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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바: 큰 의문들-양자물리학은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을 더 쉽게 만드는가?

 

양자물리학은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을 더 쉽게 만드는가?

 

―― 스티븐 M. 바(Stephen M. Barr)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즉, 양자물리학은 신의 존재를 지지하는 논변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은 오늘날 세상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주요한 지성적 적인 유물론(또는 "물리주의")으로 불리는 철학에 반대하는 논변을 제공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렇게 한다.

 

유물론은 실재 전체가 물질과 그것의 상호작용들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하는 무신론적 철학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물론은 과학의 뒷받침이 있다고 생각하기 떄문에 그것은 근거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물리학이 물질적 세계가 그 어떤 비물리적 실재―만약 존재한다면―의 영향으로부터도 차단되어 있는, 원인과 결과의 닫힌 체계라는 점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마음과 사유는 명백히 물리적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들은 자체적으로 물리적 현상일 뿐이다. 정신적 영혼이나 자유의지를 위한 여지는 전혀 없다. 유물론자들에게 우리는 "고기로 이루어진 기계"일 뿐이다.

 

그렇지만 양자역학은 이런 단순한 기계론적 사물관에 몽키렌치를 던진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유진 위그너 같은 인물도 유물론은―최소한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현재의 양자역학과 논리적으로 정합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위대한 20세기 물리학자 루돌프 파이얼스 경은 양자역학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의] 지식과 [그의] 의식을 비롯하여 ... 인간의 전체 기능을 물리학의 견지에서 서술할 수 있다는 전제는 지지받을 수 없다. 여전히 무언가가 빠져 있다."

 

양자역학은 어떻게 인간의 마음에 관해 말할 것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것은 입자와 힘 같은 물리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런데 마음은 측정될 수 없지만, 측정을 행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마음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게 되듯이, 그것은 양자역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어서 무시될 수 없는 사실이다. 측정 동안 진행되는 것―측정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포함하여―에 대한 완전한 물리적 서술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여러가지 난점에 이른다. 이것은 1930년대에 위대한 수학자 존 폰 노이만에 의해 지적된 문제이다.

 

그것은 양자역학이 본질적으로 확률론적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물론, "고전물리학"(즉, 양자역학에 선행했으며 여전히 여러 목적에 대해 적절한 물리학)에서도 때때로 확률이 사용되지만, 충분한 정보가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양자역학은 본원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어떤 물리계의 상태에 대한 완전한 정보가 있더라도, 일반적으로 물리 법칙들은 미래 결과들에 대한 확률들만 예측할 것이다. 이 확률들은 그 계의 "파동함수"로 불리는 것에 새겨져 있다.

 

이것에 관한 친숙한 일례는 "반감기"라는 관념이다. 방사성 핵은 더 작은 핵과 다른 입자들과로 "붕괴"하기가 쉽다. 어떤 종류의 핵이, 이를테면, 한 시간의 반감기를 가진다면, 그것은 그런 종류의 어떤 핵이 한 시간 안에 붕괴할 확률이 50%이고, 두 시간 안에 붕괴할 확률은 75%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양자역학 방정식들은 한 특수한 핵이 언제 붕괴될지 알려주지 않으며(그리고 알려줄 수 없으며), 시간의 함수로서 그것이 붕괴할 확률을 알려줄 뿐이다. 이것은 핵의 특유한 것이 아니다. 양자역학의 원리들은 모든 물리계에 적용되고, 그런 원리들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확률론적이다.

 

이것이 문제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확률은 명확하게 한정된 것에 대한 확률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는 점은 역설적인(그러나 전적으로 논리적인) 사실이다. 예를 들면, 제인이 프랑스어 시험에 붙을 확률이 70%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시점에 그가 시험을 치르고 일정한 점수를 얻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 시점에는, 그가 붙을 확률은 더 이상 70%가 아니라, 갑자기 100%(그가 붙는다면) 또는 0(그가 떨어진다면)으로 도약한다. 다시 말해서, 0과 100% 사이에 놓여 있는 사건의 확률은 어느 시점에 갑자기 0%와 100%로 도약하며,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이것이 양자역학에 대한 어려운 쟁점을 제기한다. 파동함수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결정하는 대표 방정식(슈뢰딩거 방정식)은 갑자기 0 또는 100%로 도약하는 확률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끈하게 변하고, 일반적으로 0보다 크고 100%보다 작은 확률을 산출한다. 방사성 핵이 좋은 예이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어떤 핵의 "생존 확률"(즉, 붕괴되지 않았을 확률)이 100%에서 출발한 다음에 연속적으로 감소하여 한 반감기 후에는 50%에 이르고, 두 반감기 후에는 25%에 이른다―그 후에도 결코 0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슈뢰딩거 방정식은 붕괴 확률만 제시할 뿐이지 결코 실제 붕괴를 제시하지 않는다. (실제 붕괴가 일어났다면, 그 시점에 생존 확률은 0으로 도약해야 한다.)

