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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먼 다이슨: 오늘의 에세이-정말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정말 무엇을 알 수 있는가?

 

――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

 

짐 홀트의 <<세계는 왜 존재하는가?: 실존적 탐정 소설(Why Does the World Exist?: An Existential Detective Story)>>는 선도적인 현대 철학자들의 초상화 진열관이다. 그는 그들 각자를 차례로 방문하였으며, 그들에게 자신이 단 하나의 의문을 논의하러 왔다고 미리 경고했다. "왜 무가 아니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그는 이 의문에 대한 그들의 반응들을 보고하며, 그들의 말을 그들의 습관과 인격에 대한 서술로 장식한다. 그들의 대답들은 우리에게 화자들에 대한 생생한 모습을 제공하지만 존재의 수수께끼는 풀지 못한다.

 

철학보다 철학자들이 더 흥미롭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직업의 정점에 오른 기인들이다. 그들은 파리와 옥스퍼드 같은 특별히 아름다운 곳에서 깊이 사유한다. 그들은, 제자들이 현자들의 발 아래 앉아 있었고 현자들은 델포이의 발언들로 제자들을 계몽시켰던, 학문적 위계의 고대 전통의 후예들이다. 파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은 팔백 년 동안 이런 전통을 유지했다. 위대한 세계 종교들은 훨씬 더 오랫동안 그것을 유지했다. 대학과 종교는 인간 제도들 가운데 가장 지속적인 것들이다.

 

홀트에 따르면, 이십 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두 명의 철학자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었는데, 하이데거는 유럽 대륙에서 최고의 철학자였고, 비트겐슈타인은 영어권 세계에서 최고의 철학자였다. 하이데거는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특별히 매력적이었던 철학 사조였던 실존주의의 정초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새롭게 수립된 히틀러 정부에서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총장 직위를 받아들이고 나치당의 당원이 되었던 1933년에 하이데거 자신은 신뢰성을 상실했다. 독일에서 퇴조한 이후에 실존주의는 프랑스에서 계속 번성했다.

 

하이데거와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주의를 확립하지 않았다. 그는 글을 거의 쓰지 않았으며, 그가 적었던 모든 것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살아 있는 동안 그가 출판했던 유일한 책은 <<논리-철학 논고>>였는데, 그 책은 1918년에 비엔나에서 쓰여졌고 1922년에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의 긴 소개글과 함께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독일어 원본과 영어 번역본이 나란히 인쇄되더라도 그것은 이백 쪽이 채 되지 않는 얇은 책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운이 좋게도 <<논고>> 한 권을 상으로 받았다. 나는 사춘기 열정의 황홀경 속에서 하룻밤새 그 책을 다 읽었다. 그 책의 대부분은 수학적 논리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 다섯 쪽만 인간의 문제들을 다룬다. 그 텍스트는 숫자가 매겨진 절들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절은 한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면, 6.521절은 이렇다. "삶의 문제의 해결은 이 문제의 소멸에서 발견된다. (이것이, 오랫동안의 회의 끝에 삶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이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116]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마지막 7절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117]

 

