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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온티콜로지-객체지향 존재론을 위한 선언

 

- 아래 글은 레비 브라이언트(Levy Bryant)의 탈인간중심주의적인 철학적 사유의 하나로서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OOO)' 운동을 고무할 의도로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온티콜로지-객체지향 존재론을 위한 선언(Onticology-A Manifesto for Object-Oriented ontology)>)를 옮긴 것이다.

 

- 우선 '객체지향 존재론'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 옮겨 놓은 그레이엄 하만의 지침을 읽어 보길 바란다. 온티콜로지는 레비 브라이언트가 자신의 판본의 OOO를 지칭하기 위해 고안한 술어로서 "객체들에 관한 학문(science of objects)", 즉 객체학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OOO는 "객체들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Objects)"―곧 출판될 브라이언트의 책 제목―를 지향한다.

 

- 레비 브라이언트는 전직 정신분석가였으며 현재는 미합중국 텍사스 주 달라스 시 외곽의 콜린 칼리지(Collin College)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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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티콜로지-객체지향 존재론을 위한 선언

Onticology-A Manifesto for Object-Oriented ontology

 

맥락

 

우리는 모든 종류의 객체(대상)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어디에도 객체들에 관한 통일된 이론이나 존재론은 없다. 우리가 기술적 객체들, 자연적 객체들, 상품들, 사건들, 집단들, 동물들, 제도들, 신들, 또는 기호적 객체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든 하지 않든, 우리의 역사적 순간은, 현존하는 수많은 객체들을 환원적 유물론들이 주장하는 대로 환원시키기는 커녕, 사실상 모든 종류의 객체들의 무차차별적인 확산과 증식을 경험했다. 게다가 이런 확산은 지구적, 인간적, 그리고 집단적 삶 전체에 걸쳐 대규모의 격변과 전환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의 어떤 변종들과 지리학을 포함하여 과학기술학, 글쓰기 기술 탐구, 환경 이론과 철학, 매체학과 같은 소수의 주변적인, 그러나 엘리트적인 학문분과 밖에서는 객체들의 이런 폭발이 사유나 의문을 거의 유발하지 않으며, 실천의 층위에서는 어떤 종류의 진정한 참여나 정보에 입각한 참여도 훨씬 더 적게 유발한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제사가 떠오른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분명히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신들이 '존재[하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 표현이 본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우리도 전에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믿었는데 지금은 당혹스러움에 빠져 있다."[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이기상 옮김, 까치, 1997), p. 13]

 

이 제사는 "존재"라는 단어를 "객체"라는 단어로 대체하여 쉽게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우리도 전에는 객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으로 믿었는데 지금은 당혹스러움에 빠져 있다. 객체지향 존재론(OOO)의 의문 제기를 추동하는 것은 이런 당혹스러움이다.

 

1781: 철학의 실패

 

1781년이 서양철학에 분수령이 되는 결정적인 해라면, 그 해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되어 대단히 충격적인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객체지향 존재론은 칸트의 특정한 인식론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18세기 이래로 지속되고 변화를 겪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형식과 관계가 있다. 사실상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철학적 탐구를 단일한 관계, 인간-세계 간극에 대한 심문으로 환원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철학을 이런 단일한 관계나 간극에 대한 심문으로 환원시킬 때, 나머지 다른 것들에 손해를 끼칠 정도로 인간들이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과도하게 집중할 뿐 아니라, 이런 심문은 심대하게 비대칭적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의 행위주체성을 통해 관련되는 세계 또는 객체는, 그 자신의 것은 전혀 기여하지 않는 채, 인간의 인지, 언어, 그리고 의도를 위한 버팀목이나 탈것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적 정신은 세계에 손해를 끼치는 인간-세계 관계의 인간중심주의적 일방화로 구성될 것이다. 세계, 즉 객체들은 이제 인간 인지의 단순한 산물이 될 것이고, 철학은 이런 인지가 객체들을 형성하거나 생산하는 방식을 탐구하고자 하는 초월적 인류학이 될 것이다.