 

요약하면, (a)양자역학에서 확률은 일정한 사건에 대한 확률이어야 한다. (b)일정한 사건이 일어날 때, 어떤 확률은 0 또는 100%로 도약해야 한다. 그런데, (c)모든 물리적 과정들을 서술하는 수학(슈뢰딩거 방정식)은 그런 도약을 서술하지 못한다. 일어나는 모든 것이 물리학의 방정식들에 의해 서술될 수 있는 물리적 과정인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떻게 이를 수 있는지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마음은 그 그림에 어떻게 들어오는가? 전통적인 이해는 일어날 확률이 양자역학에서 계산되는 "일정한 사건들"은 "측정" 또는 "관찰"(두 낱말은 호환적으로 사용된다)의 결과들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전통적으로 "관찰자"라고 불리는)가, 이를테면, 어떤 핵이 붕괴했는지(아마도 가이거 계수기를 사용하여) 알기 위해 확인한다면, 그는 명확한 대답―그렇거나 또는 그렇지 않거나―을 틀림없이 얻는다. 명백히, 그 시점에서는 그 핵이 붕괴한(또는 생존한) 확률은 0 또는 100%로 도약해야 하는데, 그때 관찰자는 결과를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식에 불과하다. 사건들에 할당된 확률은 누군가의 지식 상태를 가리킨다. 제인의 시험 결과를 알기 전에 나는 그가 시험에 붙을 확률이 70%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알고 난 후에 나는 0 아니면 100%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통적 견해는, 양자역학에서 확률―그리고 확률을 부호화하는 "파동함수"―은 어떤 "관찰자"의 지식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유명한 물리학자 제임스 진즈 경의 말에 따르면, 파동함수는 "지식 파동"이다.) 한 관찰자의 지식―그리고 그것을 부호화하는 파동함수―은 그가 측정 결과를 알게 될 때 불연적속으로 도약한다(전통적으로 "파동함수의 붕괴"라고 불리는 유명한 "양자 도약"). 그런데 무엇이든 어떤 물리적 과정을 서술하는 슈뢰딩거 방정식은 그런 도약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지식이 변화할 때 물리적 과정 외의 무언가가 포함되어야 한다.

 

명백한 한 가기 의문은 도대체 왜 지식과 마음에 관해 말할 필요가 있는가이다. 생기 없는 물리적 장치(이를테면, 가이거 계수기)가 "측정"을 수행할 수 있지 않는가? 그것은 폰 노이만에 의해 제기되었던 바로 그 문제로 들어갈 것이다. "관찰자"가 가이거 계수기 같은 그저 순전히 물리적인 존재자라면, 원칙적으로 측정되고 있는 것뿐 아니라 관찰자도 서술하는 더 큰 파동함수를 적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계산하면, 더 큰 파동함수는 도약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시, 순전히 물리적인 존재자들만 포함되는 한, 그것들은 확률이 도약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방정식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 때문에 파이얼스는 기계가 "관찰자"일 수 있는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니라고 대답했으며, "양자역학적 서술은 지식의 견지에서 이루어지고, 지식은 알고 있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고 설명했다. 순전히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결론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물리적 존재자들만이 존재하며, 모든 관찰자와 그들의 마음은 물리학의 방정식들로 전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 양자 확률은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에 있게 되며, (일반적으로) 0과 100%가 아니라 그 사이 어딘가에서 떠돌게 된다. 확률은 결코 단일하고 일정한 결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튼 모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양자역학에 대한 "다세계 해석"(Many Worlds Interpretation, MWI)이라 불리는 것에 이르게 된다.

 

다세게 해석에 따르면, 실재는 모든 물리적 상호항의 모든 가능한 결과에 해당하는 많은 갈래로 나뉘어진다. 측정 전에 확률이 70%였다면, 그것은 0 또는 100%로 도약하지 않는다. 측정 후에도 그것은 여전히 70%인데, 70%의 갈래들에서는 이런 결과가 나타나고 30%의 갈래들에서는 저런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실재의 어떤 갈래들에서는 한 특수한 핵이 붕괴된―그리고 "당신"은 그 현상을 관찰하는―반면에, 다른 갈래들에서는 그것이 붕괴되지 않았다―그리고 "당신"은 그것이 붕괴되지 않았음을 관찰한다. (모든 갈래에는 "당신"의 판본들이 존재한다.) 다세계 서술에 따르면, 여러분은 거의 무한한 수의 판본으로 존재한다. 실재의 어떤 갈래들에서는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고, 다른 갈래들에서는 잠을 자고 있으며, 다른 갈래들에서는 결코 태어난 적이 없다. 다세계 해석의 지지자들조차도 이것이 터무니없는 듯 들리며 쉽사리 믿는 성질을 활용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결론은 이렇다. 양자역학의 수학이 옳다면(대부분의 기초물리학자들이 믿듯이), 그리고 유물론이 옳다면, 양자역학에 대한 다세계 해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유물론이 짊어지는 엄청나게 무거운 짐이다.

 

다른 한편으로, 폰 노이만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양자역학에 대한 더 전통적인 이해를 수용하면, 그것의 논리에 의해(위그너와 파이얼스가 그랬듯이) 모든 것이 운동 중인 물질에 불과한 것은 아니며, 특히 물질과 그것의 법칙들을 초월하는, 인간의 마음과 관련된 것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유물론이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배제했었던 어떤 의문들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인간의 마음이 어느 정도 물질을 초월한다면, 물리적 우주를 전적으로 초월하는 마음들이 존재할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하나의 궁극적인 정신도 존재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