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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로버트: 오늘의 에세이-객체지향 생태학

 

객체지향 생태학

Object-Oriented Ecology

 

―― 애덤 로버트(Adam Robbert)

 

객체지향 생태학을 명확히 표명하기 위해 우리는 철학의 전통적인 세 가지 영역을 택하여 객체지향적 시각에서 재구성할 것이다. 객체지향 철학의 존재론, 윤리학, 그리고 인식론을 검토함으로써 그런 접근방식이 어떻게 환경윤리와 정치생태학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지 예증하고자 최초로 시도할 수 있다. 객체지향 생태학의 핵심 주장은 미리 이렇게 서술된다. 생태를 사물들의 존재론적 조건으로 만듦으로서 생태의 범위와 깊이가 크게 확장된다. 객체지향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생태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생태는 그저 유기체들과 그것들의 환경들 사이의 관계들의 원리가 아니라, 무엇이든 어떤 두 존재자 사이의 관계들의 원리이다. 이 에세이는 먼저 객체지향 철학의 핵심 주장들을 서술함으로써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객체지향 철학에 대한 검토는 두 가지 주제―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의 "대리적 인과관계(vicarious causation)"와 팀 모턴(Tim Morton)의 "기묘한 낯선 것(stranger stranger)"―에 집중되는데, 그 주제들은 각각 "물러섬(withdrawal)"과 "타자성(alterity)"이라는 관련 관념들을 포함한다. 그 다음에, 하만의 물러섬이라는 관념과 모턴의 기묘한 낯선 것이라는 관념이 존재론과 윤리학 사이에 중요한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밝혀진다. 마지막으로, 기묘한 낯선 것에 의해 제기되는 윤리적 명령들과 물러섬의 존재론적 특질 모두에 의해 함축되는 인식론은 생태에 대한 과학적 접근방식들에 대한 응답, 즉 그것들이 필수적일지라도 이사벨 스땅제(Isabelle Stengers)가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와 "실천들의 생태학(ecology of practices)"라고 불렀던 것의 견지에서 수행되는 건설적인 재고를 필요로 하는 응답을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론, 윤리학, 그리고 인식론은 객체지향 생태학의 덩어리 내에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만, 모턴, 그리고 스땅제는 객체지향 생태학의 명확한 표명에 중요하게 기여한다.

 

먼저 우리는 하만의 "물러섬"이라는 관념과 "대리적 인과관계"라는 관념을 탐구하는데, 그 두 관념은 하만의 객체지향 철학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하만은 "물러섬"이 무엇이든 모든 존재자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제시하는데, 그것은 그 자신의 예들을 사용하여 가장 잘 설명된다. "내가 강, 늑대, 정부, 기계, 또는 군대를 응시할 때, 나는 그것들의 실재 전체를 파악하지 않는다. 그것들의 실재는 시야에서 미끄러져 영원히 은폐된 지하세계로 들어가며, 이 존재자들의 가장 하찮은 환영들만 내게 남긴다. 요약하면, 의식에 대한 사물들의 현상적 실재는 그것들의 존재를 소진하지 않는다." 하만의 경우에, "강, 늑대, 정부, 기계, 또는 군대"를 응시하는 것은 그것들의 존재를 철저히 규명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객체들이 항상 관계들로부터 물러서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주어진 객체 주위에 아무리 많은 시각이나 관계를 배치하더라도 그 객체는 그런 관계들이나 시각들에 의해 결코 철저히 규명되지 않을 것이다.

 

