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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올슨: 오늘의 에세이-교육, 신자유주의 문화, 그리고 뇌

 

교육, 신자유주의 문화, 그리고 뇌

Education, Neoliberal Culture, and the Brain

 

―― 게리 올슨(Gary Olson)

 

인간 본성이 가장 비열한 행동에서부터 때때로 신성한 행동에 가까운 숭고한 행동에까지 이르는 행동들의 연속체을 드러낸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최소한 이것은, 아민 말루프(Amin Maalouf)의 말처럼, "우리 각자의 내부에는 하이드 씨가 존재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괴물이 튀어나오게 할 조건을 방지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스펙트럼의 오른쪽 끝에 놓여 있는 것은 우리의 영장류 유산에 뿌리 깊이 박힌 특질인 우리의 공감하는 성향이다. 이제 공감(empathy)―타자의 정서적 및 인지적 처지에 입각하여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은 대단히 뜨거운 화제인데, 사실상 책, 기사, 그리고 유튜브 영상들의 가내 공업이 되었다.

 

진화 과정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타자와 연결할 수 있도록 하는 배선된 신경 체계가 생겨났지만, 공감 장애가 있는 우리 사회는 "공감 전염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믿고 있다. 공감적 문화의 구성을 방해하는 것으로 자주 인용되는 인자들 속에서는 양육, 교육,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에서 유아 프로그램, 의미 있는 사회적 연결, 그리고 사회적 지위의 성취에 대한 부적절한 강조까지 모든 것이 발견된다.

 

공감의 신경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권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마르코 이아카보니(Marco Iacaboni) 박사는, 거울 신경세포, 즉 공감의 원인이 되는 신경세포의 발견은 "매우 본원적이어서 우리는 틀림없이 하나의 혁명, 거울 신경세포 혁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왜? 우리가 개인들과 위험에 처한 지구의 미래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깊은 함의들 때문이다. 이런 신경과학적 발견 결과들은 과학과 세속적 도덕 사이의 행운의 결합을 위한 토대가 될 수 있지만, 이아카보니 교수가 주장하듯이, 이것은 "우리 사회들을 지배하고 우리를 파괴할 조짐을 보이는 거대한 믿음 체계들"을 해체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나는 이런 믿음 체계들 가운데 가장 교활하고, 유력하며, 그리고 대체로 인식되지 않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라고 느낀다. 즉, 공감과 관련하여 활발하게 그리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대화에서 빠져 있는 중대한 것은 문화, 정치, 그리고 뇌의 역동적인 수렴―저명한 정치이론가 윌리엄 코널리(William Connolly)가 언젠가 신경정치(neuropolitics) 또는 "문화 생활이 육체/뇌 과정의 구성에 쌍방향적으로 혼입되는 정치"로 서술한 것―을 식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적용된 이 설명은 프랑스 철학자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가 "신경 이데올로기(neural ideology)"라고 명명했던 것―현대 기업 자본주의의 사회적 및 정치적 조직에 순응하는 뇌의 가소성―에 해당한다. 내게는 가장 적절한 의문들이 여전히 있다. 이런 문화적 정보는 어떻게 뇌에 주입될 수 있는가? 그리고 공감의 신경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함의들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디시던트 보이스(Dissident Voice)>>의 독자들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공감적 관심이 1970년대 대학생들보다 현저하게 낮으며 그런 감소는 2000년 이후에 특히 두드러졌다는 점을 보여주는 연구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대학생들을 지목하여 책망하는 것은 결코 내 의도가 아니다.

 

모든 뇌들이 기본적으로 유사하여 동일한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상이한 문화적 경험들이 우리의 뇌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고, 우리가 공감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을 포함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기서 나는 "함께 발화하는 신경세포들은 함께 배선된다"는 도널드 헵(Donald Hebb)의 규칙을 희화화하지 않으려고 의식하고 있지만, 그가 반복과 시냅스 가소성의 역할들에 대해 강조한 덕분에 우리는 문화의 신경생물학적 각인이라는 중대한 역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문화신경과학(cultural neuroscience)의 설득력 있는 최근 연구는 반복적인 특정한 문화적 주입이 뇌에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치며, 이런 신경적 서명은 유아기에 시작된다는 점을 예증한다. 사실상 그것은 배선된 특질들을 압도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 자체로, 그리고 헨리 지루(Henry Giroux)의 적절한 구절처럼, 공감을 마비시키는 신자유주의적 지배 문화는 사회 전체에 걸쳐 사회적 연대의 느낌을 배제하는 "공적인 교육법(public pedagogy)"이 되었다.

 

공감 결핍증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더 명백하다면, 그것은 그들이 인간 본성에 관한 자본주의의 지배적 서사와 고삐 풀린 탐욕의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끊임없이 노출되었던 지난 삼십 년 동안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경제적 자기 실현과 "자아"―타자들의 운명에 대체로 무관심하고 도덕의 상품화에 마음이 편한, 과도하게 경쟁적인 영원한 소비자―의 추구로 환원되어 버렸다. 이런 문화적인 자아 구성은 주로 시장 가치들에 정초하는데, 그 여파로 선택적인 도덕적 기억 상실증을 초래한다.

 

여기서 내 말을 오해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배적인 문화의 사회 공학은 자선을 베푸는 자본가들의 자발주의를 비롯하여 개별적인 공감의 표현들을 허용하고 심지어 고무한다. 그런 행위들은 원인이 아니라 증상들만 다루기 때문에, 그것들은 문화적으로 용인되고, 아무런 구조적 위협도 제기하지 않으며, 전체적 규모에서 사회적 공감의 수용, 합법화, 그리고 제도화를 약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소수의 주목할 만한 예외적 인물들을 제외하고, 공감 전문가들은 문화화된 뇌를 탐구하는 것과 관련된 정치적 문제들을 제기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전통적인 사회과학은 문화를 믿음, 가치, 관습과 법률들의 중립적인 전달로 설명해왔다는 점에서 특수한 계급 이익에 봉사하는 제도들에 의한 문화의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개입을 조명하지 않는다.

 

권력을 쥔 집단들이 문화에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 방식과 이것이 뇌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예증하는 것은 추측하는 것만큼 벅찬 과업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주류 지식인들은 이런 도전을  비록 있다 해도 극히 드물게 받아들였다. 그것 자체로, 계급을 설명하지 못하는(또는 설명하기를 거부하는) 빠르게 부상하고 있는 신경학들은, 최선의 경우에는 아무런 설명적 가치도 없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가치중립적인 과학적 탐구를 가장하여 현실을 모호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실패는 우리의 공감적 충동의 거의 전적인 무력화에 대한 이해의 견지에서 이런 실패는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공감의 진화적 및 생물학적 기원들에 관한 연구들이 진행 중에 있지만, 현재 우리는 대단히 더 나은 사회의 조직을 옹호하는 변론을 위한 단단한 경험적 증거―희망적 관측이나 심지어 논리적 추론이 아닌―가 있다. 공감적 참여에 대한 우리의 잠재력이 지배적인 경제적 체계와 그것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파과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돌봄의 풍조가 인간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본질적인 부분이고 인간적 행복을 위한 기본적인 요구 사항이라면, 공감 장애가 있는 사회들은 틀림없이 결핍되어 있고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드러난다. 공감에 관한 연구 의제, 논쟁, 그리고 대화로부터 이런 가설을 무시하거나 배제하겠다는 신경학자들의 암묵적인 결단은 용서받을 수 없지만 전적으로 뜻밖의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