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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 캐럴: 오늘의 에세이-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이란 무엇인가?

What Is Science?

 

―― 션 캐럴(Sean Carroll)

 

 

"택시"라는 낱말을 규정하는 일을 맡은 어느 사전 집필자에 관한 오랜 우화―그것이 내가 인용해야 할 유명한 사람에서 유래하는지, 아니면 몇 년 전에 내가 어떤 무명의 책에서 읽었는지 확실하지 않다―가 있다. 상황은 이렇다. 그는 모든 택시는 노란색이고 택시가 아닌 모든 자동차는 파란색인 나라에서 살며 일한다. 대단히 단순한 규정을 위해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택시는 노란색 자동차다."

 

바라건대, 문제는 명백하다. 그 규정은 그런 특수한 나라에서 택시와 비택시 사이의 차이점들을 구분하는 데 충분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무언가를 택시로 만드는 것의 본질의 결코 포착하지 못한다. 그 사전의 충실한 독자들이 택시들이 녹색인 다른 나라를 방문했을 때 상황은 악화되었다. "터무니없다"고 그들이 말했다. "모든 사람이 택시가 녹색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당신들은 전적으로 틀렸다."

 

그 택시들이 과학을 나타낸다.

[...]

과학이라는 개념을 규정하는 것은 골치 아픈 일로 악명이 높다. 특히 과학과 비과학 사이의 경계를 어디에 설정해야 하는지 묻는 경계 설정 문제(demarcation problem)를 둘러싼 논쟁은 오랫동안 벌어졌다. 여기서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한 그 어떤 최종적인 해답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을 서술하기 위한 어떤 단순한 도식에 근거하여 난점들을 몇 개의 구분되는 범주들로 나눌 수 있다고 믿는다. 본질적으로, 과학은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과정으로 구성된다.

 

1. 가능한 모든 세계의 모습에 관해 생각하라. 각 모습을 "가설"이라고 부르자.

2. 세계의 모습이 실제로 어떠한지 관찰하라. 여러분이 보는 것을 "데이터"(또는 "증거")라고 부르자.

3. 가능한 상황이라면, 데이터를 가장 잘 반영하는 가설을 선택하자.

 

이 단계들은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때로는 데이터가 먼저 얻어지고, 때로는 가설들이 먼저 제시된다. 확실히 나는 이것이 "과학"에 대한 최종적인 규정을 제시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더 모호하게 서술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이것은 가설연역적 방법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미리 준비된 규정을 제시하기가 어려운 까닭은 이 세 단계의 각 단계가 나름의 방식으로 대단히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단계가 가장 까다로울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 어떤 유한한 양의 데이터도 가설의 선택을 과소결정할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론들 중에서 하나를 결정할 애매한 기준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 (토머스 쿤은 그런 선택을 함에 있어서 동원되는 다섯 가지 가치들을 제시한다. 정확성, 단순성, 일관성, 범위, 그리고 유용성. 훌륭한 목록이지만, 객관적인 알고리즘으로는 매우 부족하다.) 그런데 첫 번쨰와 두 번째 단계도 전적으로 명료한 수준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사유를 필요로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가설들을 구성할지, 그리고 어떤 데이터를 수집할지를 어떻게 결정하는지 서술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문제들은 특히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에서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훌륭한 기본적인 개요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매우 자주 발견하는 것은 과학을 규정할 때 조금 더 특정적이고 프로그램에 입각한 정의를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결국 가련한 열정적인 사전 집필자의 덫에 빠져 버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규정되고 있는 것과 규정을 혼동한다.

 

마찬가지로, 때때로 여러분은 이런 주장들을 들을 것이다.

 

- "과학은 자연주의를 가정하고, 그래서 초자연적인 것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

- "과학적 이론들은 현실적으로 반증할 수 있는 예측들을 제시해야 한다."

- "과학은 재현할 수 있는 실험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각 경우에서, 여러분은 그런 주장이 참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이유를 볼 수 있다. 이 주장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더 단순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들 각각은 명백히 틀렸다.

 