항상 물러서 있는 "실재적" 객체와 항상 다른 한 존재자에 대해 현시되는 지각 속 그것의 "감각적" 만남 사이의 관계는 객체들에 관한 하만의 두 번째 주장을 도입하도록 요구한다. 객체들이 항상 서로 물러서 있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실제 인과적 효과를 낳고 있다면, 두 객체가 서로 영향을 미칠 때 그것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하만은 이런 양태의 인과관계를 "대리적"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관계들은 그것들의 구성 요소들의 자율적인 실재를 결코 직접 대면할 수 없는" 방식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대리적 인과율은 모든 상호작용은 객체들 사이의 관계들에서 도출된 일단의 감각적 특성들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만의 경우에, 이런 매개물들은 항상 더 큰 객체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생태에 대해 객체지향적 시각을 취한다는 것은 각 객체, 각 존재자가 그것 자체인 동시에 어떤 다른 객체에 대한 환경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미 대단히 생태적인 관점이다. 게다가, 모든 객체들은 궁극적으로 그 어떤 모든 관계로부터도 물러서 있기 때문에 각 객체는 우주에 전개된 독특한 힘으로서 환원 불가능한 존재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객체는 그것이 맺은 관계들로부터 물러서 있는 한편, 우리가 이해했듯이, 또한 그것은 자체를 새로운 일련의 관계들에 개방하고, 노출하며, 그리고 환경에 자체의 속성들을 나름대로 펼치는 일련의 구성적 존재자들을 항상 수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개방들은 눈 앞에 있는 존재자의 전부를 결코 소진하지 않는다. 항상 잉여―여전히 접근할 수 없는 실재적인 것―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팀 모턴의 경우에, 객체지향적 시각은 실체라는 관념으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우리 시대는 갱신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즉 본질을 어떤 초월적인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객체지향 존재론의 출현을 목격하고 있다." 실체는 이 세상의 것인 동시에 물러서 있다는 인식이 객체지향 생태학의 핵심적인 특징인데, 이런 깨달음은 각각 다중의 효과를 산출하지만 일단의 상호작용들을 통해 전혀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실재적 존재자들의 민주주의에 동조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모턴의 경우에, 유기체로서의 인간들은 문자 그대로 다른 종들의 생물들에 대한 환경인데, 이 점은 생물학자라면 누구나 말해줄 것이다. 또한 그것 자체가 세계에서 독특하게 환원 불가능한 존재자인 개개의 인간 육체는 수조 개의 박테리아를 수용하는데, 각 박테리아는 "인간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경험을 발제하는 데 공생적으로 도움을 준다. 사실상 "일인칭 경험"으로 불리는 것조차도 항상 이미 우리가 인간 육체라고 부르는 지성적 산호초 주위에 들끓는 수십 억 유기체들의 결과이다. 시각은 다수의 행위자들의 민주적 성취이며, 또는 모턴이 서술하듯이, "사유 자체가 생태적 사건이다". 여기서 모턴의 사유는 상호연결된 존재자들의 방대한 체계에 대한 친숙한 이미지를 상기시키지만, 이런 상호연결은 그저 비단 실이 아니라 "그물코", 즉 그물 그리고 그것의 간극들과 닮았다. 다시 말해서, 이 그물코에서 존재자들을 연결하는 것은 존재자들의 특징이나 그것들 사이의 인과적 관계들일 뿐 아니라, 존재자들이 연결되지 않는, 또는 최소한 서로 존재하는 모습―감각적 관계들의 그물코에서 함께 엮인 물러서 있는 무한자들―에 대해 전적으로 만나지는 않는 기묘한 방식들이다. 타자성, 그리고 상호작용들 사이의 부정적 공간은 궁극적으로 총체화될 수 없는데, 그물코는 "도상학을 초월한다". 물러서 있는 그런 무한자들은 모턴이 "기묘한 낯선 것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것들은 우리 주변의 도처에 존재한다.

 

기묘한 낯선 것의 타자성은 인식론적 결과가 아니며, 그것은 결코 우리가 엮여 있는 타자들에 관한 앎, 또는 더 많은 앎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다. 정반대로, 기묘한 낯선 것은 사물들의 상태에 있어서 존재론적 균열을 폭로하고 드러낸다. 우리 주변에 들끓는 이런 다른 존재자들은 그저 낯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환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하다. 그러므로 모턴은 이렇게 말한다. "지구의 모든 생물학적 종을 안다 하더라도, 지식의 내재적 논리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그것들을 기묘한 낯선 것들로 만날 것이다. 무언가에 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그것은 점점 더 기묘해진다". 이런 점에서, 생태에 대한 객체지향적 접근 방식은 생태적 사유에 대한 다른 접근 방식들과 대조적으로 포섭의 권역들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낯선 것과의 친밀한 만남을 강조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여기서 친밀함은 더 큰 관계뿐 아니라 더 큰 상세함과 거리의 산물이다. "낯섬을 점진적으로 지우기는 커녕 친숙함은 낯섬을 고양한다".