 

칸트는 일찌기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런 반전과 그것의 정신을 요약한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모든 우리의 인식은 객체들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객체들에 관하여 그것을 통해 우리의 인식이 확장될 무엇인가를 개념들에 의거해 선험적으로 이루려는 모든 시도는 이 전제 아래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번, 객체들이 우리의 인식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형이상학의 과제에 더 잘 진입할 수 있겠는가를 시도해 봄직하다. 이런 일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객체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객체들에 관해 무엇인가를 확정해야 하는, 요구되는바 객체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더 부합한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최초의 사상이 처해 있던 상황과 똑같다. 전체 별무리가 관찰자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가정에서는 천체 운동에 대한 설명이 잘 진척되지 못하게 된 후에, 코페르니쿠스는 관찰자를 회전하게 하고 반대로 별들을 정지시킨다면, 그 설명이 더 잘 되지 않을까를 시도했다.(BXVI)[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1>>(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p. 182. 여기서 '대상'을 '객체'로 바꾸었음.]

 

정신이 객체들을 따르기보다 객체들이 정신을 따른다는 가정으로 시작하여, 지식에 대한 확고한 정초와 형이상학의 끝없는 논쟁들로부터의 자유를 진정으로 추구한 칸트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서 세계 또는 객체들을 참조할 필요를 제거한다. 칸트 자신이 주장하듯이, 이런 전환 또는 반전은 무언가가 미리 주어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식별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계가 미리 주어진다면 세계 또는 객체들을 참조할 필요는 더 이상 없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철학은 자기성찰적인 것이 되는데, 존재나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주시하는 정신을 심문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정신에 독립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에게 이 세계는 모든 곳에서 그리고 항상 우리의 인지에 의해 구조화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는 인간이 영원히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철학은 그 자체로 인지가 세계를 구조화하는 메카니즘들에 대한 탐구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상실될 것은 세계가 우리를 놀라게 하는 능력일 것이다. 그리고 세계가 우리를 놀라게 하는 역량을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다면, 이것은 세계가 이미 우리 인지의 구조화하는 행위주체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모자 속에 이미 토끼가 들어 있다.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통해 철학은 세계를 탐구해야 하는 의무에서 구출되어 이제 인간들이 어떻게 세계와 객체들을 구조화하는지에 대한 자기성찰적 탐구가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철학은 초월적 인류학이 되고 세계의 객체들에 관한 어떤 논의도 궁극적으로는 인류학적 탐구가 된다. 객체와 세계는 공교롭게도 인간이 거주하는 장소가 더 이상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구조화 활동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그의 유명한 "동일성과 차이의 동일성" 또는 "실체와 주체의 동일성"으로 결국 보이려고 시도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주체에 대해 매우 초월적이고 이질적인 듯 보이는 객체가 궁극적으로는 주체라는 점을 헤겔이 보일 수 있다면, 이것은 객체가 이미 주체의 의미부여 활동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주의의 화신들

 

중요한 것은 칸트 논제의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성경 비판을 좇아서 칸트 사상의 문자정신을 구별할 수 있다. 문자의 층위에서는 칸트 인식론을 그의 세 비판서에서 전개된 대로 수용하는 사상가들이 매우 적다는 점을 알아차릴 것이다. 잉크가 거의 마르기도 전에 논쟁과 경쟁하는 제안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거의 완전히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인간이 세계를 따르기보다는 세계가 인간을 따르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일반 정신이다. 따라서 현대 철학의 거의 모든 주요한 조류는 이런 저런 식으로 칸트적 전회의 직접적인 후예들이다. 철학이 언어, 상징, 기표, 또는 기호에 의한 세계의 구조화를 제안하든지, 또는 세계가 사회적 힘이나 권력에 의해 구조화된다고 제안되는지 간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논제는 인간들이 세계를 따르기보다는 세계가 인간들을 따른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우리가 얻는 바는 보편화된 초월적 인류학이다. 논쟁은, 구조화를 초래하는 메커니즘들과 그리고 칸트의 경우처럼 이런 메커니즘들이 보편적이고 "심층 구조"와 관련 있는지, 아니면 이런 메커니즘들이 문화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가변적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그렇지만 모든 경우에서 세계를 제공하는 구조들이 이미 미리 주어지기 때문에 철학은 여전히 자기성찰적이고 세계를 참조할 필요가 면제된다. 세계를 참조하는 것은, 사실상 이런 구조들을 세계에 강제하는 주체는 우리인데 이런 구조들이 "저 바깥에" 있다고 믿는 환상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철학과 이론이 적실성을 상실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인문학에 대한 최근의 비난에서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문제는 하나의 학문분과로서의 인문학이 아닌데(누가 학문분과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그것의 구성원들이다.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중심성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에 말하기도 바라지 않고, 세계와 상호 작용하기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사적 이상들의 매우 작은 목초지를 실재하는 생명들의 거대도시로 오인한다. 우리는 입에서 십구 세기의 재림이라는 퇴행적인 꿈들을 자아내면서 동시에 괄약근에서 전체 공중의 훨씬 더 성실한 야심들―종교, 경제, 가족, 공예, 과학―을 버린다.

