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문정우: 오늘의 인용-세계는 변했다

 

"

20년도 더 전에 일본의 반핵 운동가가 보여줬던 만평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까마득히 높은 다이빙대에서 다이버가 몸을 풀고 있다. 넓은 수영장은 맨바닥을 드러낸 채다. 과학자들이 다이버에게 안심하고 뛰어내리라는 수신호를 보낸다. 다이버가 떨어지는 동안 수영장에 물을 대겠다는 것이다. 핵의 평화적 이용이란 바로 그처럼 위험천만한 짓이라는 풍자였다.

 

이 뛰어난 만평가의 통찰은 정확했다. 과학자와 그들 뒤에 도사린 정치가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다이버는 결국 뛰어내렸고, 수영장 물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것이 체르노빌이고 후쿠시마다. 불운하게도 앞번호를 받았던 몇몇 다이버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는데도 도약대는 여전히 용감한 다이버들로 붐빈다. 그 가운데 자랑스러운 태극마크도 보인다. 도약대 위에서는 앞서 뛰어내린 다이버가 기술이 부족해 변을 당했다는 분위기다. 덕분에 20세기를 관통해온 이 희대의 사기극은 21세기에도 진행형이다.

 

만평은 20세기형 사고의 한계도 보여준다. 20세기 지구라는 행성을 휩쓸었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출구에는 그래도 희망이 보였다. 숱한 희생자의 무덤 위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밝은 세상을 꿈꿀 수 있었다. 인간의 악행에 치를 떨었어도 그들을 둘러싼 자연은 무심한 듯했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의지할 만했다. 그래서 이 만평가는 다이버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뇌수를 뿌리는 순간이 비극의 정점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다이버가 숨을 거두는 순간 수영장과 수영장 밖의 모든 세상이 변했다. 과거에 우리가 의존했던 사고방식의 고리가 끊어지고 말았다. 지구 자체가 아주 낯선 행성이 되었다.

"

―― 문정우, <<나는 읽는다>>(시사IN북, 2013), pp. 4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