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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샤비로: 오늘의 인용-자기조직화에 반대한다

 

- 아래 글은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의 블로그에 실린 서평 형식의 에세이 <자기조직화에 반대한다(Against Self-Organization)>를 옮겨 놓은 것이다.

 

- '자기조직화'라는 개념은 사실상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모토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기조직화 개념은 '보이지 않는 손'을 쉽사리 연상시킨다. 이 에세이에서 샤비로는, 현재 널리 퍼져 있는 자기조직화에 대한 믿음은 그 강도에 있어서 거의 종교 수준에 이르렀다고 단언한다. 실질적으로 자기조직화 개념은, "어떤 종류의 합리적 계획도 '유토피아적'이고 그래서 '전체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이 시대―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일맥상통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자기조직화의 미덕에 관한 우리의 거의 자동적인 기본 가정들을 의심하기 좋은 때"라고 제안한다. 사비로는 자기조직화 현상과 자기조직화 체계들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조직화를 항상 긍정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는 우리의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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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조직화에 반대한다

Against Self-Organization

 

 

생물학자 피터 워드(Peter Ward)의 새 책 <<메데아 가설(The Medea Hypothesis)>>에 따르면, 지구상의 생명은 운이 다했다. 이 책은 의도적으로 공격적이고 도발적인데, 나는 그 속의 특수한 과학적 주장들을 평가할 지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정말 하나의 사고실험으로서 그것은 상쾌하다.

 

워드의 책은 꽤 대중적인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에 대한 비판서인데, 원래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에 의해 전개된 가이아 가설은 지구 전체가 그것의 전 바이오매스와 더불어, 행성 전체―기후, 대기와 바다의 화학적 조성 등―를 생명의 지속적인 번성에 우호적인 상태로 유지하는 하나의 창발적인 질서, 자기조직화 체계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본질적으로 가이아 가설은 세계를, 개별 세포들이나 유기체들이 자기지속적인 항상성 유지 체계인 것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항상성을 유지하는 평형 상태에 있는 체계로 간주한다. 가이아는 사이버네틱적인, 또는 자기생성적인 자기조절 체계인데, 유기체들과 그것들의 환경 사이에서 지속되는 되먹임이 대기 온도, 바다의 염도, 대기 중 이산화탄소량 등을 생명의 지속적인 번성을 위해 필요한 한계 내에 머무르도록 유지한다.

 

워드의 메데아 가설은 이런 모든 주장에 직접적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워드에 따르면, 생태권은 항상적이거나 자기조절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긍정적인 되먹임 메커니즘에 의해 지속불가능한 극단으로 계속 추동되고 있다. 화석 기록에 나타난 대량멸종 사건들의 대부분은, 중생대 말기에 공룡의 멸종을 초래했다고 여겨지는 거대한 유성 충돌 같은 과정들의 외부적 개입에 의해서라기보다 통제불능의 생명 과정들에 의해 일어났다고 워드는 말한다. 예를 들면, 페름기 대멸종―우리가 알기에 모든 종의 90%, 그리고 모든 생물의 99%가 멸종된 가장 파국적인 사건―은 "바다 속 황 박테리아의 번성"에 의해 초래되었는데, 황 박테리아는 온실효과로 인한 온난화 때문에 번성하여 극히 유독한 황화수소의 농도를 증가시킴으로써 대양과 대기를 오염시켰다.

 

더 일반적으로 워드는, 생명 과정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의존하는 바로 그 환경에 항상성을 유지하는 영향이라기보다 불안정하게 하는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대체로 자연선택의 맬서스적 기반 때문이다. 무엇이든 어떤 유기체에게 경쟁자들에 비해 선택적 이점을 부여하는 특질들은, 그것들이 환경을 장악하여 환경 수용력의 한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럴 때까지, 유전자 풀 전체에 퍼질 것이다. 너무나 성공적인 유기체는 결국 개체수 과잉, 자원 부족 등으로 인해 급격한 파멸를 겪을 것이다. 황 박테리아의 성공은 다른 모든 유기체들의 중독을 의미한다. 또는,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이십 억 년 전 광합성 유기체들이 등장하여 그 당시의 압도적인 다수의 생명 형식을 구성했던 지배적인 혐기성 미생물들을 중독시켜 멸절시켰다.