 

세계에 관한 이런 무관심에 대한 심리학적 동기들이 확실히 존재하지만(안락의자와 자기성찰적 전회에 의해 부여된 편안한 지배에 대한 욕망), 세계에 대한 이런 무관심은 이미 1781년 이래로 철학, 이론, 그리고 인문학을 인도해 온 핵심 가정―인간이 세계를 따르기보다 세계가 인간을 따른다는 논제―의 구조적 결과이다. 세계가 인간을 따르는 한, 칸트가 시사했듯이, 세계는 항상-이미 미리 주어지기 때문에 세계에 관해 말할 필요가 없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모든 종류의 사회 현상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진정한 진전을 초래했다. 이런 통찰과 발견들은 어떤 형식으로 존속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반실재론적 전회는 모든 종류의 필수적인 질문을 제기할 가능성을 배제했다. 반실재론적 전회의 틀 속에서는 기술, 환경, 사회구조, 정치사상 등에 관한 필수적인 질문들을 제기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여기서 세계는 미리 주어진 것으로 다루어지고 인간의 구조화 활동의 행위주체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세계 관계나 간극에 강박적으로 집중함으로써 객체들의 네트워크들을 탐구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데, 객체들이 인간들에 의해 상정된 것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철학, 이론, 그리고 인문학은 전적으로 무의미해진다. 인간-세계 간극에 대한 이런 과도한 집중을 피하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통찰과 발견들도 존속시키는 대안이 필요하다. 이 대안은 우선 인간의 자기도취에 대한 네 번째 타격을 필요로 하는데, 여기에서 인간은 다른 존재들보다 더도 덜도 중요하지 않는, 이런 타자들 가운데 한 존재로서 적절한 지위에 처하도록 중심성의 지위에서 밀려난다.

 

인식론

 

온티콜로지는 객체지향 존재론의 모든 변종들처럼 정향이 실재론적이다. 온티콜로지는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면서 대다수의 객체, 행위소, 존재, 또는 존재자들은 인간들에 독립적이고, 누구든 어떤 인간들이 그것들을 고려하든지 또는 기록하든지 상관 없이 현재의 그것들이라고 단언한다. 요약하면, 온티콜로지는 존재함이란 정신, 정령, 신체, 인간, 언어의 상관물이라는 취지로의 어떤 인간중심적, 관념론적, 또는 반실재론적 논제도 거부한다. 지식은 필연적으로 그것이 관계하는 객체에 의존한다는 점은 확실히 맞지만, 그 역은 참이 아니다. 객체들은 알려지거나, 고려되거나, 인식되거나, 또는 언급되는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적 술어로 서술하면, 지식이 객체들의 우연한 것이지 객체들이 지식의 우연한 것이 아니다. 알튀세르(Althusser)가 매우 훌륭하게 서술하듯이, "의심의 여지 없이 실재하는 것에 관한 사유와 이 실재하는 것 사이에는 관계가 있지만, 그것은 지식의 관계, 지식의 적절성 또는 부적절성의 관계이지 실재하는 관계가 아닌데, 실재하는 관계란 저 실재하는 것―사유는 이것에 관한 (적절한 또는 부적절한)지식이다―에 기입된 관계를 의미한다(<<자본 읽기>>, 96). 알튀세르는 계속해서 진술한다. "지식의 관계와 실재하는 것의 관계의 구별은 근본적인 것인데, 우리가 그것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게 사변적 관념론이나 아니면 경험주의적 관념론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ibid.). 온티콜로지는 단호하게 알튀세르의 평결을 승인한다. 객체에 속하는 관계들과 지식에 속하는 관계들을 구별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현대철학은 매우 다른 종류의 이 두 가지 관계들을 계속 혼동한다.

