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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보로메오 비판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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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테제는 우선 "비판 이론"(넓게 해석되는)이라 불리는 것이 대체로 특성에 있어서 상관주의적이었고 주로 두 가지 형식 가운데 하나를 취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특히 사라 아메드(Sara Ahmed)와 샌드라 바트키(Sandra Bartky) 같은 인물들로 대표되는 "현상학적 비판 이론"(PCT, phenomenological critical theory)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여기서 목적은 하층 육체들의 체험적 경험과 체화를 탐구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호론적 비판 이론"(SCT, semiotic critical theory)이 있는데, 여기서 초점은 세계의 기호론적이고 기호학적인 구조화에 집중된다. 이런 경향은 호르크하이머(Horkheimer)와 아도르노(Adorno), 지젝(Zizek), 데리다(Derrida), 바르트(Barthes), 보드리야르(Baudrillard) 등 같은 사적 유물론자들에 의해 예증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사적 유물론자들이나 전(前)하버마스적 비판 이론의 후예들과 알튀세르 학파를 "기호론적"이라고 특징짓는 것에 반대할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이런 사조들의 기본적 조작이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지식 구성체들과 정치를 어떻게 조직하는지 보여주는 것에 있다는 점을 주목하기 바란다. 실천에 집중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판적 절차는 특성에 있어서 철저히 담론적이고 관념론적이다. 마지막으로 아웃라이어들이 있다. 물질성으로서의 물질성 또는 사회적 조립체들에서 물리적 존재자들이 만들어내는 차이에 초점을 맞추는 마르크스(Marx) 자신(마르크스의 후예들은 그만큼 그렇지 않다), 라투르(Latour), 브라이도티(Braidotti), 알레이모(Alaimo), 바라드(Barad), 비안코(Bianco) 같은 유물론적 여성주의자들, 사변적 실재론자들, 객체지향 존재론자들, 키틀러(Kittler), 옹(Ong), 매클루언(McLuhan), 파리카(Parikka) 같은 매체 이론가들, 데란다(DeLanda),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 등이 있다. 이런 인물들은 과학기술학과 매체 연구 같은 분야들에서 거인들이지만, 문예 이론과 철학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여담으로, 자신을 유몰론자라고 부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당연히 유물론자인 것은 아니다. 유일한 정당한 유물론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적 전통에서 유래된다. 물리적 질료와 물리적 질료가 만들어내는 차이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면 결코 유물론자가 아니다. 다 좋다. 그냥 정직해지자. 유감스럽게도 지젝, 당신은 유물론자가 아닙니다!

 