 

그런데, 최근에 생물학자들은 이런 위험들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협동과 이타주의의 진화에 조심스럽게 주목한다. 예를 들면, 협동하는 유기체들의 환경에서는 한 사기꾼이 협동자들을 능가할 것이고, 그래서 자연선택을 통해 결국 그들을 멸종시켜 협동의 편익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는 사기꾼들의 환경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협동자들이 사기꾼들을 감지하는 메커니즘과 그들을 처벌하거나 아니면 규율하는 메커니즘을 진화시킨다면, 이런 전망은 피할 수 있고, 한 집단 내에서 이타주의가 유지될 수 있다. 이 같은 시나리오들은 이전에 의혹을 받은 "집단 선택"이라는 관념―모든 구성원이 협동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집단이 사기꾼들이 지배하는 집단을 능가할 것이라는 관념―의 부활을 초래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워드는 메타적 층위 또는 행성적 층위에서 협동이나 이타주의가 진화할 수 있다는 어떤 증거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반직관적이지만 인상적인 통계학적 분석을 통해 사실상 종의 다양성뿐 아니라 전체 바이오매스도 캄브리아기 폭발 이래로 줄곧 감소했다고 논증한다. 그리고 그는, 태양의 가열와 팽창이 지구를 거주하기에는 너무 뜨겁게 만들기 오래 전에 지구상의 생명은 결국 멸종하게 되어 있다고 시사한다. 모든 식물 생명의 멸종, 대기 중 산소의 감소, 그 결과 모든 동물 생명의 멸종, 그리고 마침내 우주 공간으로의 대양의 증발과 상실을 초래할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고갈이 지금부터 1억 년에서 5억 년―태양이 지구를 구워 재로 만드는 순간까지 보내야 하는 15억 년 또는 20억 년보다 훨씬 짧은 기간―만큼  짧은 시기 내에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지구는 결국 흡사 금성 아니면 화성―둘 다 처음에는 생명의 기원과 유지에 우호적인 조건을 지녔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다―처럼 될 것이다(이런 점에서, 흔히 가정되곤 하듯이, 이전에 화성에 생명이 있었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꽤 흥미로울 것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1억 년조차도 우리가 오늘날에 관해 걱정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다. 그리고, 워드가 지적하듯이, 궁극적으로는 지구가 너무 적은 이산화탄소 때문에 죽을 것이지만, 우리의 현재 문제들―대략 다음 세기의 경우에도―은 대기 중 너무 많은 이산화탄소와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워드가 가이아(좋은 엄마 지구)를 메데아(자신의 자식들을 살해한 최고로 나쁜 엄마)로 대체한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이아 가설을 비판할 때, 그것은 실제로 자기조직화 과정과 체계들에 대한 현대의 신념을 문제 삼고 있다.

 

여기서 나는 가능한 한 강한 의미로 "신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현재 널리 퍼져 있는 "자기조직화"에 대한 믿음은 그 강도에 있어서 거의 종교적이다. 우리는 합리성과 진보라는 계몽주의 신화(이제 우리에게 그렇듯)를 더 이상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기술 혁신과 향상을 제외하고는 어떤 종류의 "진보"도 의심하며, 미신을 물리치고 인간 개선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는 이성의 힘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인(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어떤 종류의 합리적인 계획도 "유토피아적"이고 그래서 "전체주의적"―그것에 절대적으로 저항하는 문제에 의지를 강제하려는 노력―이라고 비난한다. 또한 이것은 필연적으로 "거대 서사"의 거부(1980년대에 리오타르가 말했듯이)를 초래하고, 그리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 때문에 모든 계획적이고 결정적인 행위는 쓸데없게 된다는 총체적인 의미를 수반한다.

 