 

그래서 실체의 물러섬은 객체에 의한 감각적 성질들의 공개적인 표현과 결합하여 관계들의 어떤 집합에 대해서도 타자성(이 맥락에서는 일종의 물러섬으로 이해되는)이 존재하며 근본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타자성이 관계들 자체의 특징이라는 점은, 인간들과 비인간들 사이에, 또는 비인간들 사이에 그런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들 사이에 "타자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자들은 주변의 다른 존재자들을 감각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해석 대상들의 물러서 있는 타자성에 결코 완전히 접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변 유기체들, 특정한 상징 체계들, 또는 사회적으로 매개되는 지식 생산 조건들의 구조에 의해 영향을 받는 방식으로 인간들이 주변 세계를 해석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빙산, 야자수, 그리고 치타들도 나름의 번역 및 상호작용의 구조에 특정한 방식으로 주변 세계를 해석한다. 세계는 터무니없이 와글거리는 혼란 상태인 듯 보일 수도 있는데, 세계는 인간들에게 그런 것과 꼭 마찬가지로 코끼리와 난초들에게도 넘쳐나고 떠들썩하다.

 

모턴의 생태적 사유는 육체를 공유하는 생물체들(린 마굴리스의 세포 내 공생체들)조차도 서로 돌이킬 수 없게 이질적이라는 섬뜩한―친숙함과 낯섬의 동시적 느낌―깨달음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생태적 사상은 "현존이란 항상 공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가 없다면 자기도 없다. 게다가, "상호연결"과 "공존"에 관한 이런 서술에도 불구하고, 모턴의 생태적 사유에서 타자성에 대한 의문은 계속 확연해진다. 생태계들의 친밀함과 상호 의존성에도 불구하고, 전지구적 상호연결의 복잡한 연결망들에도 불구하고, 모든 복잡한 생명 형식들은 수백 만 개의 더 작은 유기체들을 수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존재자들은 주변 존재자들에 대해 여전히 (무한히) 소원한데, 그들이 일단의 유한한 상호작용으로 서로 만날 때에도 그렇다. 모든 존재자들의 역설적인 연결과 물러섬이 관계의 참여적 본성―각 상호작용의 순간에 모든 존재자들은 서로 함께 하는 동시에 함께 하지 않는다―을 의미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타자성에 대한 의문들에 대해서도 중요하다. 생태적 사유에 적용될 때 그 섬뜩한 차원은 모든 생명이 친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연속적이며, 그럼에도 낯설고, 공동성에 대한 그 어떤 포괄적인 견해 내에서도 통약 불가능하다는 점을 제시한다.

 

우리가 이해했듯이, 인간 사유의 바로 그 실천도, 그리고 사실상 인간 윤리의 실천도, 윤리를 생각하고자 노력하는 바로 그 존재 내에서 전적으로 낯설게 배치된 낯선 것의 필요한 도움이 없다면 아무 사유도, 아무 윤리도 존재할 수 없는 생태적 사건이다. 모턴이 (인간적 타자들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그 어떤 존재자에 대해서도 일반화하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관계들은 이런 식으로 사유와 철학 자체를 구성한다. 모턴의 윤리학은 존재론적이고 생물학적으로 전개되는 레비나스적인 "제일 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이다. 레비나스는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표현되는 타자성에 대한 무한한 의무를 본 반면에, 모턴은 모든 존재자들이 윤리적 의무의 존재론적 집합에 인간들과 합류하도록 윤리를 인간중심주의적 족쇄로부터 해방시켰다. 물론, 일단 모턴의 생태적 사유를 만나게 되면,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바로 그 의문은 기껏해야 문제적인 것이 되며, 최악의 경우―특히 인지행동학(동물 내면과 주관성에 대한 연구)의 최근 통찰들을 고려할 때―에는 완전히 낡은 것이 된다. 모턴이 시사하듯이, "인간은 "동물"과 비슷하지만, 우리가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듯이, "동물"은 "동물"이 아니다".