나는 그 책이 계몽적이고 해방시키는 책이라는 점을 알아챘다. 그것은 철학이란 단순하며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고 말했다. 철학은 논리와 언어의 올바른 사용에 관한 것이다. 이런 제한된 영역를 벗어난 모든 사변은 신비주의이다. 6.522절은 이렇게 말한다.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116] 신비스러운 것은 언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할 것이 전혀 없다. 홀트는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차이를 아홉 낱말로 요약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용감하고 금욕적이었다. 하이데거는 변덕스러웠고 허영심이 강했다." 이 말은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성격과 그들의 지적 결과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지적 금욕주의는 영어권 세계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윤리학과 미학을 배제함으로써 그것은 철학의 범위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그의 인격적 금욕주의는 신뢰성을 높혔다. 이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실제적인 방식으로 그가 귀화한 나라에 봉사하기를 원했다. 군복무를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던 그는 케임브리지의 강단직을 휴직하고 환자들을 돌보는 병원 잡역부로서 허드레 일에 봉사했다. 1946년에 내가 케임브리지 대학에 도착했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육 년 동안의 병원 의무 근무에서 막 돌아왔던 참이었다. 나는 그를 최고로 존경했고 그가 내 방과 같은 열에서 위에 살고 있다는 점을 알고서 기뻤다. 나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를 자주 만났지만, 너무 수줍어서 대화를 건넬 수 없었다. 여러 번 나는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매일 점점 더 멍청해지고 있어." 마침내, 케임브리지에서의 내 생활이 끝나갈 무렵에 나는 감히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에게 <<논고>>를 즐겁게 읽었었다고 말을 했고, 그가 이십팔 년 전에 언표했었던 것과 같은 견해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지 그에게 물었다. 그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어느 신문을 대표합니까?" 나는 그에게 내가 기자가 아니라 학생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결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반응은 굴욕적이었고, 그의 강의에 청강하려고 했던 여학생들에 대한 그의 반응은 훨씬 더 나빴다. 청중 속에 여성이 나타나면, 그는 그녀가 방을 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 있곤 했다. 나는 그가 주의를 끌기 위해 무도한 행위를 활용하는 사기꾼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그의 무례함 때문에 그를 미워했다. 오십 년 후에, 어느 맑은 겨울 아침에 케임브리지 교외의 교회 경내를 가로질러 걸으면서 우연히 나는 새로운 눈으로 가볍게 덮힌 거대한 돌덩이로 이루어진 그의 묘지석을 만났다. 그 돌 위에는 단 하나의 낱말이 새겨져 있었다. "비트겐슈타인." 놀랍게도 나는 오랜 미움이 사라져 버리고 더 깊은 이해로 대체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나쁜 기질의 사기꾼이 아니었다. 그는 고통받은 영혼이었고, 비극적 역사를 지닌 가족의 마지막 생존자였고, 이방인들 가운데 외로운 삶을 살았으며, 언표할 수 없는 것을 언표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

 

홀트가 인터뷰한 철학자들은 넓은 풍경 위를 떠돈다. 그들의 논의들의 주요 주제는 내가 유물론자와 플라톤주의자라고 부르는 두 집단 사이의 의견 불일치이다. 유물론자들은 세계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추측한다. 플라톤주의자들은 세계가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추측한다. 두 범주로의 이런 분리는 엄청나게 다양한 의견들을 지닌 사람들을 뭉뚱거리는 터무니없는 단순화이다. 식물과 동물 종들에 이름을 붙이는 분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철학적 풍경의 관찰자들은 분리자이거나 분류자일 것이다. 분리자들은 많은 종들에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하며, 분류자들은 소수의 종들에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한다.

 

홀트는 분리자이고 나는 분류자이다. 철학자들은 대체로 분리자들이며, 자신들의 사유 방식들을 유신론 또는 이신론 또는 인간주의 또는 범심론 또는 가치지배론(axiarchism) 같은 협소한 전공들로 나눈다. 홀트의 모음집에서 이런 주의들 각각에 대한 사례들이 발견될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두 개의 큰 집단―물질에 사로잡힌 한 집단과 마음에 사로잡힌 나머지 한 집단―으로 뭉뚱거리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깨닫는다. 홀트는 그들에게 왜 세계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청한다. 유물론자들의 경우에, 그 질문은 시간과 공간과 입자와 장의 기원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관련 과학 분야는 물리학이다. 플라톤주의자들의 경우에, 그 질문은 의미와 목적과 의식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관련 과학은 심리학이다.

 

