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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클랍베이크: 오늘의 인용-자연주의의 애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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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나는 진화주의를 "자연주의적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전에 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이해하는 바를 진술했는데, 그것은 과학으로 위장된 믿음 체계이다. 그런데 "자연주의"란 무엇인가? 흔히 저자들은 존재론적 자연주의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구분한다. [...]

 

존재론적 자연주의는 혼란스러운 논의들을 초래하곤 한다. 이것은 "자연주의"라는 낱말이 자체적으로 이미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통적 의미와 현대적 의미가 있는데, 그 둘이 뒤섞이곤 한다. 근대 초에 그 낱말은 전통적 의미를 획득했다. "자연주의"는 중세 스콜라철학자들이 옹호했던 존재론, 즉 자연적 실재와 초자연적(또는 신성한) 실재가 존재한다는 신조인 초자연주의의 대응 관념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이중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초자연적인 것을 지웠던 사상가들이 나중에 자연주의자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스콜라철학적 이원론을 과거의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많은 기독교들은 그것이 통합적인 기독교적 생명관과 상충된다고 여긴다. 여전히, 이원론적 사유 형식이 그 낱말의 전통적 의미를 계속해서 채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자연주의는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하고, 신에 관한 어떤 언급도 금기로 선언하는 사유 도식을 가리킨다. 이런 자연주의는 철학적 무신론과 동의어다.

 

지난 몇 세기 동안 현대적 의미가 유행하게 되었다. "자연주의"라는 낱말은 스콜라철학적 이원론으로부터 초자연적인 것의 거부로 더 이상 규정되지 않는다. 현대적 견해는 세계에 관한 일원론적 관념, 즉 자연이 실재에 대한 포괄적 기반으로 제시되는 일의적인 견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자연주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는 보편 법칙들과 물리화학적 원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물질적 자연이라는 확신을 나타낸다. 이런 자연주의는 철학적 무신론이 아니라 철학적 유물론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현재, 신과 자연이 어떻게 정의되는지에 따라서, 이런 종류의 자연주의의 유신론적 변양태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자연주의의 어떤 정의을 유지할 것인가? 앞에서 나는 스콜라철학적 이원론, 즉 자연적 실재와 초자연적 실재라는 이중성의 추정에 반발했다. 자세히 분석해보면, 초자연적인 것은 중세 시대에 형성된, 아마도 신플라톤주의적 기원을 지닌 비성서적 개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초자연주의에 대한 대응 관념으로서의 자연주의에 대한 스콜라철학적 정의는 매우 매력적이지 않다. 게다가 나는 모든 자연주의자들을 무신론자로 여기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자연주의에 대한 현대적 정의를 선호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은 채 선호한다. 나는 물리적 자연 개념을 실재의 궁극적 원리로 여기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대적 표현의 자연주의는 현대물리학의 설명력에 대한 과대평가에 바탕을 둔 물리적 실재의 본성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다.

 

우리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자. 우리는 현재의 진화주의가 자연주의의 기본 견해들에 의존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다시 말해서, 그것은 현대적 표현의 자연주의의 기본 견해들에 의존한다. 이런 기본 견해들은 무엇을 포함하는가? 여기서 나는 네 가지 요소를 언급할 수 있다.

 

(1) 진화적 자연주의의 출발점은 자연 일반을 현대물리학에서 사용되는 일방적이고 추상적인 자연 개념과 자명하게 동일시하는 것이다.

 

(2) 생명에 기원에 관해서는 아무 설명도 없었던 다윈과 대조적으로, 이런 자연주의는 물리적 자연 개념이 모든 생명 현상을 비롯한 궁극적인 설명 근거로서 쓰일 수 있다.

 

(3) 이런 이론적인 기반 위에 진화적 자연주의는 신다윈주의적 선택론의 형식으로 유기적 자연에 대한 설명 도식을 구성한다.

 

(4) 이런 도식으로부터 진화적 자연주의는, 모든 생명 형태들이 점진적이고 중단되지 않은 발달 노선을 따라 전적으로 우연한 방식으로 물질적 자연으로부터 생성되었으며, 그리고 이런 생명 현상들은 물리적 현상들의 복잡하고 전적으로 환원 가능한 변양태들이라는 이중의 결론을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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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곱 클랍베이크(Jacob Klapwijk), <<살아 있는 세계 속의 목적?: 창조와 창발적 진화(Purpose in the Living World?: Creation and Emergent Evolution)>>(2008), pp. 4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