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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 오늘의 인용-푸르키녜 현상

 

- 아래의 글은 일본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의 단편소설 모음집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신유희 옮김, 소담, 2008)에 실린 <선잠>이라는 단편에서 푸르키녜(Purkinje) 현상 또는 푸르키녜 효과와 관련된 구절을 옮긴 것이다.

 

- 푸르키녜 효과는 체코의 해부학자이자 생리학자인 푸르키녜(1787-1869)가 발견한 현상으로, 빛의 조명이 낮은 수준에서 인간 눈의 최대 밝기 감도가 푸른색 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이 효과는 다른 조명 수준에서 색상 대비의 차이를 일으키는데, 그래서 "어두워질 무렵에 파장이 긴 붉은색은 어둡게, 파장이 짧은 보라색은 비교적 밝고 선명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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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는 아삭아삭 고소한 소리를 내며 입 안에서 부서지고, 나는 과자 봉지의 절반을 비웠을 즈음 소파에서 내려왔다. 봉지 입구를 고무 밴드로 동여매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마신다. 이래서 여름은 싫다. 여름엔, 아무려나 상관없는 일들만 생각난다. 미덥지 못하고, 센티멘털하고, 그리고 터무니없다.

 

푸르키녜현상이 일어나면, 난 어김없이 묘한 기분에 젖는다.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중간. 뭔가 아주 먼 옛날 일이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느낌.

 

내가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전, 부모님이 요란하게 부부싸움을 벌인 적이 있다. 현관에서 울며불며 엄마의 허리춤에 매달리는 나를 아버지가 떼내고, 엄마는 나들이용 구두를 신고 집을 나가버렸다. 나는 2층으로 뛰어 올라가 쌓아둔 이불더미에 엎어져 울었다. 내장이라도 토해낼 듯이 꺼이꺼이 울었다. 목이 다 쉬도록 울다 지쳐 무거운 머리를 들어 보니 어둑어둑한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다다미 위에 다리를 털썩 뻗고 앉아 퉁퉁 부은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온 동네가 퍼랬다. 그 공기, 그 냄새. 깜짝 놀라 조심조심 손을 내밀어보았다. 공기에 닿으면 손가락 끝까지 퍼렇게 물이 들 것 같았다. 불안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언제까지고 창밖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러한 푸른 저녁을 푸르키녜현상이라고 부른단다. 시야가 탁해지므로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운전학원에서 배웠다.

 

묘한 이야기지만, 그때 나는 전철에 오르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옥색 옷을 입은 엄마는 역에서 공중전화로 어딘가에 전화를 한 통 걸고 나서, 냉동귤을 사들고 도쿄행 쾌속전철에 올랐다. 옆에는 뚱뚱하게 살이 찐 할머니 한 분이 앉았다. 왜 그런지 내 눈높이가 위에 있고 몸이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가운데 출발하는 열차를 지켜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기억이 너무나 선명하여, 고개 숙인 엄마의 슬픈 옆얼굴까지 또렷이 생각난다.

 

그 후 부모님은 금새 화해했지만, 그 날 내가 한 시간씩이나 넋이 나가 있었기에 걱정이 된 아버지가 의사까지 불렀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푸르키녜현상이 일어날 때면 항상 조금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