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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철학의 정동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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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철학에는 정동적 차원이 있을 것이다. 관념들의 발명으로서의 철학은 항상 담론적 장 또는 개념적 장이 존재한다. 그런데 모든 철학에는 떠돌고 있는 정동적 장, 정동적 또는 감각적 부피의 장도 있을 것이다. [...] 이런 정동의 부피는 철학에 존재하는 개념들과 얽혀 있을 것이지만, 그것 자체는 담론적 질서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참이라면, 철학을 방문하거나 철학에 거주하는 것은 정동의 장을 차지하는 것일 것이다. 여기에 철학적 논증 또는 설득의 엄밀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가 우리를 채우는 정동이나 쾌락에서 비롯되는 매력적인 철학의 차원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이런 형식의 쾌락을 느낀 다음에 그것에 알맞는 철학을 찾아내었을까? 아니면 철학의 개념들에 먼저 거주한 다음에 이런 종류의 쾌락 또는 정동을 느끼게 되었는 것일까? 나는 모른다. 여기에는 되먹임 고리가 있는 듯 보인다. 우리 각자는 이미 특별한 철학에 끌리는 쾌락의 성향이 있으며, 그 철학은 특별한 종류의 쾌락을 계발하고 심화한다. 어쨌든, 상이한 철학들은 상이한 형식들의 쾌락이라는 인상을 피하기가 어렵다.

 

세계 내의 일종의 즐거운 경이와 기쁨이 배어들어 있는 듯 보이는 철학들이 있다. 이런 철학들은, 그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효용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물들을 즐기는 내버려 둠(lassen sein)의 철학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을 즐기는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 루크레티스의 경우에는 전체 우주로부터 깊은 희열을 끌어내는 무성화된 리비도, 범섹슈얼리티가 도처에 있다. 이것은 그의 산문의 성애적 호사스러움, 그의 주장들의 생생함, 그의 모든 글에 배어들어 있는 쾌락이나 기쁨에 대한 감각에서 전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스피노자와 신에 대한 그의 지적인 사랑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이 철학자들은 담론적 층위에서 그들의 사유를 지배하는 목적(telos)―스피노자의 경우에는 무상의 행복, 루크레티우스의 경우에는 자유―이 있지만, 때때로 우리는 이것들이 그 목적이 없었더라도 아무튼 향유되었을 어떤 형식의 쾌락을 정당화하는 합리화라는 느낌을 받는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종류들의 정동적 부피가 배어들어 있는 인물로서 떠올리게 되는 다른 한 사상가이다. 여기서는 기쁨, 세계에 대한 사랑이 있다.

 

관료가 잘 조직된 자료 정리 체계로부터 얻는 그런 종류의 쾌락과 마찬가지로, 사물들을 조직하고 그것들의 정확한 본질로 세공하는 데서 얻는 기쁨이 거주하는 듯 보이는 다른 철학들이 있다. [...] 여기서 우리는 <<논리학>>에서의 헤겔, 후설의 끝없는 구별, <<명시화하기(Making it Explicit)>>에서의 브랜덤의 끝없는 구별, 또는 셀라스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스콜라철학의 어떤 계기들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계속 확대되는 구별에 관한 바로크적 체계가 목적 그 자체이며, 이것이 철학의 핵심에 놓인 향유라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객체들의 분류를 계속 확장시키는 퍼스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쾌락은 해부의 향유, 보이지 않는 내부의 것들을 절개하고 구분하고 나누어 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의 향유인 듯 보인다. [...]

 

다른 철학들은 유머의 정동이 배어들어 있다. 이런 철학들에는 하나의 쾌락 형식으로서 아이러니와 유머가 배어들어 있다. 조크와 역설적인 전환이 형상에 이르는 사소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 목적인 것처럼, 플라톤의 사유는 이런 종류의 유머가 배어들어 있다. 상기설과 형상을 알아야 한다는 명령은 형상에 관한 지식과 정화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머와 아이러니의 이런 지평에 이르기 위한 장치이다. 이런 점에서 라캉이 비슷한 사상가이다.

 

다른 철학들은 울분, 원한, 또는 절망의 쾌락으로 우리를 채운다. 울분, 원한, 그리고 절망도 쾌락 또는 향유의 형식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도르노가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우리가 영원히 착취당하고 있는 거대한 음모로 간주하게 하는 방식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분노하기 시작한다. 쇼펜하우어와 샤르트르는 우리를 절망의 부피로 채워서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기게 만든다. 또한 압도적인 책임감과 죄책감으로, 일종의 도덕적 열광으로 우리를 채우는 철학들이 있다. 여기서 또 다시 샤르트르가 떠오르지만, 정언명령의 칸트나 우리의 규범적 책무를 항상 명시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요청하는 브랜덤도 떠오른다. 칸트와 브랜덤을 읽으면서 우리는 카프카의 위대한 소설들 가운데 하나에 빠져 버린 것처럼 느끼는데, 우리는 알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유죄 선고를 받고 내용을 알지 못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반면에, 샤르트르를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책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아무 근거도 없이 세계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이것들은 무엇보다도 정동적 우주들이다.

 

우리는 철학들에 배어들어 있는 정동에 관한 총체적인 진단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 어떤 철학에 몰입할 때, 우리는 그것의 개념들과 논변들에 몰입할 뿐 아니라, 어떤 특정한 양식의 쾌락과 향유에도 몰입한다. 이런 쾌락이 어느 모로 보나 철학에 내재하는 개념적 지평만큼이나 철학의 배후에 놓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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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