플라톤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존 레슬리(John Leslie)인데, 그는 대부분의 생을 구엘프 대학(University of Guelph)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보내었고 지금은 은퇴하여 캐나다의 서부 해안 지역에서 살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극단적인 가치지배론자라고 부른다. "axiarchism(가치지배론)"이라는 낱말은 "가치가 지배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그리스 낱말인데, 그것은 세계가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고, 플라톤적 선(善) 이데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레슬리는 플라톤의 동굴 심상을 인간의 삶에 대한 은유로 진지하게 여긴다. 우리는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에 의해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들만 바라보며 동굴 속에서 산다. 동굴 바깥의 실재적 객체들은 이데아들이고, 동굴 안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들은 이데아들의 불완전한 영상들이다. 우리의 영상들이 왜곡되기 때문에 악이 존재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궁극적 실재는 선이다. 선은 우주를 생성할 정도로 충분히 강한 힘이다. 레슬리는 존재에 대한 이런 설명이 논리적 논변이라기보다 시적인 환상이라고 이해한다. 환상은 논리가 실패할 때 구조한다. 플라톤의 사유 전체는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극적으로 재구성한 대화편에 육화되어 있다. 대화편은 논리가 아니라 상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1996년에 레슬리는 인간 상황에 대한 음울한 견해를 취한 <<충격대예측 세계의 종말(The End of the World)>>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자신을 논변을 코페르니쿠스적 원리―우주에서 인간 관찰자의 상황이 결코 예외적이지 않다고 말한다―에 근거를 두고 인간 종의 개연적인 미래 지속 시간을 계산했다. 지구의 위치를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의 중심에서 이동시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들 가운데 하나로서 더 겸손한 입장에 두었을 때 코페르니쿠스는 이 원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레슬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원리가 공간에서의 우리 위치뿐 아니라 시간에서의 우리 위치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관찰자로서 우리는 스스로를 우리 종의 역사의 기원이라는 특권적인 위치에 두지 말아야 한다. 코페르니쿠스적 관찰자로서 우리는 기원에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 평범한 위치에 있다고 예상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종의 미래 지속 시간이 과거보다 훨씬 더 길 것이라고 예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종이 대략 십만 년 전에 생성되었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부터 대략 십만 년 후에 우리 종이 멸종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레슬리가 이런 예언을 발표했을 때, 나는 그것에 강하게 항의하며, 그것이 확률론을 기술적으로 잘못 사용한 일례라고 주장했다. 사실상 레슬리의 논변은 기술적으로 옳았다. 내가 그 논변을 싫어했던 이유는 내가 그 결론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주가 목적을 지니고 있고, 우리 마음이 그 목적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우주의 선은 관찰자로서의 우리 존재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의 선에 기대어 계속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보다 더 나은 플라톤주의자였기 때문에 레슬리의 논변에 반대했다.

 

존 레슬리의 안티테제는 데이비드 도이치(David Deutsch)인데, 최근에 나는 여기서 그의 책 <<무한의 시작(The Beginning of Infinity)>>에 대한 서평을 적었다. 홀트는 옥스퍼드에서 몇 마일 떨어져 있는 도이치의 집을 방문했다. 그 방문을 서술하는 장의 제목은 "다중우주의 마법사"이다. 도이치는 물리학을 철학적 사변을 위한 기반으로 사용하는 직업적 물리학자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달리, 그는 양자역학을 이해하고 양자 우주 안에서 편안하다고 느낀다. 그는 1950년대에 프린스턴 학생이었던 휴 에버렛(Hugh Everett)에 의해 고안되었던 양자역학에 대한 다세계 해석을 선호한다. 에버렛은 양자 우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보통 우주들의 무한한 조립체라고 추측했다. 그는 그 조립체를 다중우주라고 불렀다.

 

양자역학의 핵심은 예측 불가능성이다. 매 순간에 우리의 물리적 환경 안의 객체들―우리 폐의 원자들과 우리 눈 속의 빛―은 예측할 수 없는 선택들을 내리고 다음에 무엇을 할지 결정한다. 에버렛과 도이치에 따르면, 다중우주는 선택들의 각 조합에 해당하는 우주를 하나씩 포함한다. 매우 많은 우주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선택들의 모든 가능한 배열은 최소한 그것들 가운데 하나에서 일어난다. 각 우주는 끊임없이 많은 대안적 우주들로 분리되고 있으며, 그 대안적 우주들은 재조합하여 상이한 경로들로 동일한 최종 상태에 이른다. 다중우주는 시간이 진행됨에 따라 발산하고 재수렴하는 가능한 역사들의 거대한 연결망이다. 원자들의 거동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양자 기묘함"―아인슈타인이 싫어한 것으로 유명한 "귀신이 곡할 원격 작용"―은 뜻밖의 방식들로 재조합하는 우주들의 결과이다.

 

도이치에 따르면, 다중우주에서 우리 각자는 거의 동일한 생물체들의 집단으로 존재하는데, 밀접하게 관련된 역사들을 따라 시간적으로 함께 여행하며 우리를 구성하는 원자들처럼 끊임없이 분리되고 재조합된다. 그는 "왜 다중우주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나 또는 "의식의 본성은 무엇인가?"라는 더 쉬운 의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 앞서 느린 설명의 긴 미래를 보며, 우리가 어떻게 물어야 할지 아직 모르는 철학적 의문들에 대답한다. 우리가 어떻게 물어야 할지는 알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는 모르는 의문들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양자 계산이 우리 의식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하는가?" 도이치의 경우에, 양자 계산 물리학은 우리를 우리 존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이끌 수 있는 가장 유망한 단서이다. 그가 "다중우주의 모든 상이한 평행 우주들이 단일한 계산을 하는 데 협력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한다고 홀트는 말한다.