대신에 우리는 우리를 구해 줄 무언가로서 "자기조직화"에 의존한다. 무정부주의 좌파는 자발적으로 자기조직화된 협동사회를 (비)목적으로 삼고서 거부와 항의의 자기조직화된 운동을 신봉한다. 한편, 우파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자유시장"을 모든 문제에 대한 창발적이고 자발적인 자기조직화된 해법들의 영역으로 간주하며, 1930년대의 대공황 같은 재앙들뿐 아니라 현재의 공황도 시장 메커니즘(내버려 두면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는)에 대한 정부의 "간섭"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수학과 사회학이 교차하는 최신의 새로운 분과학문인 네트워크 이론은 인터넷과 여타의 복잡한 네트워크들을, 소수의 간단한 규칙으로부터 복잡성을 생성하기도 하고 운영하기도 하는 강력한 자기조직화 체계들로 여긴다. 연결주의적 설명에서 뇌는 혼돈으로부터 출현하는 자기조직화 체계로 서술되는데, 오늘날 우리는 고정된 규칙들에 의해 미리 결정된 기계들 대신에 스스로 학습하고 스스로 조직하는 로봇들과 인공지능들을 제작하려고 한다. "유전 알고리즘"은 더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브라이언 에노(Brian Eno)는 스스로 생성되는 음악을 위한 알고리즘을 고안한다. 마투라나(Maturana)와 바렐라(Varela)의 자기생성(autopoiesis) 개념은 인문학자들과 생태학자들에 의해 결정론적이고 기계론적인 생물학에 대한 분명한 대안으로 여겨졌지만, 강경한 신다윈주의자들까지도 여러 유전자들의 상호작용에서 창발적 특성들을 발견한다. 한편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자기생성 개념을 인간 사회에 적용한다. 이 목록은 무한정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선형적인 원인과 결과의 견지보다 네트워크를 이룬 복잡성의 견지에서 많은 현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히 참이다. 한 사건이 선형 모형들로 설명하기에 정말 충분할 정도로 고립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우리가 고려하지 않은 요소들 때문에(그리고 혼돈 이론에서처럼 너무 작거나 사소하여 미리 측정할 수 없었지만, 현격한 차이가 나게 더 큰 결과를 낳는 것으로 판명된 몇몇 경우들에서) 뜻밖의 결과들이 분명한 예측을 할 수 있고 의지를 강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손상한다. 최선으로 꾸민 계획들, 기타 등등. 그러나 여전히 나는, 창발적인 또는 자기조직화하는 현상은 아무튼 항상(또는 최소한 일반적으로) 최선의 것이라는 우리의 반사적 믿음―또는 원한다면, 보증되지 않은 기대―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점이 워드의 메데아 가설―하나의 사고실험일 뿐이라고 여기더라도―이 유용하고 도발적인 지점이다. 러브록은 환경파괴에 대해 거의 묵시론적으로 걱정을 하는데, 그의 최근 저작 <<가이아의 복수(The Revenge of Gaia)>>와 <<가이아의 사라지는 얼굴(The Vanishing Face of Gaia)>>은 인간 활동이 이 행성에서 생명을 유지해 온 자기조절 메커니즘과 자기교정 메커니즘을 파국적으로 손상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러브록에게 인간들은 "자연", 즉 가이아와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그것에 대립되는 듯하다. 반면에 워드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들은 스스로 자연의 일부이다. 인간들이 일으킨 기후변화와 생태 파괴는 독특하지 않는데, 지구 생명의 역사를 통해서 다른 유기체들도 비슷한 대참사들을 일으켰다. 모든 행위자들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을 낳는데, 이 결과들은 당연히 다른 행위자들에게 파괴적일 수 있고, 심지어 행위자 자신들에게도 그럴 수 있다. 박테리아들은 우리가 하는 식으로 자신들의 행위들이 초래할 수 있는 가능한 결과들을 계획하고 예견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들에 관해 논증적으로 추리하지 않을 것이만, 이것이 박테리아들이 초래한 생태적 대참사가 인간들이 초래한 생태적 대참사와 근본적으로 다른 범주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정도는 월씬 더 미약하지만 인간의 행위들과 꼭 마찬가지로, 박테리아의 행위들도 "신체적 극성"뿐 아니라 "정신적 극성"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만큼 충분히 화이트헤드주의자이다. 박테리아의 인지에 대한 명확한 과학적 증거가 있다.] 파괴적인 인간 행위들을 "자연"과 분리하기보다 오히려 워드는 "자연" 자체가(또는 자연을 구성하는 유기체들이) 빈번히 그런 파괴적인 행위들을 분출한다고 시사한다. 그것들 속에서 행위들이 출현하고 공명하는 네트워크들이 스스로 어떻게 해서든지 항상성을 유지하거나 자기보존적이라고 가정한 점은 잘못이다. 오히려 건설적인 행위들뿐 아니라 파괴적인 행위들―네트워크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들을 포함하여―도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될 수 있다.