 

존재자들 사이의 서로 물러섬이라는 본성과 결합된 존재자들 사이의 부정할 수 없는 상호연결은 환경윤리와 생태학의 중요한 의문들을 제기한다. 객체지향 생태학은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유기적이든 무기적이든, 모든 존재자들을 동일한 인과적 평면에 위치시킨다. 마찬가지로, 상호작용의 원리로서의 대리적 인과관계는 스페인 함대와 대양의 파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참인 것처럼 애벌레와 민들레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참이다. 사실상, 기묘한 낯선 것과 대리적 인과관계는 인과율을 민주화하여 다음과 같은 후속 의문을 낳는다. "참으로 평등한 존재자들 사이의 참으로 민주적인 만남은 어떤 모습일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상상조차 할 수 있는가?" 이것이 특수하게는 생태에 대한 객체지향 접근방식의 중요한 의문이고, 일반적으로는 환경윤리의 중요한 의문이다.

 

그래서 객체지향 생태학은 윤리에 대한 "생물중심적", "생태중심적", 또는 "인간중심적" 접근방식들―이 세 가지 접근방식 각각이 특정한 존재 영역에 가치의 중심을 특권화하는 한에 있어서―의 많은 쟁점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객체지향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가치는 인간 세계의 왕국에 놓여 있지(인간중심적) 않으며, "생명 형식들" 또는 그것들을 지지하는 "자연적" 체계들에만 주어지지도(각각 생물중심적, 생태중심적) 않는다. 오히려, 객체지향적 시각은 인간/비인간 또는 문화/자연 척도에서 어디에 기입되는지에 무관하게 모든 존재자들의 생태적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윤리를 제시한다. 현존하는 동포들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서로에게 현전하지만, 그들의 핵심들은 여전히 가려져 있으며 완전히 알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존재 전체에 걸쳐 메아리치는 윤리적 소명을 지닌, 생태와 환경윤리에 대한 객체지향적 접근방식은 가치와 시각들이 모든 존재자들 사이에 분산되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정언명령은 "자연" 또는 "문화"로 불리는 추상적 영역들이 아니라 개별 존재자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객체지향 생태학의 윤리학은 이사벨 스땅제가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라고 부른 것에 합류한다. 코스모폴리틱스적 견해에 따르면, 스땅제가 서술했듯이, 과학적 지식 구성은 주로 과학적 지식을 새로운 통찰, 객체, 그리고 시각들을 생성하는 생산적 기획으로 위치시키는 창의적 노력이다. 스땅제에 따르면, 생성적 기획으로서의 과학이라는 개념은 "실천들의 생태학"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과학적 지식 구성을 그것의 진리 값에 덧붙여 인간들과 비인간들의 다른 공동체들에 미치는 영향의 견지에서 위치시킨다. 스땅제는 생태학이란 하나는 과학적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이중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스땅제에게 생태학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생태적 실천(가장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인)은 가치들의 생산, 새로운 평가 양식들, 새로운 의미들의 제안과 관련되어 있다...그 실천들은 다수의 관계들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상황에 덧붙여지는 새로운 관계들의 생산과 관련되어 있다". 실천들의 생태학은, 과학이 과학자들과 비과학자들, 인간들과 비인간들을 포괄하는 복잡한 "얽힌 공존" 내에 윤리적으로 처하게 되는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스땅제의 경우에, "생태학은 다양체들, 별개의 인과율들, 그리고 뜻밖의 의미 창조에 관한 과학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코스모폴리틱스를 통해서 다른 지식 양식들과 존재자들의 다른 공동체들과 "공생적 합의"에 참여한다. 공생적 합의는 "다양한 특수한 이해관계들이 굴복해야 하는 더 강력한 이해관계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 새로운 내재적 존재 양식들의 생산이다". 코스모폴리틱스는 "호혜적 포획(reciprocal capture)" 양식을 산출하기 위해 인간들과 비인간들의 사회들을 소집하는데, 호혜적 포획이란 생명과학, 특히 생태학이 (예를 들면, 기술, 의학, 그리고 유전학을 통해서) 존재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존재 양식들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하는 "정체성들의 공(共)발명"을 가리킨다. 그래서 스땅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중한 대화를 위한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의를 제기하는 그런 종류의 실험적 연대를 "코스모폴리틱스"라고 불렀다....접두어 "코스모"는, 플라톤 이래의 정치가 함축했듯이 공동이라는 낱말이 동료 인간들에 한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태를 구성하는 다양한 구체적이고 이질적이며 지속하는 가치 유형들의 문제적 연대를 향유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며, 따라서 "뉴트리노"(물리학자의 실재의 일부분)와 조상(죽은 자들과 소통하도록 가르친 전통들을 지닌 자들의 실재의 일부분) 같은 별개의 존재자들을 포함한다.