 

에버렛 판본 외에 다른 종류들의 다중우주가 많이 있다. 최근의 우주론 이론에서 다중우주 모형들이 유행이다. 홀트는 보스턴 소재 터프츠 대학의 러시아인 우주론자 알렉스 빌렌킨(Alex Vilenkin)을 만나러 갔다. 도이치와 달리, 빌렌킨은 서로 단절되고 현저히 격리된 다중의 우주들이 있다. 각 우주는 양자 터널링으로 알려진 과정에 의해 에너지를 전혀 소비하지 않은 채 비존재와 존재 사이의 장벽을 자발적으로 가로지르며 무로부터 발생한다. 전체 에너지를 정확히 영으로 유지한 채 우주들은 생성되게 되는데, 물질의 양의 에너지는 중력의 음의 에너지에 의해 상쇄된다. 에너지가 영이기 때문에 질량은 공짜로 생성된다.

 

빌렌킨 장의 제목은 "궁극적인 공짜 점심?"이다. 홀트는 젊은 물리학자 조지 가모브와 늙은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둘 다가 프린스턴에 있었을 때 둘 사이의 대화를 서술한다. 양자 터널링이라는 관념의 원래 고안자인 가모브는 아인슈타인에게 공짜 점심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아인슈타인은 매우 놀라서 거리 중간에 멈추었고 거의 차에 치일 뻔했다.

 

과학의 고유한 한계에 관해서 의견들이 매우 다양하다. 내 경우에, 다중우주는 철학이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시험될 수 있는 사실들과 탐구될 수 있는 불가사의들에 관한 것이고, 나는 다중우주의 가설들을 시험할 방법을 전혀 모른다. 철학은 상상될 수 있는 관념들과 말하여질 수 있는 이야기들에 관한 것이다. 나는 과학을 협소하게 한정하는 한편, 과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인간 지혜의 다른 원천들을 인정한다. 지혜의 다른 원천들은 문학, 예술, 역사, 종교, 그리고 철학이다. 다중우주는 철학과 문학에 속한다.

 

내가 애호하는 판본의 다중우주는 1950년에 사망한 철학자 올라프 스테이플던(Olaf Stapledon)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는 리버풀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1937년에 그는 다중우주에 관한 그의 전망을 서술하는 <<스타메이커(Star Maker)>>라는 소설을 출판했다. 그 책은 과학소설로 시판되었지만, 그것은 과학보다 신학과 더 관련이 있다. 화자는 우주 공간을 여행하며 과거와 미래의 외계 문명들을 방문하고, 그의 마음이 여행에 동행하는 그 문명들의 일부 거주민들과 이심전심으로 통합되는 환상을 경험한다. 마침내, 이 "우주적 마음"은 스타메이커, 즉 일련의 실험들로 현세의 모든 세계들을 창조한 "영원하고 절대적인 정신"을 만난다. 각 실험은 하나의 우주이고, 각 실험이 실패할 때 그는 그 다음 실험을 어떻게 조금 더 개선되게 설계할지 알게 된다. 그의 첫 번째 실험은 단순한 한 곡의 음악, 시간의 조직을 탐구하는 율동적인 북소리이다. 그 다음에 복잡성이 점점 더 증가하게 되는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들을 탐구하는 더 많은 예술 작품들이 만들어진다.

 

우리 자신의 우주는 중간 어딘가에 오는데, 그것은 선행 우주들을 크게 개선한 것이지만 여전히 실패할 운명이다. 자체 결함들 때문에 그것은 비극적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스타메이커가 우리 자신의 우주와 관련하여 저지른 오류들을 피하는 이후의 실험들은 우리의 이해 범위를 훨씬 벗어날 것이며, 궁극적인 완벽함에 이를 것이다. 이차 세계대전의 임박한 공포의 그늘 속에서 착상되었던 스테이플던의 다중우주는 선악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상상력이 풍부한 시도이다.

 

글로 쓰여진 역사가 시작된지 이십오 세기 동안 대부분 시기에 철학자들은 중요했다. 두 개의 철학자 집단, 즉 중국의 공자와 노자, 그리고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천 년 동안 아시아와 유럽의 문화들에서 지배적인 인물들이었다.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양문명과 서양문념의 사유 양식을 수립했다. 그들은 학자들뿐 아니라 지배자들에게도 말했다. 그들은 과학과 학문의 지적 세계뿐 아니라 정치와 도덕의 실제 세계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최근의 시기에도 철학자들은 여전히 인간 운명의 선도자였다. 민족주의가 유럽 역사의 추동력이 되었을 때, 프랑스의 데카르트와 몽테스키외, 네델란드의 스피노자, 영국의 홉스와 로크, 독일의 헤겔과 니체는 다양한 양식들의 국가들에 자신들의 흔적을 새겼다. 고전 그리스와 중국에서 십구 세기 말까지 역사의 모든 부침에 걸쳐 철학자들은 정신의 왕국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한 거인들이었다.

