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이연식: 오늘의 인용-멜랑콜리

 

"

[...] 일상 속에서 멜랑콜리에는 오랜 세월 부챗살처럼 다채로운 의미가 덧붙여졌다. 한때 멜랑콜리는 '우수憂愁'라고 옮기곤 했다. 멜랑콜리는 씁쓸하면서도 달콤하다. 흔히들 깊은 절망이라고 여기는 감정과는 모양새가 다르다. 그래서 멜랑콜리는 떄로 사치스러운 감정으로 여겨진다. 당장 일상의 절박한 문제와 맞붙어 씨름할 때 '멜랑콜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무언가로부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을 때, 숨 가쁜 국면이 지나간 직후에 우리는 문득 이런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멜랑콜리를 통해 사물과 인간에 대한 깨달음에 이른다. 묘하게 우울한 느낌에 잠겨 있다가 뭔가 좋은 생각이나 세상살이, 사람 됨됨이에 대한 통찰이 떠오르는 것이다.

[...]

멜랑콜리는 바깥세상에 대한 민감함에 기인한 고통, 의기소침, 사물과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습성, 자신의 처지와 성취를 좀체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성향 등을 가리키게 되었고, 이러한 성향에 창조력의 비밀이 담겨 있다고 여겼다.

[...]

멜랑콜리는 삶과 세계의 불확실함에 대한 감정이다. 세계는 우연과 이미 주어진 요소에 의해 지배되며, 지금 흥하는 것이라도 언젠가는 쇠하고, 퇴색하고, 와해하고, 죽고, 의미를 잃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불우하대서 나중에 잘 될 거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응답하지 않는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이다. 멜랑콜리는 이러한 세상과의 불화, 좌절, 대답 없는 세계 앞에서 느끼는 절망에 기인한 우울함이다. 녹록지 않고 결코 명료하지도 않은 세상을 속속들이 익히면서 생겨나는 감정이다.

[...]

멜랑콜리는 세상이 녹록지 않음을 절감하는 국면에서, 마치 끓는 물 위에 생기는 거품처럼 떠오르는 좌절감과 패배감의 다른 이름이다. 멜랑콜리는 국면을 전환시킬 만한 기질이나 재능, 또는 추동력이라기보다는, 어떤 '징후'다. 예술가가 가까스로 붙잡은, 아슬아슬한 균형의 징후이다.

"

―― 이연식, <<대답하지 않는 세상을 만나면, 멜랑콜리>>(이봄, 2013), pp. 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