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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클랍베이크: 오늘의 인용-진화론과 진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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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이론에 대한 수정들은 불가피했다. 이십 세기에 그것들은 순차적으로 드러났으며, 특히 개체군생태학과 유전학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생태학자들은 자연에서의 선택 과정은 다윈이 생각했던 것보다 성 선택과 종내 경쟁에 덜 의존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방, 유전자 부동, 그리고 종간 집단 이점 같은 환경적 요소들에 훨씬 더 의존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다윈이 전혀 몰랐던 유전학이라는 분과학문은 무엇보다도 생식에 있어서 자연선택이 기반을 다지는 방식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이런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들은 다윈의 시대에는 거의 전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1864년에 발표되었던 그레고르 멘델(Gregor Mendel)의 유전 법칙들, 1889-1901년의 휴고 드브리스(Hugo de Vries)의 유전자와 돌연변이 이론들, G. H. 하디(Hardy)와 W. 와인버그(Weinberg)의 개체군유전학 테제들(1908), 그리고 J. D. 왓슨(Watson)과 F. H. C. 크릭(Crick)의 이중나선 DNA 모형(1953)이었다. 1970년대부터 유전학은 생물학적 세포의 복잡한 세계에 접근할 수 있었던 분자생물학으로부터 강력한 뒷받침을 받았다. 분자생물학은, 점 돌연변이, 탈락, 삽입, 중복, 전위, 세포내 공생, 그리고 혼성 같은 DNA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연변이들의 별개 형태들에 대한 주목을 요구했다. 이것은 세포 내부에서 세포 동요들이 발견되었다는 점을 확실히 하는 데 충분한데, 그 점에 관해서는 다윈도 멘델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생물학, 개체군생태학, 비교해부학, 면역학, 그리고 분자생물학이 기여한 점들은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라는 다윈 이론을 상당히 수정했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입증했다. 이십 세기 중엽 동안 다윈 이론은 유전학 및 분자생물학과의 동맹을 통해서 어느 정도 완전해졌다. 그때 이후로 "진화론"이라는 술어는 유전자 변이와 자연선택에 대한 다윈의 견해로 시작하여 DNA 내의 유전자 빈도에 이르기까지 그것의 모든 현대적 수정을 고려하는 종의 유래에 관한 이론들의 인상적인 조합을 나타낸다. 이런 이론들의 집단은 신다윈주의 또는, 더 구체적으로, (진화론과 유전학의) 종합 이론 또는 근대적 종합으로 불린다. 이 종합을 향한 발전에 있어서 주요 인물들은 토머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  J. B. S. 홀데인( Haldane),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er), 조지 게이로드 심슨(George Gaylord Simpson), 그리고 G. 레드야드 스테빈스(Ledyard Stebbins)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진화론"은 현대적 종합을 가리킨다. 그런데 또한 "진화론"은 전적으로 다른 것을 가리킬 수 있다. 그 경우에 그것은 진화적 가설들의 점진적인 확증을 추구하는 일단의 이론적 분과학문들이 아니다. 그때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 물질적 세계를 자체의 자명하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기원으로 갖는 진화적 실재로서의 세계에 관한 선험적 견해이다. 그 다음에 그것은, 가장 복잡한 체계들에 이르기까지, 지구에서 생명 형태들의 엄청난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순전한 우연의 산물, 맹목적인 힘들과 무작위적인 조절 메커니즘들의 산물, 그래서 그 어떤 설계도, 목적도, 또는 의미도 없는 산물이라고 믿게 만들 것이다. 또한 이 세계관은 자체를 진화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독단, 즉 진화론이 생명의 신비를 단박에 풀었다고 함축하는 믿음이다. [...] 철학자들은 여기서 하나의 이데올로기, 즉 더 이상 이론 또는 과학으로 불릴 수 없는 견해를 감지할 것인데, 그것은 과학이라는 기치로 개진되고 있지만 합리화된 믿음 체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분석들에서 나는 진화론을 일단의 훌륭한 가설적-과학적 이론들로 받아들인다. 나는 그것이 믿음 체계, 즉 자연주의적 기원의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전달 매체로 판명될 때마다 거리를 둔다. 진화 논쟁들에 있어서 주요한 한 가지 문제는 이론과 이데올로기가 흔히 밀접하게 뒤얽힌다는 점이다. 많은 저자들이 자신들의 과학적 논변들을 이데올로기적 기대들과 뒤섞거나, 또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 기대들을 과학적 논변들로 장식한다. 그런 기대들을 갖는 독자들은 흔히 그 논변의 낚싯바늘, 줄, 그리고 봉돌을 삼키는 경향이 있다. 이런 기대들을 공유하지 않는 독자들의 경우에는 비판적 구분이 필요하다.

 

[...] 나는 진화론과 진화주의를 엄격히 구분한다. 내게 진화주의는 의심스럽다. "주의(ism)"라는 접미사는 특수한 통찰의 절대화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심리주의"라는 술어는, 프로이트에서 발견되듯이, 심리학의 설명력의 과대평가 또는 절대화다. 그리고 "경제주의"라는 술어는, 마르크스에서 발견되듯이, 경제의 설명력의 과대평가 또는 절대화다. 여기서 우리는 진화과학의 절대화를 다룬다. 요약하면, 진화론에 관해 말할 때 나는 전 세계의 매우 많은 유전학자들과 진화생물학자들이 꼼꼼하고 헌신적으로 연구하는 이론적 분과학문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반면에, 진화주의를 언급할 때 나는 생명의 수수께끼에 대한 결정적인 해답인 척하는 진화에 대한 견해를 가리킨다. 진화주의는 이십 세기에 진화론에 스며들었던, 그리고 과학적 사실로 포장된 자연주의적 이데올로기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내게 "진화주의"는 "진화적 자연주의"와 동등하다.

 

진화론과 진화주의의 구분은 진화 논쟁에 있어서 어떤 사상가의 입장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동시에 이런 구분을 신중하게 적용할 이유와 신중한 사유 없이 꼬리표를 적용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세 가지 특수한 점이 있다. 첫째, 진화주의는 생명과학에서 명확히 구획된 입장이라기보다 풍조를 결정하는 추세이다. 둘째, 일부 저자들의 경우에 진화주의는 지배적인 주제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무의식적인 전제이다. 세째,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이야기들도 과학적 진리의 중요한 요소들을 포함할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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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곱 클랍베이크(Jacob Klapwijk), <<살아 있는 세계 속의 목적?: 창조와 창발적 진화(Purpose in the Living World?: Creation and Emergent Evolution)>>(2008), pp. 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