 

자연스럽게도, 우리가 객체들과 관계를 맺을 때 만나는 특성들을 그것들 자체가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 결정하도록 객체와 맺는 우리의 관계를 넘어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한 의문이 일어난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객체와 관계를 맺을 때에만 객체에 관계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관계를 넘어서서 객체 자체의 존재에 닿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에 관해서는 나중에 훨씬 더 많은 것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지만, 당분간 온티콜로지는 로이 바스카(Roy Bhaskar)의 초월적 실재론으로부터 인식론적 영감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바스카는 과학에 대한 초월적 기반을 제공하고자 했다. 온티콜로지가 존재의 장은 자연과학에 의해 탐구되는 객체들의 장보다 훨씬 더 방대하다는 논제를 옹호하는 한, 그것은 존재의 영역이 자연적 객체들의 영역에 의해 빠짐없이 다루어진다는 논제와 갈라진다. 그렇지만 바스카의 일반적인 논증 형식은 우리의 실재론적 목적에 부합된다.

 

초월적 논증은 어떤 인정된 인지적 실천과 형식들이 가능한 조건을 해명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칸트는 수학적 판단이 가능한 경우는 어떠해야 하는지 물었다. 마치 마술처럼 수학적 판단들을 통해 우리가 지식을 확장할 수 있는 것과, 그리고 더 중요하게, 이런 추리 형식들이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런 판단들이 세계에 관한 진정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가? 칸트 논증의 일부는 정신이 경험 데이터에 시간과 공간 형식을 부과한다는 주장으로 이루어졌다. 달리 말해서, 시간과 공간은 존재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고려하는 정신의 속성이다. 궁극적으로 수학이 가장 추상적 형식으로 취해진 시간과 공간의 특질에 관한 반추인 한, 그리고 정신이 감각의 다양체에 시간과 공간을 부과하는 한, 현실의 시공간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 현실 시공간의 구조를 예상하는, 시공간적 관계들의 특질에 관한 선험적 판단들이 필연적으로 가능하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왜? 어떤 감각의 다양체도 필연적으로 직관에 의해 부과된 이런 형식들에 의해 구조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증들은 잘 알려져 있고, 그래서 나는 독자들에게 초월적 논증의 특질을 환기시키기 위해 그것들을 얼무버릴 뿐이다. 이런 논증들은 여러 종류로 온다. 따라서, 예를 들면, 소쉬르(Saussure)가 언어의 존재를 탐구하고자 하면서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을 구별할 때, 그는 언술 또는 한 특수한 언어 내에서 어떤 언술 행위들이 가능한 조건을 설명하는 초월적 논증을 하고 있다. 랑그 또는 기표들의 통시적 체계는 파롤 또는 언술이 가능한 조건이다. 여기서 소쉬르의 특수한 판본의 초월적 논증은 두 가지 점에서 칸트와 다르다. 첫째, 랑그는 문화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반면에, 칸트의 선험적 범주들과 직관 형식들은 불변이고, 바뀌지 않으며, 문화를 가로질러 보편적이다. 둘째, 칸트의 선험적 직관 형식과 오성 범주들은, 초월적 주체성의 형식으로지만, 정신에 의해 부과되는 반면에, 소쉬르의 랑그는 어떤 특수한 주체에도 속하지 않는 집단적 구조이다. 두 사상가가 공유하고 있는 바는 소여 내에 자체적으로 주어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통해 또는 그것에 의해 소여가 주어지는 조건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다. 소쉬르의 경우에는 우리가 말하고 소통하는 점을 주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초월적 의문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이다. 비슷하게, 칸트에서는 우리가 수학적 판단들을 하며, 이런 판단들은 직관의 다양체에 적용되고 세계 내에 아무 상관물도 없는 허구나 거미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초월적 의문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이다. 이런 의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소여나 경험 외의 다른 무언가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바스카의 경우에도 그렇다. 바스카는 과학이 어떻게 가능하고, 특히 우리는 왜 과학에서 실험에 의지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 자체로 바스카는 초월적 탐구에 관여하고 있다. 그렇지만 바스카의 초월적 탐구를 이전의 초월적 탐구들과 몹시 구별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대답을 구성할 때 정신, 문화, 언어, 또는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에 의지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바스카는, 과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놀랍고 대담한 움직임으로, 과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묻는다. 요약하면, 우리의 과학이 가능하려면―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세계가 어떤 특수한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가 존재해야 하는 이런 방식은 우리가 과학을 수행하기 위해 실험에 관여해야 하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스카는, 1) 우리의 과학이 가능하기 위해서, 그리고 2) 왜 실험이 필요한지 설명하기 위해서 세계가 지녀야 하는 두 가지 일반적인 특징을 개괄한다. 먼저 두 번째 의문을 고려하자. 왜 실험이 필요한가? 경험주의자들이 옳고 우리의 모든 지식이 감각에서 기인한다면, 왜 실험이 필요한지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칸트가 지식은 감각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험주의적 사유 노선을 전적으로 인계받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오히려, 실험이 불필요하다면, 이것은 자연을 수동적으로 관찰하여, 칸트의 경우처럼 선험적 범주들을 통해서든, 또는 흄의 경우처럼 연합 양태들을 통해서든, 적절한 감각들과 연결하기만 하면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실험이 필요불가결하다면, 이것은 객체들이 일반적인 조건에서는 자신들의 힘 또는 역량을 표명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가능할 것이다. 객체들은 일반적인 조건에서는 자신들의 힘을 표명하거나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객체들 내부에 놓여 있는 힘을 만날―또는 더 좋게는, 발견할―수 있는 것은 실험 환경의 고도로 조직화되고 고립된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그 결과,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감각들은 지식의 기원이 아니다. 그렇다면 존재론적으로, 실험이 가능하기도 하고 필요하기도 한 조건은 객체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자연에서 아니면 지각 주체에게 표명하지 않는 채 행위할 수 있는 세계에만 존재한다.

