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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기호학적 또는 상징적 객체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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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견해에 따르면,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실재하는 것들의 지표다. 무언가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실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내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실재하는 것들의 지표라고 주장할 때, 나는 무언가를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위한 인식론적 기준을 암시하는 것이지, 무언가를 실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존재론적 기준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자. 이것이 왜 중요한가? 이것이 중요한 까닭은, 존재론적으로는 무언가가 우리 또는 무엇이든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 아무 차이도 만들어내지 않은 채 실재적이거나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 사물의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차이의 생성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의 생성은 우리가 무언가가 실재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일 뿐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실재적인 것이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맞다면, 뽀빠이와 일각수는 세상에서 모든 종류들의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실재적인 것이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다. 이것이 모든 소동이 비롯되는 지점이다. [...] 뽀빠이가 세상에서 모든 종류들의 차이나 효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뽀빠이는 실재적이라고 주장할 때 나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확실히 나는 뽀빠이 같은 존재자가 레자라는 인물이 이 세상 저쪽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 저쪽에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뽀빠이는 먹지 않고, 시금치를 조리할 수 없고, 대중 과학서적을 읽을 수 없고, 나를 칠 수 없고, 물고기를 잡거나 배를 몰지 않고, 결정을 내릴 수 없으며, 감정이 없다. 기타 등등. 뽀빠이는 레자나 내가 지니고 있는 그런 종류들의 능력들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세상 저쪽에서 실재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허구로서의 실체성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 점을 이해하거나 수용하기가 왜 어려운지 잘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우리들 대부분은 무언가가 효과를 낳으면 그것은 인과적 능력이 있으며, 그리고 무언가가 인과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존재자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것이 맞다면, 우리는 왜 허구적 존재자들에 대해서는 예외를 둘 것인가?

 

[...] 그레이엄은 허구적 존재자가 실재적 객체 안에 존재하는 감각적 객체라고 주장한다. 감각적 존재자는 오로지 실재적 존재자의 내부에서만 존재하는 존재자다. 약간 다르게 서술하면, 그레이엄의 테제는, 실재적 존재자는 자체적으로 실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성이 있는 반면에, 감각적 존재자는 독립적이거나 실체적인 존재성이 없다는 것이다. 감각적 존재자를 포함하는 실재적 존재자를 파괴하면 감각적 존재자도 파괴된다. 반면에, 누군가가 나와 관련된 감각적 존재자를 파괴하면―예를 들면, 내 딸이 나에 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면― 그럼에도 나는 계속 존재한다.

 

확실히 나는 그레이엄의 주장을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기호학적 존재자들이 그가 서술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주장은 맞지 않는 듯 보인다. 어젯 밤 내가 꾸었던 꿈은 나와는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 감각적 존재자이고, 그래서 내가 파괴되거나 또는 내가 생각하기를 그만둘 때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레이엄의 견해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이 꿈을 종이에 적어서 기록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이런저런 매체에 보존한다면, 상황이 두드러지게 바뀌는 듯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그 꿈은 감각적 존재자에서 벗어나 자체적으로 실체적 존재자가 되는 듯 보인다. 누가 그것에 관해 생각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것은 전 세계에 걸쳐 순환하는 물질적 존재자가 된다.

 

허구적 존재자들에 대한 내 관심은 정말로 허구적 존재자들과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 확실히, 과학에 의해 연구되는 존재자들이 세계의 기본적인 구성물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주의적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을 뽀빠이가 실재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완전히 미친 사람들이 되도록 몰아가는 것은 즐겁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로 쟁점인 것은 아니다. 내 경우에, 흥미로운 쟁점은 기호학적 존재자와 상징적 존재자들의 존재론적 지위와 관련되어 있다. 언어, 제도, 헌장, 돈, 신화, 텍스트, 영화, 서사, 사회적 범주 등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 기호학적 존재자들은 기묘한데, 그것들은 전적으로 주관적이지도 않으며 전적으로 객관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법은 확실히 바위와 같지 않다. 그것은 바위가 그런 것처럼 시간과 공간 상에 국소화되어 있는 듯 보이지 않는다. 법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개별적 사물인 듯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은 그저 마음이나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인 듯 보이지 않는다. 많은 점에 있어서, 법은 어느 모로 보나 동상을 유발할 수 있는 매우 찬 공기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이다. 법은 사람들이 헤쳐 나가야 하는 세상 속에서 실재하는 제약이다. 마찬가지로, "테러리스트"나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사회적 범주들[...]은 세상 속의 서술자일 뿐 아니라, 그것들이 들이닥치는 사람들에게 실재적 영향을 미친다.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주변 세계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 행동을 경험하는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모든 종류들의 제도와 제도적 실천들에 묻어 들어가 있다.

 

<<그리스 사유의 기원>>에서 민족지학자 장 피에르 베르낭(Jean-Pierre Vernant)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법을 시장의 벽에 새기기 시작했을 때 그리스 법이 두드러진 변화를 겪었던 방식에 관해 이야기한다. 법이 더 이상 언설을 통해서 생성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새겨졌을 때, 그것은 새로운 실재성을 띠는 듯 보였다. 베르낭은 이런 기입 행위가 그리스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과 언설에 무관한 영원한 보편자 같은 것들의 현존을 고려하게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추측한다. 그런 기입과 관련된 것이 법을 세계 속 실재적 존재자로 변환시켰다

 

내게 핵심은 이런 기호학적 존재자들이 마음이나 개체들에 무관하게 존재하는 세계 속 실재적 존재자들이라는 점이다. 내가 "비행하는 스파게티 괴물은 실재적이다"라는 진술 같은 것을 말할 때, 나는 이 신화가 가리키는 것이 실재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화 자체가 하나의 텍스트로서 모든 종류들의 효과를 낳으면서 전 세계에 걸쳐서 순환하는 실재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것은 특수한 집단들에서 인간들의 집합체들을 조직하는 데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그래서 연합체들의 생성에 기여한다. 그것은 해체를 유발하여 타자들(그 신화와 그것이 창조 이야기를 조롱하는 방식에 불쾌해진 사람들)을 쫓아내는 데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 핵심은 사람들이 왜 지금처럼 행동하는지 그리고 왜 자신이 행하는 것을 행하는지에 영향을 미치는 실재적 인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분류, 신화, 이데올로기 등이 실재적 효과를 낳는 우리 세계의 실재적 특징들이 아니라면, 왜 우리가 이런 것들을 비판하고, 많은 경우에는 그것들을 파괴하려고 노력하는 데 매우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하는지 어리둥절한 채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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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