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존 그레이: 오늘의 인용-과학적 자연주의의 자기 파괴성

 

"

벨푸어는 과학자들이 우주의 인과법칙을 알아내기 위해 사용하는 실증 방법론은 전적으로 회의적인 결론들만을 내놓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실증 방법론은 자연 세계가 일관성 있게 작동한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실증 방법론에 따르면, 우리가 관찰하기에 어떤 두 사건이 규칙적으로 연결되어 등장한다면 그 둘이 법칙을 따르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 결론은 관찰만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결론이 아니다. 증거가 아무리 많아도 '법칙'의 존재를 보여 주기에는 충분치 않다. 새로운 관찰이 그 증거들을 뒤흔들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미래도 과거와 같을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하는데,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가정은 근거가 없다.

 

[...] 이를테면 데이비드 흄은 귀납법의 기본이 되는 "미래가 과거와 같을 것이라는 기대"는 습관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원래 흄은, 기적이 자연법칙이라고 알려진 것을 따르지 않으므로 [...] 기적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음을 보이고자 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귀납법을 부정하는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상 파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 기적에 대한 믿음이 회의주의적 의심이라는 뒷문을 통해 되돌아온 격이었다. [...]

 

벨푸어도 회의주의적 의심으로 이성과 합리성의 주장을 약화시킨 사상가들의 연장선에 있었다. 하지만 과학의 한계와 관련해 벨푸어는 새로운 주장을 하나 덧붙였는데, 이는 진화론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윈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이 가진 신념은 인간이 접하고 있는 세상에 적응한 결과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의 상당 부분이 대체로 정확하기는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발전시켜 온 신념은 우리가 헤쳐 나가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정도까지만, 그리고 일시적으로만 진실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신념 체계는 유용한 환상일 수도 있다. 자연선택의 무작위 보행 속에서 더 유용하냐 아니냐에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러한 환상 말이다.

 

그렇다면, 진화라는 개념 자체도 그런 환상 중 하나가 아닐까? 과학적 자연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신념은 진화상의 적응 결과이며 그 신념이 살아남느냐 아니냐는 그것이 진리이냐 아니냐와는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과학적 자연주의는 자기 파괴적이다. 과학적 자연주의가 전제하는 바를 충실히 따르다 보면 과학 이론들이 진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니 말이다.

 

[...] 어떤 믿음이 합리적이냐 아니냐는 종교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과학의 기초는 실증 방법론인데, 이는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 감각에 의존한다. 하지만 과학에 따르면 인간의 감각은 세상을 잘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다. 과학은 우리의 감각에 들어오는 인상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는 시스템일 뿐이며, 결국에 남는 것은 우리 각자의 감각들뿐이다.

[...]

그렇다면, 실증 방법론의 최종 결과는 개인이 자기 경험 속에 홀로 남겨지는 것이다.

"

―― 존 그레이(John Gray), <<불멸화위원회(The Immortalization Commission)>>(김승진 옮김, 이후, 2012), pp. 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