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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후: 오늘의 에세이-연합체와 국가의 차이점

 

연합체와 국가의 차이점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Association and the State

 

―― 예후(Jehu)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가주의적 성향을 은폐하기 위해 얼버무리는 말이 있다. 그것을 예시하도록 압박받지 않는다면, 그들은 일상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계급의 적들에 대한 지배 계급의 탄압 도구"로 언급한다. 자본가들에 대해 강압을 사용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 연합체가 노동자 계급 국가라는 점을 의미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런 관념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저작에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바쿠닌이 마르크스에 대해 제기했던 무정부주의적 비판에서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노동자 계급 연합체와 부르주아 국가 사이의 차이점이 누가 폭력의 탄압을 받게 되는지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것은 연합체가 국가와 어떻게 다른지 이해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방식으로 연합체 문제를 제기한다.

 

사적 유물론적 국가 개념은 노동의 착취자들에 대해 일반적인 강압 수단을 사용하는 것과 아무 관계도 없다. 국가에 관해 말할 때 파악해야 할 중요한 개념은 국가가 사회 속의 다른 계급들과 맺는 관계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국가가 이상적인 형식으로 대표하는 계급과 맺는 관계이다. 우선 노동 이론에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해야 한다.

 

1. 부르주아 계급은 봉건 시대의 계급들에 대항하여 출현했으며 이런 다른 계급들에 대해 자기 권리를 주장해야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부르주아 생산 양식의 산물이며 부르주아 지배 계급에 대해 자기 권리를 주장할 계급 이익이 없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거의 99%가 유물론적 계급 개념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지배에 대항하여 자기 권리를 주장할 계급 이익이 없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고 추측할 것이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이것이 그 두 계급 사이의 갈등을 서술할 그럴듯한 방법인 것처럼 "노동자 계급 이익"을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에 대립되는 것으로 언급한다.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논변에서 노동자 계급은 부르주아 지배 계급에 대항하여 자기 권리를 주장할 이익이 없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노동 이론에서 무엇이든 어떤 계급의 이익은 그 계급을 구성하는 "개체들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예를 들면,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은 그 계급의 개별적 구성원들에 대해 사실상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의 이상적인 표현, 그것의 일반적인 대표는 부르주아 국가다.

 

그렇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사회의 어떤 다른 계급에 대해서도 자기 권리를 주장할 이익이 없기 때문에 개별적 구성원들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이익이 없다. 이것에 근거하여,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그들의 전체 논변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주장을 제시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출현하고 나서야 모든 계급을 철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런 가능성은 바로 프로렐타리아들은 주장할 계급 이익이 없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이 논변을 우회할 길은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누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어떤 종류의 프롤레타리아 국가 형태로 대표될 수 있는,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여 자기 권리를 주장할 이익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런 주장은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이론을 근본적으로 수정함으로써 가능할 뿐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모든 계급을 철폐할 수 있는 것은 계급 이익이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자. 이것이 참이 아니라면,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이어지는 필생의 작업 전체가 붕괴한다.

 

2.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이익이 없기 때문에 그것의 지배는 국가 형태를 띨 수 없다.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사회의 생산력들을 통제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이 없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경우에도, 이전에 출현했던 모든 다른 계급들과 마찬가지로, 그 어떤 사회적 조직도 이런 개체들에게 자신의 생존 조건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라고 자처하는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누구나 그 어떤 형태의 어떤 국가라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자체의 생활 조건을 통제할 권력을 부여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이 주장은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논변에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체의 생활 조건을 함께 통제하기 위해 자발적인 연합체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국가도 그들에게 이런 통제권을 부여할 수 없다. 그들의 연합체만이 부여할 수 있다.

 

3. 프롤레타리아들은 계급 이익이 없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개체들로서만 행동할 수 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행동할 수 없으며 계급으로서 행동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중요한 것은 계급 이익의 충돌인 모든 정치적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틀림없이 패배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이길 수가 없는데. 하나의 계급으로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사항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이 계급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활동할 수 없고 개체들로서 활동해야 함으로써 이 개체들은 틀림없이 계급 정치 자체를 폐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를 타도해야 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필생의 작업이 지탱하기 위해 논변의 모든 실마리들이 함께 엮여야 하는 매우 질서정연한 논변이다.

 

정말로, 여러분은 바쿠닌과 마르크스 사이의 차이점들이 빌어먹을 자본가들을 총으로 진압할 인물과 그렇지 않을 인물로 요약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박한가? 정말로 여러분은 바쿠닌이 빌어먹을 평화주의자였다고 생각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바쿠닌은 여느 공산주의자만큼이나 신속하게 이 빌어먹을 착취자들을 살해했었을 것이다. 이 두 공산주의자 사이의 차이점에서도 착취자들을 다루는 수단에 관한 의문은 단 한번도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와 바쿠닌 사이의 논쟁은 연합체가 착취자들을 다룰 방식과는 아무 관련도 없으며, 이 연합체와 그것을 만들어낼 프롤레타리아들의 사이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사회 문제들을 관리하기 위해 구성된 프롤레타리아들의 연합체가 자체의 구성원들에 대해 독립적이고 심지어 그들을 지배하게 될 수 있는지 여부와 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노동의 연합체가 하나의 국가라고 생각하는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는 틀렸고 바쿠닌이 옳았다. 그런 연합체는 현재의 국가와 꼭 마찬가지로 그것 자체가 노동의 착취자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런 국가를 채택하는 것을 옹호하거나 그것을 다른 형태의 국가로 대체하는 것을 옹호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빌어먹을 파시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