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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노에: 오늘의 에세이-우리는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

Where Did We Go Wrong?

 

―― 알바 노에(Alva Noe)

 

누가, 또는 무엇이 의식이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자연 속 어디에서 의식을 찾아내는가? 이런 분야에서는 이 문제, 즉 타자들의 의식에 관한 문제가 가장 어려운 문제인 듯 보일 수 있다. 나는 의식한다. 여러분도 그렇다.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며, 세계는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런데 개미, 또는 달팽이, 또는 짚신벌레의 경우에는 어떤가? 공학적으로 잘 제작된 로봇의 경우에는 어떤가? 그것은 의식이 있을 수 있을까? 확실히 구분할 방법이 있는가?

 

이 문제에 관한 거의 모든 성찰의 출발점은, 타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에 대한 우리의 지식, 사실상 그들이 생각하고 느끼며 결코 자동기계가 아니라는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보고 듣고 측정할 수 있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행동을 관찰하거나, 또는 영구적인 식물 인간 상태나 감금 증후군에 처한 환자들의 경우에는 신경 활동을 측정한다. 그때, 이론적으로 상당히 좋은 방식으로 우리가 다른 마음들을 알게 될 수 있는 가장 근접한 것은 행동과 신경 활동이 한 사람의 심리 상태에 대한 믿음직한 기준을 제공하게 되는 어떤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것은 우리가 다른 마음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최소한 상당히 좋은 방식으로는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행동(사람들이 말하고 행하는 것)의 관찰과 신경 활동의 측정은 다른 마음들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것은 영구적인 식물 인간 상태와 감금 증후군에서 비롯되는 중요한 교훈이다. 단순한 행동은 기껏해야 어떤 사람에게 상황이 어떠한지에 대한 신뢰할 수 없는 지침이다. 게다가, 사실상 우리는 신경 활동과 경험 사이의 연결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뇌 스캔의 결과가 우리 딸이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특히 그녀가 우리에게, 우리의 말, 소리, 접촉에 대해 계속 반응하는 듯 보일 때―을 도대체 납득시킬 것인가? 사람들이 말하고 행하는 것에 대한 관찰 결과와 그들의 뇌가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한 측정 결과가 우리가 계속해야 하는 최선의 것이라면, 타자들의 마음에 대한 우리의 신념은 인식론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는 단순한 신앙 행위인 듯 보일 것이다.

 

다른 마음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관련된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이렇다.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라면 아무도 다른 마음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가설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제안을 진지하게 여길 수 없다. 타자들이 마음을 갖고 있다는 우리의 증거가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타자들의 마음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포기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뿐이다. 내 친구와 아이와 부모가 생각하고 느끼는 존재자들이라는 점, 세계가 그들에게 나타난다는 점, 그들은 단순한 자동기계가 아니라는 점은 정신 이상자만이 의문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역설에 직면한다. 우리는 타자들의 마음의 존재를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없지만, 우리가 이 신념을 포기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뿐이다.

 

역설은 우리가 사유할 때 어딘가에서 잘못 생각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애초에 우리가 그 문제를 구성한 방식에서 놓쳐버린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의 어려운 문제는 우리가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