 

과학적 지식 자체의 타당성을 의문시하기는 커녕, 스땅제는 세계 속에서 다수의 과학과 그것들의 영향의 번성을 검토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 검토의 목적은, 새로운 과학적 개념들의 생성과 더불어 민주적인 코스모폴리틱스적 관계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과학, 그리고 인식론 일반에 대한 윤리적 관계를 산출하는 것이다.

 

코스모폴리틱스와 실천들의 생태학을 통한 과학의 역할에 대한 스땅제의 평가는 생태와 타자성에 관한 모턴의 관념들과 물러섬이라는 하만의 존재론적 관념을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표제어를 제공한다. 객체지향 생태학의 맥락에서 과학적 지식은 대리적 인과관계와 기묘한 낯선 것이 이미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예시한 것을 인식론적으로 반복한다. 예술, 종교, 또는 철학보다 과학적 지식이 존재자의 물러서 있는 핵심에 더 많이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불안정한 존재론적 상황이 과학을 중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과학의 중요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객체지향 생태학은 과학적 방법의 엄청난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생태적 지식의 통제를 과학적 방법에만 반드시 맡기지는 않는다. 모턴이 말했듯이, "과학은 너무나 중요하여 과학자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르다. 생태에 대한 객체지향적 접근방식은, 생태가 생태계들의 물질적 조건뿐 아니라, 그것들이 비롯되는 물질적 기체만큼이나 생태적 사유의 일부분을 이루는 사회정치적 영역과 현상학적 영역에도 주목하는 다중적인 접근방식으로 가장 잘 응답할 수 있는 문제이자 의문이라는 점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서, 철학과 마찬가지로 생태학은 모든 것과 관련되어야 한다. 사회적인 것들과 현상학적인 것들의 영역들과 과학(확실히 서로 침투하고 있는 영역들) 사이의 협상들은 과학적 지식의 인식론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생태에 관해 생각할 때 과학적 지식 없이 해낼 수 없으며, 생태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특히 현재 대량멸종과 기후붕괴라는 위기들에서 드러나는―이 오로지 물리과학의 영역 내부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가정할 수도 없다. 존재론에 관한 관념들을 민주화하고 인간과 비인간 타자들과 맺는 관계들을 윤리적으로 만듦으로써, 그리고 과학적 지식에 코스모폴리틱스적 차원을 덧붙임으로써 객체지향 생태학은 이 딜레마에 접근한다. 이런 점에서, 생태에 대한 객체지향적 접근방식은 생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생태적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상정한다.

 

우리는 객체지향 생태학의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만났다. 첫째, 모든 객체들은 서로 물러서 있는 동시에 서로 만난다. 무엇이든 어떤 존재자의 실체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상호작용들과 지식으로부터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대리적 인과관계를 통해서 다른 객체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만과 모턴이 말했듯이, 이것은 그저 지식에 근거하는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들의 존재론적 원리이다. 둘째, 기묘한 낯선 것은 우리에게 현전하지만, 동시에 자체의 폐쇄된 무한 속에서 표류한다. 그러므로 대리적 인과관계의 원리는 존재론을 타자성 문제에 의해 제기되는 중요한 윤리적 고려들과 연관시킨다. 이런 점에서 윤리적 관계들은 모든 객체들로 확대되고, 인과율은 민주화되며, 행위주체성은 모든 상호작용하는 객체들의 그물코 전체에 걸쳐 분산된다. 마지막으로, 대리적 인과관계라는 존재론적 원리와 기묘한 낯선 것에서 도출된 윤리적 정언명령들을 제공하는 것에 덧붙여, 또한 우리는 코스모폴리틱스와 실천들의 생태학을 통한 스땅제의 과학에 대한 구성주의적 접근방식에 의해 명시되는 인식론적 원리를 갖는다.

 

그러므로 객체지향 생태학은 남아 있는 중요한 의문들을 제기한다. 우주의 모든 존재자들을 공동 사회에 참여하게 만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다수의 기묘한 낯선 것들과 제휴하는 윤리적 실천들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지식에 대한 참으로 코스모폴리틱스적인 접근방식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어떤 과학적 실천들을 배워야 하는가? 이런 의문들이 객체지향 생태학의 지평에 여전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