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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로버트: 오늘의 에세이-화이트헤드와 생태(학)

 

화이트헤드와 생태(학)

White and Ecology

 

―― 애덤 로버트(Adam Robbert)

 

다음 에세이는 생태가 21세기 인간들에게 무엇을 의미할 것인지 재검토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이 에세이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사변 철학의 맥락에서 생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 화이트헤드와 함께 생태를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단순하고 놀라운 한 가지 진리를 예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이든 모든 관계―말미잘과 산호초 사이의 관계이든 철학자와 세계 사이의 관계이든―는 본질적으로 생태적이라는 점이다. 어떤 종류이든 모든 관계를 포함하도록 생태의 정의를 일반화함으로써 우리는 생태의 본질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관념들을 확장해야 한다. 대부분의 정의에 따르면, 생태는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관계들과 유기체들이 서로 맺는 관계들과 관련이 있다. 이런 정의와 관련하여, 내가 어렵다고 깨달으며 화이트헤드 철학에 비추어 재구성하려고 노력할 바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 것은 "유기체"이고 두 번째 것은 "환경"이다.

 

일반적으로, 유기체와 환경이라는 대립쌍은, 존재론적 층위에서 반드시 서로 다르지는 않는 존재자들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우리는 흔히 생태적 경계선의 한쪽 진영에서 수선화, 나비, 그리고 가젤 같은 존재자들을 발견하는 한편, 반대쪽 진영에서는 흙, 마그마, 그리고 질소 같은 존재자들을 발견한다. 나는 존재자들을 구분하는 두 개의 유형―필경 러시아 인형처럼 한 유형이 나머지 다른 한 유형의 내부에 위치하는―을 만들어낸다는 것으로 더 심층적인 의미에서 "생태"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 것인지 고려함에 있어서 우리가 이미 나쁘게 출발하게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런데 내가 "환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고려한다는 것으로 우리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외부 세계라는 개념을 제거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 화이트헤드적 생태는 그 어떤 형태의 반실재론도 제시하지 않는다. 세계는 존재하며, 그리고 세계는 인간의 사유 속에서 무엇이든 그것에 관해 품을 수 있는 관념의 바깥에서 번영한다. 화이트헤드가 강조하듯이, 우리가 개념화할 수 있는 그 어떤 능력도 넘어서는 "저 너머 암흑의 우주"가 항상 존재한다. 그렇지만, 더 명료해질 이유들 때문에 나는 존재론적 규모에서 생태를 재검토할 때 "환경"이라는 개념이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함께 되기"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개념에 고무되며,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인간과 비인간, 유기적 존재자와 기술적 존재자, 천상의 존재자와 지상의 존재자들로 조화를 이루는 세계에 현전하는 생태를 제시하는 데 관심이 있다.

 