 

그 자체로 객체들의 존재(being)와 객체들의 표명(manifestation)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객체들은 행위자이지만, 이런 행위들은 자연에서의 자신들의 수행(어떤 인간도 그것들을 지각하지 않을 사건들)이나 아니면 인간에 대한 자신들의 수행과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객체의 고유 존재(proper being)는 그것의 수행이나 표명이 아니라, 이런 수행이나 표명들이 가능한 조건으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생성 메커니즘이다.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이 논증할 것―매우 다른 이론적 배치에서지만―처럼 객체들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물러나 있거나 숨겨져 있다. 아무도 단일한 객체를 결코 지각할 수 없으며, 우리는 객체들의 모든 종류의 효과를 지각한다. 전통적인 인식론은 이런 효과들을 객체들 자체와 혼동해 왔다. 운이 좋게도, 우리는 가끔 그것들의 효과들로부터 이런 생성 메커니즘들을 추론하는 일종의 탐지 작업을 통해 객체들을 인지해 내는데,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객체의 무한성을 결코 빠짐없이 다루지는 못한다. 어쨌든, 객체들이 이런 식으로 물러나 있지 않다면 실험의 실천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첫 번째 의문―과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바스카의 대답에 이른다. 이것은 정신이나 문화에 관한 의문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상관없이, 세계 자체에 관한 의문이라는 점을 유념하자. 다시 한번, 지식이 객체들의 우연한 것이지 객체들이 의식이나 인지의 우연한 것이 아니다. 과학이 가능하려면―그리고 내가 논증할 것처럼, 인간의 어떤 실천도 가능하려면―세계가 구조화되고 분화되어야 한다. 세계는 관절들이 있어야 하거나, 하만이 서술하듯이, 세계는 "덩어리들"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왜 이것이 옳은가? 실험 행위와 실험이 가능한 조건에 관한 의문으로 되돌아 가자. 인간들에 독립적인 세계의 존재론적 특질과 관련된 두 가지 가능한 가정을 택하자.

 

1) 어떤 신비주의자와 현대의 내밀한 신비주의자가 가정하듯이, 세계는 인지를 통해서이든, 언어를 통해서이든, 어떤 형식의 인간적 행위주체에 의해 그 결과로서만 개별적 존재자들로 분리되거나 분할되는 미분화된 하나의 전체이다(언어의 경우에 소쉬르와 옐름슬레우(Hjelmslev)의 미분화된 "울림 물질"에 관해 생각할 수도 있다).

 

2) 존재자들은 그것들이 우주 내의 다른 모든 존재자와 맺는 관계들의 총합이다.

