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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자연과 문화, 범생태적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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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나의 성배는 현상학적, 기호학적, 그리고 자연주의적 시각들을 통합하는 시각이다. 나의 철학적 작업은 현상학자들로 시작하였고 여전히 나는 그들의 서술적 방법들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나중에 그것은 [...] 기호학적 시각들로 진화했다. [...] 마지막으로, 나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신경학, 지질학, 기후과학 등의 시각들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 [그 어떤] 분석 방법들[도] 맹점들, 즉 자체의 이론적 틀 내에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을 보충할 다른 틀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 세 가지 다른 정향들 가운데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함께 생각하는 문제이다. [...]

 

라투르와 함께 나는 자연/문화 구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구분은 우리가 문화의 외부에서 탐구할 수 있는 자연의 영역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모든 자연과학은 정치, 문화적 가정들과 기타 등등을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아무튼 자연의 외부에 존재하고 자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것 자체로 탐구될 수 있는 문화의 영역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모든 지점에서 자연과 얽혀 있지 않은 사회 또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

 

[...] 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전근대적인 자연 개념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 전근대적인 자연 개념에 따르면, 자연은 본질, 또는 사물들 속에서 자체의 "본성(자연)" 덕분에 불가항력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면, 참나무를 산출하는 것은 도토리의 본성(자연) 속에 있으며, [...] 그물을 짜는 것은 거미의 본성 속에 있다. 반면에, 문화의 영역은 테크네, 또는 외부로부터 무언가에 부과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탁자가 되는 것은 한 조각의 나무의 본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또는 장인의 행위를 통해서 탁자의 형상이 그 나무에 부과된다. 그러므로 테크네는 역사적이고 우연적인 것(문화적 변이)들의 영역으로 다루어지는 반면에, 자연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종 또는 본질들의 영역으로 다루어진다. 인간들의 경우에, 그 문제는 우리의 존재가 테크네인지 또는 "구성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존재가 "자연적"인 것인지 또는 [...] 선천적인 것인지의 문제가 된다.

 

나는, 근대 과학이 이런 자연 개념을 파괴하였으며,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이것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믿는다. 천문학은, 원자들 자체가 역사적이라는 것, 즉 원자들이 항성의 핵심에서 일어나는 융합 과정들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생물학은, 종들이 역사의 결과이고, 종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종"이라는 술어를 사용할 때 실제로는 개체들의 한 개체군 내에서 어떤 특질들의 통계적 우위와 관련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개체들은 발달적으로 조형적이라는 점도 보여주었다. 청사진처럼 기능하고, 유기체의 발달 중에 불가항력적으로 전개되는 일단의 것들, 즉 유전자들이 존재하고, 유기체들에 자체의 독특한 형상을 부여하는 다른 일단의 것들, 즉 "환경적 영향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층위에서 가소성이 존재한다. 동일한 유전체가 상이한 환경적 맥락에서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발달할 수 있다. 유전자들은 청사진이 아니라, 다양한 상이한 방식들로 현실화될 수 있는 [...] 일단의 경향들이다(이런 점들에 관해서는 후성 이론, 진화 및 발생 이론, 그리고 발달체계 이론이 탁월하다). 현재 우리는 "문화"도 사실상 유전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알게 되었다. 인문학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자연/문화 분리는 결코 유기체들의 발달에 있어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자연은 낡은 본질주의적 관념에 따라 자연으로 서술되는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더 문화와 비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어쩌다 보니 구성은 전적으로 문화적이거나 언어적인 것이 아니라, 지리학, 생물학, 식물, 다른 동물 등으로부터의 기여들을 포함하는 것뿐이다.

 

이것을 인식한 후에, 내 전략은 문화를 비롯한 모든 것이 자연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움직이면서 나는 자연을 테크네와 대립시키는 본질주의적 자연 개념을 완화시키고 싶다. 존재에는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변하는 규칙적인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가장 빠른 문화적 변화들만큼이나 역사적이고 우연적이다. 또한 나는 이런 움직임이 무엇이든 자연과학[...]과 관련된 것에 관한 논의에 대해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매후 흔히 나타내는 자동적인(그리고 대단히 방어적인!) 거부를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점점 더 나는 "문화"와 "사회"라는 낱말들을 "생태"라는 낱말로 대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문화와 사회는 생태계들이라고 나는 말한다. 아마존 우림 같은 생태계들은 [...] 그 어떤 특수한 문화만큼이나 전적으로 역사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다. 문화는 더 넓은 생태계 속에 묻어들어가 있는 특수한 종류의 생태계일 뿐이다. 이런 종류의 범생태적 견해로 전환함으로써 나는 문화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들을 통해서 알게 된 모든 것을 보존하면서, 모든 문화가 [...] 더 넓은 자연 세계 속에 묻어들어가 있는 방식에도 주목하기를 바란다.

 

[...] 나는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론들실재 자체의 구분을 유지할 수 밖에 없다고 느낀다. 나는 내 자신이 실재에 대한 아즈텍족의 이론이 틀렸다고 생각한다고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즈텍 사람들(또는 그리스인들 또는 로마인들[...])이 실재에 대한 잘못된 이론을 지니고 있었다고 믿는 것이 아무튼 이것이 그들이 그들 주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막지는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끔찍한 형식의 민족중심주의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문화적 틀이 실재에 대한 자체의 이론과 실재 자체를 구분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구분을 하지 않거나 [이론의] 오류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입장들이 바로 정신병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나는, 다른 문화들도 이런 구분을 하고 [...] 설득에 개방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가 다른 문화들에 충분한 영예를 부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급진적 다원주의와 관련된 문제의 일부는 그것이 주체성과 문화 둘 다가 구멍이 많다는 점을 망각하고, 그 대신에 그것들을 사람들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유아론적인 작은 거품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문화들을 가로질러 소통해내는 듯 보이고 , 그리고 이것이 문화적 생태계들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방식의 일부인 듯 보인다. 게다가, 다른 누군가가 틀렸다고 믿는 것이 그들이 살해당하거나 제거되기를 요청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내게는 점성술을 열렬히 믿는 친구가 있다. 나는 점성술이 터무니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점성술에 관해 흥미롭게 토론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며, 그리고 나는 그가 별들을 통해 나를 해석하는 방식에 매혹당한다. 그것은 내가 그의 실재관이 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모든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내가 생물학적인 것들과 신경학적인 것들에 관해 중언부언하고 있다면, 이것은 내가 이런 것들이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미 기호학과 현상학[...]에 관해 많이 적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에 관한 글을 적음으로써 나는 더 풍성한 이론들을 개발하고 대중 문화에서 중심 무대를 차지하는 [...] 것들(유전자중심주의, 진화심리학, 신우생학, 기후 변화 등)에 대응하는 더 나은 작업을 행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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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