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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노에: 오늘의 인용-의식은 뇌 속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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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동안 나는 뇌 속에서 의식을 찾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뇌 속에서 의식을 찾지 못했으며, 그리고 찾지 못할 것이다. 의식이 어딘가 다른 곳, 이를테면, 영혼이나 환경이나 집단에서 일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의식은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은 우리가 행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은 우리가 구성되는 방식―뇌와 육체―뿐 아니라 주변 세계에도 의존한다.

 

뇌 속에서 의식을 찾는 것은 다리에서 춤을 찾는 것과 같다.

 

마음이 몸과 분리되어 있다는 데카르트적 이원론과 우리 안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뇌라고 하는 현대의 독단은 공통의 전제, 즉, 우리 안에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며 의식이 있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를 정말 감금해 두고 있는 것은 이원론자들과 대부분의 신경과학자들이 공유하는 이 가정이다.

 

[...] 애덤 프랭크가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관해 우려하는 것은 옳다. 그리고 인간이나 동물 경험에 관한 과학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 합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그의 견해는 옳다. 나는 우리를 제한하는 것, 그리고 우리 과학을 제한하는 것은 이중의 오해라고 제의한다. 첫번째 오해는 내가 이미 지적했는데, 우리는 마음이 머리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미음의 작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동물이 주변 환경과 밀접하게 결합하고 그것에 개입하는 방식을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머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두번째 오해는 자연, 즉 우리 자신들이 속해 있는 이 환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현대물리학의 놀라운 성공을 우리가 물리학이 서술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 근거와 혼동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물리학자의 세계가 색깔과 소리와 감촉과 향기와 우리 경험을 채우는 여타 성질들이 결여된 세계라는 사실을 대면한다. 이것은 다시 우리를 우리의 뇌로 되돌리는 경향이 있다. 세계가 정말로 우리가 세계로서 경험하는 그런 식이 아니라면,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꾸며내는 것이거나 우리의 뇌가 우리를 위해 꾸며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데카르트적 캡슐로 되돌아간 셈이다!

 

저명한 과학자 션 캐롤은 [...] 생명의 기초를 이루는 물리 법칙들은 완전히 이해된 상태라고 역설한다. 그렇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 진술은 애매하다. 생명을 뒷받침하는 기본적인 물리 법칙들은 잘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물리학의 견지에서 생명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해한다는 점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우리는 물리학의 세계에서 살지 않는다. 만약에 그랬다면, 생물학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인간들과 다른 동물들은 적소에서 산다. 그들은, 또는 오히려 우리는 가치들의 풍경―양자 격자 구조들이 아니라, 기회와 장애, 유도와 방해로 이루어진 세계―들을 점유한다. 우리의 체험적 삶을 비롯하여 삶은 원자들의 구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도피 장소, 식량, 친구와 적들로 둘러싸인 지상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적극적 삶과 우리의 적극적 체험의 무대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속해 있는 바로 그곳에서이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의식 문제가 있다는 환영―메타인지적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제는 낡은 근대 과학의 두 가지 독단―마음은 머리 속에 있다는 것과 우리 또는 우리 뇌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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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 노에(Alva No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