독자를 위한 이상적인 연구"라고 장 자크는 말했다)가 그랬던 것처럼 식물학의 즐거움을 추구함으로써 예리한 미학적 감성을 계발한다. 잊혀지지 않았다면, 존 스튜어드 밀도 결국 식물학자가 되었다.

 

자본주의적 착취나 군사적 성전―동일한 호모 라피엔스의 두 팔―을 통해 자체를 서둘러 파괴하고 있는 세상에서 수동적 허무주의자는 존재의 신비가 의미로 증류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드러날 수 있는 작은 섬으로 물러난다. 수동적 허무주의자는 습관적인 인간적 삶의 둔화시키는 공포를 이해하고 탈피하게 되어 우리의 말 배후에 놓여 있는 공허를 들이마신다.

 

무엇이 다가오는 몇 십 년을 규정할 것인가? 나는 다음과 같이 추측할 것이다. 신념에 의한 정치적 폭력, 환경 파괴의 확실성, 공공 제도들의 쇠퇴, 항상 증가하는 불평등, 그리고 더 많은 사이먼 코웰(Simon Cowell) 텔레비전 쇼가 규정할 것이다. 이런 공포에 직면하여 그레이는 초연하지만 안전한 일시적 도피처를 제공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레이의 수동적 허무주의자의 세상은 명백히 격렬하고, 열정적이며, 황홀한 인간 관계들이 박탈당한 외로운 곳일 수 있다. 그것은 J. A. 베이커의 세상처럼 거의 자폐적인 우주이다. 엘리자베스 비숍(Elizabeth Bishop)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또한 그것은 대체로 남성 저자와 시인들이 읽힐 듯한 세상이다. <아다지아(Adagia)>에서 스티븐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삶은 장소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문제다. 그런데 내 경우에 삶은 장소들의 문제이며 그것이 고민거리다." 스티븐스처럼 그레이도 장소에 사로잡힌 듯 보이지만, 스티븐스와 달리, 고민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레이가 말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끝없는 자기도취적 트위터링에 열중하는 깨진 그릇들이다. 우리는 하나의 진짜 불꽃―덧없음―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나방들과 같다. 누가 동물들의 침묵 속으로 도피하기를 갈망하지 않겠는가?

 

물론, 사랑이 그런 갈망에 대한 대항 운동의 이름이다. 사랑―관능적이고, 몸을 나른하게 하며, 씁슬하면서 달콤한―은 바깥쪽과 위쪽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방식이지만, 이번에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다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