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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클라스 루만: 오늘의 인용-체계 이론의 탈인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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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론적 문제들은 자기지시적 체계들 안에서 관찰들을 관찰하는 문제, 기술들을 기술하는 문제, 계산들을 계산하는 문제로 다루어진다. 푀르스터(Heinz von Foerster)는 이를 '이차 사이버네틱스'라 부른 바 있다. 이 이론의 맥락에서는 '인식론적 구성주의'라는 용어도 사용되고 있다. [...] 동시에 이러한 접근은 사회이론이 근거로 삼고 있는 전제들을 확립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런 방법론을 이용하면 사회를 오직 소통으로만 이루어진 하나의 사회적 체계로, 즉 소통들에 의해서만 소통들을 재생산할 수 있는 하나의 체계로 다루는 일이 가능해진다. 이런 체계는 사회가 자기 자신에 관해 소통하는 것(특히 사회이론)도 포함된다. 사회가 진화하면서 날마다 기능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들―생명과 의식을 포함해―은 이 체계의 환경에 속한다.

 

현재의 논쟁에서는 이렇듯 통상적이지 않은 이론의 설계가 가장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이런 반발은 인본주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런데 체계이론의 입장에서 볼 때 '환경'은 부차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영역이 결코 아니다. 그와 반대로 환경은 체계들의 형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조건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여기서 이용되고 있는 이론적 접근은 인류, 인간이라는 종, 합리적 생활양식의 규범들 또는 지성사나 인간 삶의 목적 등과 같은 주도 원리들을 포기하고, 그 원리들을 체계와 환경의 분화로 대체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론이 전체적 통일 대신 차이 위에 구축되면 훨씬 더 풍부해질 것이며 더 많은 이론적 구성물들을 낳을 것이라는 생각이 이런 제안의 동기를 이루고 있다. 이 이론은 스펜서 브라운(George Spencer Brown)의 논리학이 제시하는 지침, 즉 "하나의 구별을 하라(draw a distinction)!"라는 지침을 따르면서 출발한다.

 

이러한 이론적 모델과 푸코의 작업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뚜렷한 탈인본주의 관점이다. 인본주의가 주체를 고양시키다가 고갈되어버린 지금, 탈인본주의 관점을 취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푸코와 마찬가지로 나도 '선(Good)'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무슨 멋지고 유용한 이론을 찾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며, 현재 상태에 대한 분노에 휩싸이는 일에도 관심이 없다. 그러나 푸코가 고통받는 우리의 신체를 지배하는 담론 권력을 이야기하는 반면, 체계이론은 체계와 환경의 관계를 분석한다. 또한 체계이론적 접근은 우리가 문화적 명령에 따라 사랑하고 고통받는다는 점을 논증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 더해 체계이론은 사회적 관계들에서 생겨나는 변이들이 갖는 임의적이지 않은 성격을 기술할 수 있는 복잡한 이론적 장치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해준다. 이 변이들의 개별 특징을 실제로 설명해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특정한 담론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일을 해명하지 않고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특정 시기의 지배적 의미론은 사회구조와 양립할 때만―단순한 '반영'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상부구조에 있는 하나의 관계를 뜻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개연적인 것이 된다. 양립 가능성은 상당히 정교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또한 진화 상황과 이행 상황의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다. 이런 상황들에서는 사라지고 있는 구질서에서 경험되는 개연성 상실이 다른 개연성으로 보충되어야 하며, 새로운 의미 형상들이 변화된 조건에 적합한지가 검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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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열정으로서의 사랑: 친밀성의 코드화>>(정성훈 등 옮김, 새물결, 2009), pp.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