 

물론 어떤 층위에서, 예를 들면, 생물 바이러스에 관한 논의들뿐 아니라 컴퓨터 바이러스의 전파에 관한 논의들에서도 목격되듯이, 우리는 이미 이런 파괴적인 잠재력을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는 긍정적인 자기조직화가 아무튼 우선한다는 생각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특히 생물학에서 경제학으로 넘어가는 논의들에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다윈주의적 자연선택뿐 아니라 경제적 경쟁도 최적화 과정으로 찬양받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생명과학에서의 "공짜 질서", 즉 창발적인 자기조직화 복잡성의 대단한 지지자인 스튜어트 카우프만(Stuart Kauffman)은 자신이 얻은 결과가 생명권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경제권"에도 적용된다고 아무 망설임 없이 주장한다(그의 책 <<신성한 것들 재발명(Reinventing the Sacred)>>의 11장을 보라). 미국 잡지 <<와이어드(Wired)>>에 자주 기고하는, 명성이 자자한 미래주의자 케빈 켈리(Kevin Kelly)는 네트워크 기반 자본주의를 생물학적 복잡성에 비유하여 창발적인 자기조직화의 기적으로 오래 전부터 찬양해 왔다. 그렇지만, 바로 최근에 그는 정확히 같은 견지에서 웹 2.0 기반 "사회주의"를 찬양했다.

 

그러나 이십 세기에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자기조직화 사상가는 의심할 여지없이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인데, 그는 신자유주의의 지적 원조이다. 하이에크에게는 인간 지식의 고유한 한계와 그로 인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의 유포 때문에 사회 계획이나 경제 계획에 대한 어떤 시도도 결국 실패하게 되어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이버네틱스뿐 아니라 생물학에서도 영감을 받은 하이에크는 "자유시장"이 사회 전체에 걸쳐 흩어져 존재하는 별개의 모든 지식 조각들을 조정하고 최적의 결과를 향해 협상하기 위한 이상적인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했다. 비개인적으로 그리고 누구든 어떤 특수한 인간 행위자의 친족 관계를 넘어서 작동하는 자기조직화는 어느 정도의 계획이나 의도적인 인간의 합리성도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에크에게는 가장 사소한 정도의 사회적 연대나 집단 계획까지도 이미 "노예에 이르는 길" 위에 놓이는 셈이었다. 그리고 개인들이 자기조직화 시장의 불가피한 불평등의 결과로 고통을 겪는다면, 글쎄 그것은 너무 나쁠 뿐인데, 그것은 우리가 자유와 진보를 위해 치르야 하는 대가이다.

 

하이에크는 지난 삼십 년 동안의 대대적인 탈규제와 금융 부문의 자율권―그리고 현재 우리가 대가를 치루고 있는 사태―에 대한 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나는, 의식적 의지와 계획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창발적인 자기조직화의 우수성과 더 큰 합리성에 관한 하이에크의 적극적인 논증이 오늘날 최소한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의 바로 그 실체가 된 정도를 전적으로 감안하는 어떤 설명도 아직 보지 못했다. 예를 들면, 십 년 전 시애틀에서 반WTO 시위자들은 자신들의 기초 가정들이 골드만 삭스의 어느 거래인의 그것들만큼이나 깊이 하이에크주의적이었다는 점을 의식했을까?

 

나는 어떻게 다르게 생각할지에 관해서 긍정적인 사유 방식으로는 많이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자기조직화의 미덕에 관한 우리의 거의 자동적인 기본 가정들을 의심하기 좋은 때라는 점을 제시하고 싶을 뿐이다. 이것이 구식의 합리주의나 주의주의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우리의 행위들이 항상 복잡한 네트워크들을 통해 전파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대량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을 낳는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조직화된 결과들이 다른 수단에 의해 도달한 것들보다 아무튼 우수하다는 도덕주의적 확신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체적으로" 일어나는 듯하거나, 또는 "위로부터"라기보다 "아래로부터" 이르게 되는 결과들에 대한 미신적인 숭배를 포기할 필요가 있다.("아래"와 "위" 외에 작업하고 생각할 다른 방향들이 없지 않는가?)

 

화이트헤드는 아원자 입자들의 가장 작은 상호작용에서 가장 복잡한 인간 행위까지 우주의 모든 사건은 어떤 결심의 순간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런 결심을 위한 근거나 지침은 전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주의주의적인" 견지에서 결심을 특징지을 수 없는데, 화이트헤드의 의미에서는 어떤 의식적인 의지 작용도 결심의 원인이라기보다 결심의 먼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심은 독특하고 예측불가능하며, 규칙으로 일반화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이 모두는, 결심이 혼돈스러운 배경에서 "출현"하거나 한 "끌림의 유역(basin of attraction)"에서 다른 한 유역으로의 이동 덕분에 튀어나올 뿐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어떤 자기조직화 체계도 그런 결심의 필요성을 제거하거나 그것이 무엇일지 명령할 수 없다. 그리고 결심은 항상 참신성이나 차이를 함의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자기생성, 항상성, 또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절대적으로 양립가능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창발이라는 우리의 현재 형이상학 대신에 결심의 미학이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