"함께 되기"라는 정신으로 생태를 재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상태에서 나의 첫 번째 과업은 유기체들이 환경으로 불리는 것 "안에서 살고" 있지 않으며, 그리고 그런 적도 결코 없다는 것―최소한 일상적인 의미에서―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대신에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두 유형의 존재자들이 아니라 상이한 복잡성의 규모들과 상호작용의 양태들에서 존재하고 있는 한 유형의 존재자들이라고 나는 논증할 것이다. 브뤼노 라투르를 좇아서 나는 이런 존재자들을 그저 "행위자"들이라고 부를 것인데, 이 술어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드헤드가 "현실적 기회" 또는 "사회"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행위자와 현실적 기회의 견지에서 생태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환경과 관련된 유기체들을 발견하기보다는 내부와 외부, 개체와 환경 사이의 경계를 접으며 진동하는 뫼비우스 띠 같은 것―환경이 가리키는 "타자성"의 실체성을 먹어치우는―을 형성하는 다른 무생물 생태적 행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들을 발견한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나의 두 번째 과업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다. 나의 첫 번째 목표가 유기체와 그것의 환경 사이의 문제가 많은 구분을 최소화하는 것라면, 나의 두 번째 목표는 "생태(Ecology)"에 관해 생각할 때 고려해야 하는 "생태(계)들(ecologies)"의 수를 다수로 늘리는 것일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정확히 세 개의 독립적인 생태(계)들을 개괄한다. 삼이라는 수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또는 "오직 세 개의 생태(계)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 우리의 행성 지구가 당면하고 있는 서로 얽힌 위기들을 고려할 때 이 세 가지 생태(계)들이 가장 적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보여줄 것이다. 우리가 알게 되듯이, 이 생태(계)들은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에 잠복해 있지만, 세계화, 기후 변화, 그리고 종들의 대량 멸종 같은 현재의 전지구적 위기들의 맥락 속에서 "관념들의 적극적인 참신성을 유지한다"는 정신으로 새롭게 표명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세 개의 생태(계)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들을 자연적 생태(계), 매체 생태(계), 그리고 지식 생태(계)로 부를 수 있거나, 또는, 괜찮다면, 물질, 매체, 그리고 마음의 통합 생태(계)로 부를 수 있다. 하나 이상의 생태(계)를 표명하는 움직임은 펠릭스 가타리와 그 이전에 그레고리 베이트슨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다고 인식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인 철학자와 미국인 사이버네틱스 학자 둘 다 우리와 함께 이 여행을 할 것인데, 그들의 사상은 풍화된 바위에 달라붙은 따개비와 조류 같이 이런 낡은 언어의 배 선체에 매달려 있다. 세 가지 생태(계)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나는, 가타리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 별개의 존재 평면들을 지지하는 논변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변적 생태학의 한 형태에 관여할 것이다. 가타리는 내가 밀어붙일 만큼 멀리 밀어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별개의 영역들이 아니라, 나는 일반적인 존재자들과 특수한 유기체들 사이의 관계들의 그 어떤 집합 속에도 존재하는 최소한의 세 가지 교환 양식들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모든 유기체들이 삼중 생태적 매체 속에 잠겨 있으면서 그것에 의해 활성화된다고 주장한다.

 

*****

 

모든 기회들을 동일한 활동 평면에 위치시킴으로써 화이트헤드는 그가 "자연의 이분화(bifurcation of nature)"라고 부르는 것을 극복한다. 자연의 이분화를 통해 실재계는 별개의 범주들("인과적" 자연과 "외양적" 자연)로 분할되는데, 인과적 자연이 외양적 자연보다 더 큰 강도의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 화이트헤드를 통해서 우리는 두 개의 존재론적 세계―인간 영혼, 신, 그리고 문화로 이루어진 세계와 기계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광물, 식물, 그리고 동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존재론적 상호작용의 평면―그 속에서 인간들은 하나의 지속적인, 원초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경험 상태의 표현이다―을 발견한다. 자연의 이분화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저항은 다음과 같은 명쾌한 구절에서 잘 포착된다.

 

사실상, 저 너머 세계는 우리 자신의 본성들과 매우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더 생생한 시각들을 우리 자신들과 동일시한다. 예를 들면, 우리의 몸은 우리 자신의 개별적 존재 너머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몸은 우리의 개별적 존재의 일부이다. 우리는 육체적 삶에 매우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한 인간은 하나의 복잡한 통일체―몸과 마음―라고 여긴다. 그런데 몸은 외부 세계의 일부이며, 그것과 연속적이다. 사실상, 몸은 어떤 다른 것―강, 또는 산, 또는 구름―과 꼭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이다. 또한, 대단히 정확히 하자면, 우리는 몸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그리고 외부 자연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규정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기회는, 이 에세이에서 전개되는 세 개의 생태(계)와 함께 고려될 때,  브뤼노 라투르가 그의 멋진 책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 주도한 기획을 추진하려는 시도이다. 라투르가 자연과 문화의 구분을 의문시하려고 노력했던 것―그것 자체가 자연의 이분화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다―과 꼭 마찬가지로, 이제 나는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구분을 의문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유기체들이 실재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또는 환경들이 관념론적 고안물들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생태학이 우리가 거주하는 생태적 세계의 다방향적이고 난잡하게 전개되는 본성에 대한 엄밀한 이해―유기체와 환경을 구분하는 것이 적절한 도움이 되지 않는 과업―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팀 모턴이 생태적 사유라고 부르는 것에 고무된다.

