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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노이스: 오늘의 인용-가속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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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주의(accelerationism) 또는 촉진주의]는 [...] 일종의 전략을 서술하기 위해 만들어진 술어다. 어떤 의미에서 가속주의는 마르크스의 "정신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 유래가 나무랄 데가 없는데, 특히 <<공산당 선언>>에서 흔히 인용되는 "정체되어 있는 것들은 모두 증발해 버린다"라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내 자신의 말을 인용하면, 이것은 "최악의 정치(la politique du pire)의 매혹적인 한 변양태다. 자본주의가 자체의 해체력을 만들어낸다면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자체를 급진화하는 것이다. 나쁘면 나쁠수록 더 좋다. 우리는 이런 입장들을 가속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놀랍지 않게도, "그 경로는 오직 자본주의의 시체에서 끝날 것이다"(브레히트)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이런 시도들에 나는 적잖이 초조해진다. 마르크스로부터 브레히트를 경우하여 1970년대 초엽의 자유방임주의 조류에 이르는 "붉은 실"을 추적할 수 있다. 자본에 대한 주변적인 것으로서의 반란 주체를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반란 주체는 자본 주체다(위험한 생략은 반란 주체가 바로 자본일 뿐라는 점일지라도). 가속주의에 관한 책인 <<리비도 경제>>를 저술한 리오타르(Lyotard)가 서술하듯이, "상품에 관한 것이든 '서비스'에 관한 것이든 간에 '방대하고 사악한 자본주의적 교환 회로에서는 향락(jouissance)의 모든 양상들이 가능하며 아무것도 배척당하지 않는 듯 보인다."

 

흥미롭게도 <유령학에 반대한다(Against Hauntology)>라는 블로그 글에는 [...] 두 가지 선택지가 묘사되어 있다.

 

첫째 [...], 탈근대적 오디오 강령술의 과정들을 그저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체계가 자체의 궁극적인 사망에 이르도록 가속시키려고, 구제할 수 없는 붕괴점에 이르도록 유행 흐름의 속도를 증가시키려고 노력하는 더 허무주의적인 미학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숭배 행위, 애도 행위, 멀리서 불가능한 우주들에 접촉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것은 신중하고 즐거운 긍정 행위일 것이다[선택지 a]. 그 대신에 우리는 새로운 것들의 창발에 대한 바디우의 분석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은 현재 시기에 대중음악적 사건들의 현장과 역사적 상황들이 정확히 어디에 존재하는지―실시간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주변적이고 적절히 결정할 수 없는 듯 보이는 그런 영역들―에 대한 더 전략적인 검토를 수반할 것이다[선택지 b].

 

분명히 나는 선택지 b를 선택했으며, 그리고 바로 바디우의 "긍정주의(affirmationism)"에 근거하여 그로부터 벗어날지라도,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부정적인 것들의 지속(The Persistence of the Negative)>>의 주장이다. [선택지 a]는 사변적 실재론의 정치학을 정산하는 한 가지 방식이고, 그래서 감탄할 만하지만, 나는 이것이 가능성들을 망라하거나, 또는 추출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학이라고는 확신하지 않는다.

[...]

나는 정치적 전략(예술적 전략뿐 아니라[...])으로서의 가속주의와 관련하여 명백한 문제점들이 있다고 느낀다. 그 대신에, 놀랍지 않게도, 나는 벤야민의 입장을 선호한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 역사의 기관차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달리 봐야 할 것이다. 인류가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비상 브레이크를 잡는 일이 혁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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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자민 노이스(Benjamin No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