 

홀트의 철학자들은 이십 세기와 이십일 세기에 속한다. 과거의 거인들에 비하면 그들은 가엾은 한 무리의 난장이들이다. 그들은 깊이 사유하고 강단의 청중들에게 학술적인 강의를 하지만, 바깥 세계에서는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거의 아무도 없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무의미하다. 십구 세기 말 경에 철학자들은 공적 생활에서 사라졌다. 루이스 캐롤(Lewis Carroll)의 시 속에 나타나는 스나크처럼 그들은 갑자기 그리고 조용히 사라졌다. 일반 대중에 관한 한, 철학자들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인슈타인 탄생 백 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학술회의를 계획하는 데 관여했던 1979년에 나는 철학의 쇠퇴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 학술회의는 아인슈타인이 살았던 프린스턴에서 개최되었고, 우리의 가장 큰 회의장은 참가하기를 원했던 모든 사람들에 비해 너무 작았다. 누구를 초청해야 하는지 결정할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 위원회의 위원이 공표되었을 때, 배제되었던 사람들로부터 요란한 항의가 있었다. 신랄한 논의 후에 우리는 세 개의 위원회를 설치하는 데 동의했는데, 각 위원회는 참석자들의 삼분의 일을 초청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한 위원회는 과학자들을 위해, 한 위원회는 과학사가들을 위해, 한 위원회는 과학철학자들을 위해 설치되었다.

 

그 세 위원회가 참석자들을 선정한 후에 우리는 세 개의 초청자 명부를 갖게 되었다. 나는 그 명부들을 살펴보고 즉각적으로 그것들의 단절에 놀랐다. 거의 예외 없이 나는 과학자 명부에 실린 모든 사람들을 사적으로 알았다. 역사가 명부에서 나는 이름들은 알았지만, 사적으로는 그들을 몰랐다. 철학자 명부에서 나는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다.

 

이전의 시기에 과학자들과 역사가들과 철학자들은 서로 알았을 것이다. 뉴턴과 로크는 친구이자 1689년 영국 의회의 동료였고, 1688년의 무혈 혁명 후에 영국의 입헌 정부를 수립하는 데 일조했다. 영국 내전의 피비린내 나는 열정은 제한된 권력을 갖는 입헌군주제를 수립함으로써 마침내 진정되었다. 입헌군주제는 철학자들에 의해 고안된 통치체제이다. 그러나 이십 세기에 과학과 역사와 철학은 분리된 문화들이 되어버렸다. 별개의 공동체에서 거주하며 서로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 세 개의 전문가 집단이 있다.

 

언제 그리고 왜 철학은 자체의 영향력을 상실했는가? 어떻게 철학은 과거 영광의 무력한 유물이 되었는가? 이것들이 짐 홀트의 책이 우리로 하여금 묻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불쾌한 의문들이다. 철학이 과학과 역사와 문학과 종교와 분리된 별개의 분과학문이 되었을 때 철학자들은 무의미해졌다.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 모든 분과학문들을 섭렵했다. 십구 세기까지 과학은 자연철학으로 불리었고 공식적으로 철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었다. "과학자(scientist)"라는 낱말은 윌리엄 휴웰(William Whewell)에 의해 고안되었는데, 그는 십구 세기 철학자로서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이 되었고 비트겐슈타인과 내가 1946년에 거주했던 건물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1833년에 휴웰은 그 낱말을 도입했다. 그는 과학을 철학과는 별개의 전문적인 분과학문으로 확립하기 위해 주도면밀한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휴웰의 운동은 성공했다. 그 결과, 과학은 공적 생활에서 지배적인 위치로 성장했고 철학은 쇠퇴했다. 종교와 철학에서 분리되었을 때 철학은 훨씬 더 쇠퇴했다.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욥기와 성 아우구스투스의 <<고백록>> 같은 문학적 걸작들을 저술했다. 철학자에 저술된 가장 최근의 걸작들은 1885년에 출판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1866년에 출판된 <<선악을 넘어서>>일 것이다. 현대의 철학과들은 신비로운 것들에 대한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