보로메오 비판 이론(BCT, Borromean critical theory)은 이런 경향들 각각에 옳은 것이 있지만, 각각의 주장들은 과장되어 있고 부풀려져 있다고 인식한다. 그러므로 보로메오 비판 이론은 종합적(그것은 이 모든 경향들을 원한다)인 동시에 축소적(그것은 각 경향이 제기하는 제국주의적 주장들을 축소하기를 원한다)이다. 자신의 윅스퀼(Uexkull)(PCT) 자신의 바르트(SCT) 그리고 또한 자신의 라투르도 갖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BCT의 옹호자이다. 그러므로 보르메오 비판 이론가는 각 경향들의 과도한 점들에 대한 비판(축소)을 수행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통합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서 라캉(Lacan)의 보로메오 매듭이 조직적 도구이자 비판적 도구로서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가르침의 처음 세 단계에서는 그의 세 가지 질서 가운데 하나가 나머지 두 질서를 지배하고 조직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상상계가 지배하며, 상징계와 실재계를 조직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상징계가 지배하며, 상상계와 실재계를 조직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의 가르침의 세 번째 단계에서는 실재계가 지배하며, 상징계와 상상계를 조직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라캉의 가르침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난다. 이제 우리는 세 가지 질서 모두를, 하나가 나머지 둘을 조직하지 않은 채, 동등하고 상호 침투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네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하나가 나머지 둘을 규정하지 않은 채, 세 가지 질서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각 질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여하는지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BCT는 비슷한 것을 행하고자 한다. 세 가지 질서는 현상학적 질서(또는 상상계), 기호론적 질서(또는 상징계), 그리고 물질적 질서(또는 실재계)이다. 현상학(상상계)은 박쥐, 문어, 컴퓨터, 퀴어 육체 등 같은 인간적 존재자들과 비인간적 존재자들의 체험적 경험을 탐구한다. 그것은 더 넓은 세계에 대한 다양한 존재자들의 채널들을 통한 개방성을 탐구한다. 기호론(상징계)은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코딩의 다양한 구조들을 탐구한다. 유물론과 자연주의(실재계)는 물질성의 특징들과 존재자들이 조립체들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자연지리학, 물리학, 신경학, 통신이 이루어지는 속도, 살고 일하는 데 필요한 열량 등)를 탐구한다. 그러므로, BCT 안에서 실재계는 라캉에서와는 다른 의미를 띄게 된다. 라캉에서 실재계는 상징계에 있어서 형식적 교착 상태 또는 매듭이다. 예를 들면, 세비야의 이발사라는 역설이 라캉적 실재계의 일례이다. "세비야의 이발사가 스스로 머리를 깎는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머리를 깎는다면, 그 이발사의 머리는 누가 깎는가?" 그 이발사가 스스로 머리를 깎으면, 그는 스스로 머리를 깎는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머리를 깎는다는 규칙을 위반한다. 다른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깎는다면, 그는 모든 사람의 머리를 깎는다는 요구 사항을 위반한다. 명백히 물질적 또는 물리적 실재의 층위에서는 아무것도 그 이발사가 스스로 머리를 깎거나 다른 이발사에 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이런 역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상징계의 층위에서일 뿐이다(그리고 이런 역설들은 실제로 무의식을 가지고 놀 수 있다). 라캉이 "실재"계라고 부르는 이것은 실재계의 질서가 아니라 오히려 상징계에 속한다는 점을 인식하자. BCT의 경우에 실재계는 물질적 또는 물리적인 것들의 질서이다.

 

그러므로 BCT로 우리는 세 가지 환원물(후설적 의미에서)을 얻게 되는데, 어떤 사물들은 세 가지 질서 가운데 하나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계로 우리는 관찰자를 관찰하는 데 있거나, 또는 완보동물, 늑대, 바위, 그리고 위성 같은 특수한 존재자들이 주변 세계를 어떻게 만나는지에 있는 "현상학적 환원물"을 얻는다. 상징계로 우리는 담론, 서사, 언어, 기호, 그리고 기표가 세계를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몰두하는 "기호론적 환원물"을 얻는다. 여기서 우리는 지시 대상(실재계)과 체험되는 것(상상계)을 괄호 안에 넣고, 그 대신에 세계를 분석함에 있어서 언어의 변별성에만 주목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의미 및 기표(상징계)와 체험적 경험(상상계)을 괄호 안에 넣고, 그 대신에 후설이 "자연적 태도"라고 불렀던 것을 채택하여 화학, 물리학, 신경학, 생리학, 자연지리학 등의 제약들에 주목하는 실재계 영역에 속하는 "자연주의적 환원물"을 얻는다. 자연적 태도 안에서만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체험적 경험과 기호론적 분석을 괄호 안에 넣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우리는 물질성이 생명에 행사하는 힘을 식별하기 위해 자연적 태도로 복귀할 자원이 필요한 이론적 맥락 속에 살고 있다.

 

괄호 안에 넣기는 환원이 아니다. 기호론적 환원은 지시 대상과 체험적, 현상학적 경험을 괄호 안에 넣는다. 현상학적 환원은 기호론적 구조와 물질성을 괄호 안에 넣는다(유감스럽게도, "체험된 육체"에 관한 이야기가 유물론적인 것은 아니다. 물질적 육체는 결코 경험되지 않으며, 주관화도 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의 효과만 만날 뿐이다). 자연주의적 환원은 기호론적인 것과 현상학적인 것을 괄호 안에 넣는다. 각각의 나름의 자리가 있고 이런 세 가지 환원물을 톻해서만 발견될 수 있는 사물들이 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권력의 동학을 더 잘 이해하고 저항의 전략들을 더 잘 개발하기 위해 목표는 이 세 가지 질서가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영향을 미치는지를 주제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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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