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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뇌와 마음의 가소성

 

나는 곧 내 뇌다

I Am My Brain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이것에 관한 글을 꽤 자주 적었지만, 나는 항상 그것을 잊는다. 나는 곧 내 뇌다. 이것을 기억할 때마다 나는 엄청나게 무거운 벽돌로 타격을 받은 것처럼 느낀다. 이 생각은 공포와 경이로 나를 동시에 채울 뿐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종류의 윤리적 의문들도 제기한다. 왜 이럴 수밖에 없는가? 결국 나는, 자아는 뇌에 수용되어 있다는 명제에 익숙해져 버렸다. 나는 그것을 세계에 관한 즉각적이고 명백한 진리로 당연히 여긴다. 그런데 어쨌든 그 진리는 결코 전적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내가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또는 생각할 수―는 있지만, 이 진술의 함의들과 진실성은 재빨리 물러서는 듯 보인다. 나는 그것을 추상적으로는 이해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매우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내 자신이 내 뇌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라고 생각한다. 일상 생활에서 내 존재에 대한 나의 자발적인 감각은 뇌가 아니라 자아에 대한 감각이다. 물론, 내가 곧 내 뇌라면 내 자아는 곧 내 뇌라는 것이 참이다. 그렇지만 요점은, 자아가 뇌라면 나는 내 자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철저히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나의 자발적인 존재 의식 속에 있는 내 자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내 자아가 사유, 경험, 감각, 그리고 세계에 독립적인 불변의 동일성이라고 생각한다고 추정된다. 내 자아는 내가 생각하고, 감각하고, 경험하며, 그리고 타자들 및 세계와 만나는 동안 내내 변하지 않은 채 동일한 것으로 남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아마도 그것은 초자연적인 원을 그리며 춤추고 있는 자줏빛 코끼리 한 마리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나, 즉 이 자아가 있고, 그 밖에 이 생각이 있다. 이 생각과 관련하여 아무 문제도 없다. 나는 그 생각이 악몽 속의 소름끼치는 광대처럼 심란한 것으로 깨달을 것이다. 아무 문제도 없다. 그 생각은 곧 지나갈 것이고 나, 즉 이 자아는 그대로 남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괴로운 경험을 겪는다. 나, 즉 이 자아가 있고 그 밖에 경험이 있다. 아무 걱정도 없다. 내 자아는 그대로 남을 것이고, 경험은 지나갈 것이다.

 

내가 자아라는 자발적이고 무성찰적인 경험에서 나는 내 경험, 사유, 기억, 그리고 감각들과 내 자아가 항상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경험한다. 이런 사유, 기억, 감각, 그리고 경험들은 모두 지나가서 사라질 것이고, 항상 그랬듯이 그대로 남을 것이다. 나의 정신적 생활의 동요 위 또는 아래에 놓여 있는, 소박하게 이해되는 실체성, 즉 동일성의 핵심이 항상 존재한다. 생각하기, 기억하기, 경험하기, 관찰하기, 그리고 감지하기는 나, 즉 이 자아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자아는 그대로 남고, 사유, 감각, 기억, 그리고 경험들은 지나간다. 나는 항상 이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그것들을 생각하고, 그것들을 판단하고, 그것들을 용인할지 여부를 선택하고, 그것들에 어떻게 반응할지 선택하며, 그것들을 지니고 있을지 여부를 선택하지만, 나는 항상 그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그래서 내가 그렇게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들을 물리칠 수 있다. 그것은 꿈일 뿐이었고, 생각일 뿐이었다. 이 경험도 지나갈 것이다.

 

그런데 내 자아가 내 뇌라면 이 모든 것은 바뀐다. 신경학자들은 내 뇌가 조형적이라고 말한다. 내 뇌는 고정된 불변의 사물이 아니라, 자체를 끊임없이 재배선하고 있는 역동적인 사물이다. 게다가 내 뇌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은 이중적 형식으로 전개되는 듯 보인다(여기서 내 언어는 부적절하다). 나는 이 생각을 하고 있다. 아마도 나는 내 고양이에 관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현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이 생각은 지향성 또는 정향성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나는 내 고양이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또한 내 고양이에 관한 내 생각은 동시에 내 고양이에 관한 내 생각을 "기록한다". 내 고양이에 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또한 나는 내 뇌를 재배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제 나는 버지니아 주 크랩트리 폭포로 간 지난 여행을 회상하고 있다. 크랩트리 폭포에 관한 내 기억은, 일단 내 의식에서 벗어나면 사라져 버릴 것에 관한 회상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회상이라는 행위도 내 뇌를 재배열하고 있다. 회상하는 동안 나는 항상 그런 회상의 바로 그 본성을 매우 미약하게 또는 두드러지게 변화시키고 있고, 내 뇌를 다르게 구성하고 있으며, 내 자신을 다르게 코드화하고 있다.

 

내 자아가 내 뇌라면, 내 경험, 사유, 회상, 감각, 독서 행위, 대화 등과 내 자아 사이에는 아무 거리도 없다. 이것들은 모두 내 자아는 그대로 남아 있는 반면에 사라져 버릴 것들이 더 이상 아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모두, 이 활동들은 모두 나를 재배선하고 있고, 나를 다르게 만들고 있으며, 나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런 활동들 각각을 수행함으로써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세계에 대해 신참이 된다. 게다가 와인을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신경외과 의사의 칼이 지나갈 때마다 내가 뇌졸중을 일으킨다면, 내 자아의 일부는 사라져 버려 결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참이라면, 나는 내가 정말 무엇인지 궁금하다. 생각하고 회상하는 활동을 수행하면서 내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나는 어떤 종류의 존재인가? 내가 나이가 들거나, 또는 내가 심각한 뇌 손상을 겪는다면 내 자아가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내 사유, 경험, 감각, 회상, 대화, 독서, 사랑 등과 내 자아 사이에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이런 것들을 태연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 것에도 위험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곧 내 뇌라면, 나는 이런 것들 모두에 위험이 존재한다는 점을 안다. 생각하는 것은 나를 영원히 변화시킬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내가 결코 돌아갈 수 없는 방식으로 나를 재구성할 또 하나의 것에 나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나는 세계로부터 물러설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세계에 노출되어 있으며, 내 사유와 내가 세계 및 타자들과 맺는 관계들은 끊임없이 나를 재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며, 그리고 회상할 때, 또한 나는 나 자신을 선택하고 있고 나 자신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것들의 결과들이 결정될 수 없는 방식들로 나 자신을 선택하고 있고 재구성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중에 어떤 단계의 나 자신은 매우 많이 다를지도 모른다. 내가 곧 내 뇌라면,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나는 누구와 대화를 나누어야 하며, 그리고 하나의 기획과 활동으로서의 내 자아는 언제―엄청난 심리학적 절망 또는 신경학적 손상을 겪은 경우에―이 모험을 계속할 가치를 소진하는가? 내 자아가 곧 내 뇌라는 인식은 내게 공포와 경이뿐 아니라, 인지하기의 위험과 모험에 대한 엄청난 이해도 가져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