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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객체들의 역동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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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세계는 객체들과 관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을 때,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객체가 아니라 오히려 과정들이야!" 또는 "존재하는 것은 객체가 아니라 오히려 사건들이야!"라고 외치는 것을 듣는 것은 이례적이지 않다. 나는 이런 반응들을 접하게 되면 내 머리를 긁게 된다고 고백한다. 왜 객체와 과정 사이에 대립이 있어야 하는가? 또는 약간 다르게 말하자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객체를 과정으로 생각하지 못하는가?

 

[...] 마수미(Massumi)가 객체를 "지나가는 사건들의 복합체", 생성, 그리고 과정들의 파생물과 대조하는 것을 볼 때, 그의 사유 속에는 구별하기 위한 대립 관계가 있어서 객체는 "존재", "정적인" 것, "가만히 있는" 것,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를 가리키게 된다. 다시 말해서, 마수미의 경우에, 객체는 그 어떤 식으로도 생성되거나 변하지 않은 채 저곳에 그냥 가만히 있는 정적인 덩어리다. 이 모형에서는, 우리가 생성과 변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한, 당연히 우주는 객체들로 구성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객체"가 정적이고, 가만히 있으며, 모든 생성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가리킬 때에만 오직 참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내가 온티콜로지에서 반대 논변을 펼치려고 노력했던 객체 관념이다. [...] 내게 객체는 바로 과정 또는 활동이다. 이것이 나의 온티콜로지와 하만(Harman)의 객체지향 철학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이다. 하만은 우연한 변화들을 겪는 동안 내내 유지되는 정적인 불변의 본질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나는 객체는 항상 엔트로피의 위협에 직면하고, 그래서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거나 파괴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체를 영구적으로 재생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어떤 현실적 존재자가 생성되는 방식이 그 현실적 존재자가 무엇인지를 구성한다"고 진술하는 화이트헤드의 언명을 좇는다. [...]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사건들을 구분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정동(affect)들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동은 [...] 옮겨지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Cleopatra's Needle) 같은 객체에 들이닥치거나 일어나는 사건이거나, 또는 사격 연습을 위해 스핑크스에 코에 총질하는 나폴레옹 병사들의 비열한 행위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객체가 존재하는 동안 끊임없이 전개되는 그 객체에 "내재적인" 사건들이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 가만히 있는 듯 보일지라도, 그 내부에서 원자들이 회전하고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모든 종류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 어떤 객체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데, 그것이 가만히 있는 듯 보일 때조차도 그렇다. 오히려 모든 객체는 영구적으로 운동 상태에 있는데, 그것이 시간에 걸쳐 지속하는 동안 끊임없이 경로를 그린다. 지속은 객체들의 정적인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객체가 수행하는 활동이다. 지속은 객체들이 행해야 하는 것이지, 외부로부터 파괴될 정도로 교란받지 않을 때까지 기본 양태로서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객체를 "시공간 벌레"로 서술한다. 영화 <<도니 다코(Donnie Darko)>>에서 주인공의 가슴에서 뻗친 "경로"를 떠올리자. 벌레처럼 우리가 미래로 그리는 시간적 경로가 있다고 그 영화는 주장했다. 그런데 과거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것은 객체와 관련되어 있는 방식이다. 벌레처럼 객체는 자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조작 또는 활동들을 통해 끊임없이 자체를 생산하는 경로를 시간과 공간에 걸쳐 그린다. 우리는 객체가 모든 종류의 진행 중인 사건들로 구성되는, 시간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이라는 사실 때문에 "객체"라는 술어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객체"라는 술어가 유지되어야 한다면, 이것은 과정들이 서로 완전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과정"는 "고양이 타샤 과정"이나 "태양 과정"과 완전히 구별된다. 이 과정들 각각은 전혀 별개의 개체이다. 확실히, 이 과정들은 모든 종류의 흥미로운 방식들로 서로 얽힐 수 있지만, 그것이 그것들의 시공간적 개체성 또는 특이성의 기반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내게 "객체", "실체", "존재자", "개체", "사물", "단위", "체계", 그리고 "과정"은 모두 동의어다. [...] 체계로서 객체는 과정이고 활동이다. 그리고 나는 객체들이 최소한 두 가지 방식으로 과정적이라고 주장한다. 객체가 과정인 첫 번째 방식은 이미 개괄되었는데, 객체는 엔트로피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체를 재생산하여야 한다. 이것은 객체를 끊임없이 지속시키는 모든 종류의 조작들, 모든 종류의 활동들이 객체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둘째, 객체는 성질들의 층위에서 수행되는 활동이다. 객체에 대한 설명에서 나는 객체의 "잠재적 고유 존재"와 그것의 "국소적 표현"을 구분한다. 객체의 잠재적 고유 존재는 물러서 있는 본질적 성질들이 아니라 능력들로 구성된다. 여기서 "능력"은 객체의 역량 또는 객체가 행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나는 과학의 주요한 목적들 가운데 하나가 객체들의 능력들을 알아내는 것이고, 이런 능력들은 한정된 조건에서 객체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기 위해 객체들에 대한 작용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여긴다. 능력에 대한 설명에서 나는 스피노자, 조지 몰나르(George Molnar), 그리고 들뢰즈의 작업에 크게 빚지고 있다[...].