 

생태적 사유는 상호연결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생태적 사유는 생태에 관한 사유이지만, 또한 그것은 생태적인 생각이다. 생태적 사유는 결코 "마음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들이 다른 존재자들―동물, 식물, 또는 광물―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전적으로 깨닫게 되는 실천이자 과정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민주주의에 관해 생각하는 것을 포함한다. 참으로 평등한 존재자들 사이의 참으로 민주적인 관계들은 어떤 모습일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상상조차 할 수 있는가?

 

나는 생태적 사유가 생태에 관한 사유이자 생태적인 생각이라는 모턴의 주장을 전적으로 문자 그대로 간주한다. 생태는 그저 환경들에 병치된 유기체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유기체/환경 구분이 이루어질 수 있기 전부터 작동 중이었던 진화 과정을 추동하는 현실적 기회들 사이의 일시적인 만남들과 관련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방대하고 다양한 우주론적 평면에서 상호작용하는 기회들의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

 

앞에서 나는 세 개의 생태(계)들이 그저 세 개의 기본적인 관념들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1)어떤 종류이든 관계들은 생태적이다. 2)모든 행위자들은 생태적으로 전개되는 사건들 속에 처해 있지만, 그런 사건들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3)공존과 우연성을 인식할 필요가 대단히 있는데, 여기서 공존과 우연성은 둘 다 돌봄과 윤리의 존재론적 의미, 다시 말해서 코스모폴리틱스를 함축한다.

 

세 개의 생태(계)들의 맥락에서 돌봄과 윤리는 실재적인 것들과 참인 것들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적 평가와 관련이 있는 만큼이나 새로운 존재자들을 생성하는 데 참여하는 존재 양태들에 대한 항상 갱신되는 평가와 관련이 있다. 생태라는 맥락 속에서 코스모폴리틱스는 행성 지구의 내부와 외부들이 내파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한다. 우리가 호흡하는 매연으로 가득찬 공기는 기술적으로 강력한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전지구적 연맹에 의해 배출되는 이산화탄소 방출의 산물만큼이나 인간들이 발제한 사회적 및 정치적 사상 유형들의 산물이다.

 

특히 지식의 생태(계)는 인간의 사유, 언어, 그리고 문화 사이의 밀접한 연결을 떠올리게 하고, 인간들이 지구라는 훨씬 더 큰 생태계의 내부에서 살고, 호흡하며, 그리고 사라지는 현실태의 다양한 사회―인간 피부의 안과 밖 모두에 있는―속의 일종의 행위자일 뿐이라는 가장 중요한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이사벨 스땅제는 마음의 생태(계)들과 그가 우리로 하여금 발제하도록 요청하는 코스모폴리틱스의 실천 사이의 연결을 강조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심리적 및 집합적 생태(계)들을 돌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하나의 이기주의적 운동(세상은 불타고 있는데, 네로 황제처럼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직면하는 상황들에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고, 느끼고, 상상하며, 그리고 그것들에 관해 이론화하지 않게 하는 힘을 부여하는 생태학을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이다. 핵심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세계에 우리를 변화시킬 힘, 우리로 하여금 "강제로 생각하게 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을 함축한다고 덧붙인다.

 

이런 점들을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 대신에 재검토된 생태학―사변적인 동시에 코스모폴리틱스적인―의 약속을 향한 모두 진술로서 스땅제의 논평으로 끝을 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