이전에 나는 초자연적인 것에 관해 여러 번 말한 적이 있다. 간략히 언급하자. 이른바 초자연적 현상이 세계와 관련하여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그 어느 것에도 전적으로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면, 사실상 그것은 과학적 탐구 대상이 될 수 없다. 당연히 또한 그것은 전적으로 무관하고, 그래서 누가 신경 쓰겠는가?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친다면, 당연히 과학은 위의 도식에 내에서 그것을 탐구할 수 있다. 왜 안되겠는가? 과학은 세계가 자연적이라고 전제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세계가 자연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까닭은 그것이 우리가 관찰하는 것에 대한 최선의 설명이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관해 과학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 점과 관련하여 어리둥절하다면, 그저 실제 과학자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자문하라. 실제 과학자들이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주장되는 것을 대면한다면, 그것은 과학에 대한 그들의 규정의 일부가 아니기 떄문에 그들은 결코 난처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탐구하여 가능한 최선의 설명을 고안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반증 가능성 문제는 더 까다로운 문제인데, 여기서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여러분이 들어본 적이 있듯이, 그것은 끈 이론과 다중우주를 겨냥하여 제기되곤 하는 혐의다. 반증 가능성 곤봉을 휘두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흔히 칼 포퍼를 인용하는데, 과학적 이론들은 원칙적으로 반증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진술함으로써 그가 경계 설정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너드 서스킨드는 이런 사람들을 "포퍼라치"라고 부른다.) 그것은 과학자도 지지할 수 있는 단순하고, 견고하며, 너무 열심히 생각할 필요가 없는 그런 종류의 철학이다. 물론, 끈 이론과 다중우주는 포퍼가 "반증할 수 없는" 관념들이라고 비판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그런 종류들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의 도깨비들은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그리고 애들러의 심리학이었다. 그가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이런 이론들과 관련된 문제는 그것들이 문자 그대로 그 어떤 데이터 집합에도 들어 맞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제시한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획득할 수 있을 데이터"뿐 아니라, 여러분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 정말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것은 끈 이론이나 다중우주의 사례들과 전적으로 다른데, 그 사례들은 세계에 관한 구체적인 것[...]을 말하고 있지만, 실험적으로 전혀(또는 거의 전혀) 접근할 수 없다. 물론, 경계 설정 문제는 소박한 포퍼주의가 규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까다롭다는 쟁점도 있지만, 그것은 다른 문제다. 다시 한 번, 올바른 전략은 실제 과학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할 것인지 관찰하는 것이다. 양자중력이나 초기 우주와 관련된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위에 소개한 프로그램을 정확히 따른다. 그들은 가설들을 고안하고 어느 것이 데이터에 대한 최선의 설명인지 알아 보려고 노력한다. 데이터가 비교적 조잡하다는 사실 때문에 [...] 과학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자) 노아 스미스(Noah Smith)는 "재현 가능성" 문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블로그 글을 올렸다. 그것은 진화를 비난하고 싶어하는 창조론자들에 의해 흔히 제기되는 또 하나의 도깨비다. 실무 우주론자로서 나는 모든 훌륭한 과학이 재현할 수 있는 실험들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완전히 잘 알고 있다. 실험실에서 빅뱅을 구현한 적은 없다. 아직은 그렇다. 재현 가능성을 강조하는 사람들 가운데 우주론(그리고 대부분의 전체물리학)은 "과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정도까지 멀리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대신에 그들은 "그래요, 그런데 우주론에서 당신은 실험실 실험들에 대응하여 여기 지구에서 개발되는 이론들을 데이터와 비교하고 있고, 그래서 그것은 더 복잡한 교환입니다." 그렇다! 그들이 인정해야 하는 것은 모든 과학이 이론과 실험 사이에서 이런 더 복잡하고 미묘한 종류의 교환를 포함한다는 점이다.

 

과학에 대한 우리의 세 단계 규정에서는 아무 것도 "재현 가능성"을 가리키지 않는다("자연주의" 또는 "반증 가능성"을 가리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의 핵심적인 특징은 그것이 합리주의적/논리적인 것―오직 이성적 추론으로부터 진리들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것―다중의 그럴듯한 이론들을 실제 데이터와 비교함으로써 진전이 이루어진다―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런 데이터를 수집하게 될 때 유일한 규칙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라"라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조건을 정확히 재현할 수 있을 만큼 운이 좋지만[...], 흔히 우리는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데이터가 존재하며, 그리고 그것들을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그럴듯하거나 최소한 생각할 수 있었을 다양한 가정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어떤 과학적 문제들이 다른 문제들보다 결정하기가 더 어렵다는 점을 의미할 것이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놀랍지 않은 결론처럼 들린다.

 

이런 과학 개념은 너무 넓고, 그래서 경제학뿐 아니라 역사 같은 분야들도 포괄한다고 반대 의견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나는 확실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정말로 나는 과학자들이 행하는 일과 역사가들이 행하는 일 사이에 중요한 근본적인 철학적 구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적이 결코 없었다. 과학은 경험적 증거에 근거하여 가능한 것들을 정밀하게 조사할 따름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모든 가치 있는 지적 노력이 과학의 한 판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과 논리학은 과학이 아닌데, 그것들은 단계 2 또는 3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모든 가능한 상황―상황이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존재하든 아니든 간에―을 파악하는 것과 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미학과 도덕 같은 것들도 과학이 아닌데, 그것들은 하나의 부가적인 요소―판단을 내리는 방식, 즉 무언가가 아름답다/추하다 또는 옳다/그르다라고 말하는 방식―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그런 문제에 관해 신경 쓰지 않는다. 과학은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어떠한지 서술한다. 여러분은 이런 영역들 내에서 제시될 수 있는 객관적인 참인 진술들("아이를 살해하는 것은 그릇된 행위다," "저스틴 비버는 형편없다")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객관적으로 참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그 어떤 유용한 의미에서도 그것들은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라는 진술이 과학적 진술인 그런 식으로 과학적 진술들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들이 결코 참이 아닌 세상들("아이들을 살해하는 것은 선한 행위다," "저스틴 비버는 멋지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세상들은 정말로 생각할 수 있는 세상들이지만, 우리가 우연히 살게 된 세상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방식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지식은 어떤 데이터를 수집하는 데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과학이 유일한 종류의 존중할 만한 지적 노력이 아니라는 사실은 때때로 다른 "앎의 방식"이 있다는 진술로 포장된다. 이것은 화자가 견지하는 진술되지 않은 가정들에 의존하여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 구성이다. 그렇다. 수학은 과학과는 다른, 참된 지식을 획득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고, 그래서 그런 최소의 층위에서는 서로 다른 유용한 앎의 방식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들은 그저 진리에 이르는 상이한 방법들이 아니라, 상이한 종류들의 진리에 이르는 방법들이다. 과학(대체적으로 경험적 탐구로 간주되는)을 특수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현실 세계를 우리가 상상했을 수도 있는 여타의 세계들과 구분하는 우연한 진리들에 관해 알게 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명상, 계시, 또는 선험적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론들을 개발하고 그것들을 데이터와 비교하는 고된 작업을 행함으로써만 거기에 이를 것이다. 성과는 그럴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