 

객체의 "국소적 표현"은 그것의 성질이다. 나의 틀 안에서 성질은 객체가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객체가 행하는 것이다. 성질은 한정된 조건에 놓인 객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성질은 객체의 고정된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객체가 저지른 이다. 우리가 성질이 객체의 고정된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안정된 조건에서 객체를 만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내가 후원에 놓인 바위를 이 무게를, 이 조직, 이 색깔 등을 지닌 것으로 항상 만나기 때문에 나는 이런 성질들이 그 바위의 고유한 불변의 특징들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내가 고려하지 못하는 것은 그 바위가 존재하고 있는 끌림의 체제인데, 그것 때문에 이런 성질들이 그 바위가 행하는 것이라기보다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끌림의 체제는 한 객체가 다른 객체들과 맺는 관계들에 의해 규정되는 관계적 또는 생태적 차원이다. 이 경우에, 내 소중한 바위의 끌림의 체제는 [...] 그것이 행성 지구, 지구의 온도, 지구의 대기 등과 맺는 관계들로 구성된다. 그 바위를 화성에 위치시키면 우리는 그것의 무게가 변하는 것을 알아챌 것인데, 화성의 질량이 지구 질량의 대략 절반이어서 다른 인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 바위를 금성에 위치시키면, 금성의 대기 조성뿐 아니라 그 행성의 격렬한 열기 때문에 그 바위의 색깔과 조직 같은 성질들이 변한다는 점을 알아챌 것이다. 이것들은 국소적 표현들이고, 국소적 표현들은 사건들이다. 성질이 국소적인 까닭은 그것이 객체가 묻어 들어가 있으며 상호작용하는 국소적 조건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성질이 표현인 까닭은 그것이 객체의 정성적 상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성질이 표현인 한에 있어서, 그것은 객체에서 일어나는 활동 또는 과정이다.

 

국소적 표현이 산출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한편으로, 우리가 이해했듯이, 국소적 표현은 한 객체가 그것의 끌림의 체제 또는 환경 속의 다른 객체들과 상호작용하는 데서 초래될 수 있다. 내가 텍사스의 격렬한 열기로 가득찬 후원에서 냉방 장치가 가동되는 집으로 걸어 들어설 때, 내 피부는 소름이 돋는다. 내 피부의 소름 돋음은 끌림의 체제 또는 객체들 사이의 관계들의 집합이 전환된 결과로서 산출된 국소적 표현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소적 표현은 한 객체가 다른 객체들과 맺는 관계들에서 일어나는 과정 또는 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그 객체에 내재적인 사건과 활동의 결과로서 산출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발달 중인 유기체가 어떤 발달 시점에서 질적인 변화를 겪는, 그것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호르몬 과정과 세포 과정들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유아들은 흔히 금발로 태어나지만, 그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머리카락 색깔이 갈색 또는 적색으로 변화되고 만다. [...]

 

[...] 객체들 내부에서 그리고 다른 객체들과 갖는 상호작용들의 결과로서 모든 종류들의 과정들이 일어난다면, 당연히 객체들은 열린 체계이다. 한 객체의 오늘 모습은 그것의 내일 모습과 어떤 관계를 명확히 갖지만, 그것이 시간과 공간에 걸쳐 자체의 모험을 행함에 따라 그것은 항상 전적으로 다르게 될 가능성에 열려 있다. 애벌레는 나비가 되고 탄소는 붕괴한다. 시간에 걸친 모험에서 객체는 자체에 내재적인 과정들과 다른 객체들과 갖는 상호작용들의 결과로서 매우 다른 성질과 구조들을 취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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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