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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사변적 실재론과 범상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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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주의(correlationism)란 우리는 서로 분리되어 결코 고려될 수 없는 사유(또는 경험 또는 언어)와 존재 사이의 관계에 언제나 접근할 수 있을 이라는 테제이다. 앞에서 언급된 시각의 사례들에서는 매우 다른 것이 주장되고 있는 듯 보인다. 첫째, 무엇이든 어떤 존재자가 도대체 그것을 기록하든 기록하지 않든 간에 전자기파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언급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런 주장을 할 때 나는 사유에 독립적인 것의 존재를 승인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기술이 없다면 나는 적외선 빛을 보거나 경험할 수 없지만, 내가 그런 종류의 전자기파에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이 그런 전자기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근거를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둘째, 나는 가장 친한 내 친구의 아버지, 작은 새우, 그리고 개 같은 다른 존재자들이 상이한 방식들로 전자기파에 접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가 세계에 접근하는 방식에 무관한 다른 존재자들에 접근하지 않은 채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도대체 나는 작은 새우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가? 물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광학, 전자기파, 주변 환경에 대한 반응 등에 대한 나의 지식을 통해서 나는 작은 새우가 접근하는 것에 관한 모든 종류의 틀릴 가능성이 있는 추론들을 제시할 수 있다.

 

때때로 나는 내 입장이 "실재론"이 아니라 오히려 "범상관주의(pan-correlationism)"로 더 잘 서술된다고 생각한다. "범상관주의"란 모든 것이 "관찰자"라는 테제, 즉 만물이 특수한 방식으로 세계에 접근한다는 테제이다. 들뢰즈-스피노자적 견지에서 서술하면, 범상관주의란 모든 존재자가 나름의 방식으로 다른 존재들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테제일 것이다. 바위가 주변 세계에 접근하고 주변 세계에 작용하는 방식은 나무가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방식과 다를 뿐 아니라, 기업, 정부, 문어, 사람, 그리고 식인 상어가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방식과도 다르다. 몇 가지 점에서, "객체"보다 "모나드"가 내가 존재자들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더 좋은 술어이다. 모든 모나드는 특수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전체 우주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했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란 관찰자라고 말하고 있다. 관찰자가 관찰하는 방식을 관찰하는 것이 내가 정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이 내게 충격을 준 사건이었던 까닭은 그것 덕분에 나는 나의 비판적인 철학적 시각이 얼마나 철저히 인간중심적인지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들이 주변 세계를 대면하는 방식과 상이한 문화들과 성별화된 주체들이 세계에 접근하는 방식에 관해 생각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런 정향과 관련된 문제는 이중적이었다. 첫째, 전통적인 반인간주의적 문제가 있었다. 우리가 인간적인 것에 관해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점말 인간적인 것에 관해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가? 성별이 다른 사람들, 계급이 다른 사람들, 강단인들, 자폐증 환자들, 건설 노동자들 등은 상이한 방식들로 세계에 접근하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 신체의 연장으로 사용하는 기술의 함수로서 상이하게 세계에 접근하지 않는가? 이미 탈구조주의적 사유 덕분에 나는 이런 쟁점들을 의식하게 되었었다. 둘째, 탈인간주의적 문제가 있다. 웜벳들, 기관들, 항성들, 관목들 등은 주변 세계에 상이하게 접근하지 않는가?

 

신유물론적 페미니즘과 행위자 연결망 이론의 발견과 더불어 사변적 실재론은 내게 일종의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그것은 나의 탈근대적이고 탈구조주의적인 뿌리의 거부가 아니라 그런 뿌리의 급진화였다. 그것 덕분에 인간 모나드들에 덧붙여 비인간 관찰자들 또는 모나드들이 속속들이 퍼져 있는 세계를 대면함으로써 나는 나의 탈구조주의가 얼마나 인간중심적이었는지, 얼마나 인본주의적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보편적" 인간이 존재한다는 테제를 거부함으로써 내가 반인간주의적 전환을 이루었던 반면에, 여전히 내 이론은 세계가 우리에 대해 어떠한지,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나타내는지,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사변적 실재론 덕분에 나는, 우리가 우리를 훌쩍 넘어서는 드라마에 휘말려 있는 다른 존재자들 가운데 놓여 있는 존재자들이고,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그리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다른 관찰자들이 어떻게 관찰하는지 관찰하려고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실재론"이라는 술어가 문제가 있는 까닭은 그 술어가 그 기획이 인식론적이라는 점, 즉 세계에 대한 어떤 접근 형식이 세계가 존재하는 참된 방식인지 결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작은 새우, 가장 친한 내 친구의 아버지, 또는 고양이가 세계에 대한 더 참된 접근 방식을 지니고 있는지 결정하는 것은 내게 그다지 많은 의미가 없다. 그들은 세계에 상이하게 접근한다. 그럼에도, "실재론"이라는 술어는 두 가지 이유 떄문에 여전히 필수불가결하다. 첫째, 관찰자들 또는 모나드들의 실재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작은 새우는 그것에 대한 나의 접근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관찰자이다. 작은 새우는 나를 비롯하여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둘째, 이것은 사실상 같은 점인데, 전자기파는 다양한 존재자들이 그것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 전자기파는 그것을 다양한 시각적 경험(하만이 "감각적 객체"로 부르는 것)들로 변환시키거나 그것에 관해 인식하는 의식이 있는 모나드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더라도 정말로 잘 존재할 것이다. 상이한 모나드들이 상이한 방식들로 세계에 접근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모든 것이 참이라고 말하는 것과 전적으로 다르다. 이런 점에서 표상적 실재론의 어떤 변형태가 또한 요구된다. 확실히, 바이킹 족은 오딘이라는 신이 자신의 망치를 때릴 때 번개가 일어난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번개에 대한 우리의 이론들도 잘못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그런데 번개는 어떤 인간 집단이 그것에 관해 말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번개라는 실재가 있으며, 번개가 관한 어떤 이론들은 맞을 것이고 다른 이론들은 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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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