 

첫 번째 가정은 두 가지를 근거로 쉽게 처리된다. 첫째, 이 가정은 그것 자체의 언명 속에 모순을 기입하지 못한다. 명시적 내용의 층위에서 그것은 세계란 나중에서야 개별적인 존재자들로 분할되는 미분화된 하나의 전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자체의 언명의 무의식적 층위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이런 하나의 전체 내부에서 미분화되지 않은, 최소한 하나의 구조화된 분화, 즉 그것을 통해서 하나의 전체가 그 결과로서 분화하게 되는 행위주체를 기입한다는 점이다. 어떤 반실재론적 초월주의 철학자들은, 너무나 영리한 몸짓으로, 세계를 분할하는 행위주체는 현존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며, 교묘한 책략을 통해 이 모순을 해소하려고 시도한다. 그렇지만, 메이야수가 <<유한성 이후>>에서 보였듯이, 초월주의적 반실재론 철학자들의 경우에 초월적 주체를 스스로 현존하지 않는 비현존적 또는 비객관적 행위주체으로 취급하려는 시도들은 결국 너무나 명료하게 유한성 개념과 신체(분화된 존재 또는 생성 메커니즘)에 부과되는 분할 작업을 덧붙이게 된다. 둘째, 반실재론적 초월주의 철학자들이 초월적인 것의 비현존에 의지함으로써 우리를 납득시킬 것이라고 가정하면, 우리는 여전히 문제들을 만날 것인가? 아틀라스처럼 초월적 주체는 하나의 전체의 무형의 아페이론을 원시적 혼돈에서 극도로 분할된 세계로 분할하는 엄청난 과업을 부과받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세계는 아틀라스 같은 거인조차도 붙잡기에는 너무나 미끄러운 듯 보인다. 인간들에 앞서고 독립적인 세계가 진정으로 무형의 아페이론이라면, 그것은 아틀라스가 그의 분할 활동을 하면서 붙잡을 손잡이들을 제공할 아무 차이도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아무 분할도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대 우리는 도처에서 분할을 만나고, 그래서 세계는 무형의 하나의 전체가 아니라, 오히려 구조와 분화가 인간들과 만나면서 변형되더라도 구조화되고 분화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첫 번째 가정을 처리했으니 이제 두 번째 가정을 탐구하자. 존재자들의 존재는 전적으로  그것들이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맺는 관계들로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이것이 맞다고 가정하자. 이것이 참이라면, 실험적 실천에 필요한 닫힌 계들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인데, 생성 능력의 은폐를 초래하는 열린 계로부터 객체 또는 생성 메커니즘을 격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실험에 관여하고, 그래서 생성 메커니즘들을 정말 격리한다. 어떤 생성 메커니즘도 다른 존재자들과의 관계들에서 결코 완전히 격리될 수 없다는 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원칙적으로 객체들은 그것들이 맺는 관계들에 독립적이다. 따라서, 온티콜로지는 객체들이 관계들을 맺는다는 점을 쉽게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온티콜로지는 객체들이 그것들의 관계들이라는 존재론적 논제는 거부한다. 하만이 지적했듯이, 모든 종류의 존재론적 함의와 의문들은 관계 없는 객체라는 이 논제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바스카가 어떻게 초월적 의문과 심지어 인식론 자체의 특질을 뒤집었는지 주목하자. 초월적인 것은 정신, 문화, 또는 언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언젠가는 논의되어야 할 어떤 경우들에는 그럴지라도) 오히려 세계 자체의 특성이다. 게다가, 인식론의 조건이 존재론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세계는 지식이 가능하도록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하고, 이런 존재론적 조건은 의식을 위해 또는 의식에게 무엇이 주어지는지에 관한 의문들로 인식론적으로 환원함으로써 가려질 수 없다. 게다가, 인식론이 가능한 한 가지 조건은 인간들이 현존하지 않는 세계의 조건이다. 이것은, 이것들이 존재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특성이나 특징들이라고 주장하는 극적인 방식이다. 이제 바스카의 성찰은 과학이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론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런 터무니없는 인식론적인 사소한 것들로써 이런 논증의 형식이 과학에 의해 탐구되는 자연 존재들이나 생성 메커니즘들을 넘어 훨씬 더 확장된다는 점을 증명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탐구는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