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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객체지향 존재론의 생태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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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태학적 사상(The Ecological Thought)>>의 저자인 모턴(Morton)은 만물의 상호의존성을 주장하는 반면에,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은 객체들이 모든 관계에서 물러서 있다고 주장한다. [...] 아무리 역설적으로 들릴지라도, 여러 측면에서 물러섬 테제에 대한 옹호는 [...] 그런 종류의 생태적 관계들을 생각하기 위해 고안된다.

 

생태학적 사유와 변증법적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관계적인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작업했다. 여러 측면에서, 생태학적 사상의 주적은 헤겔이 "추상적 사유"라고 불렀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의 주장에 따르면, 추상적 사유는 존재자들을 그것들이 전체 속에서 맺고 있는 관계들 및 차지하고 있는 위치들과 분리시키는 사유이다. 이것은 존재에 관한 절단된 편파적인 관념을 낳는다. 변증법적 사유와 생태학적 사유는 이런 경향에 맞서 힘껏 투쟁하며, 현상들의 상호의존성과 우리가 관계들의 연결망 또는 모턴이 "그물코(mesh)"라고 부르는 것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예증하려고 노력하였다. 오직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들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된다. 이런 쟁점들에 걸린 것들―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것들과 얽혀 있다―을 고려하면, 관계의 우위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때 변증법적으로 그리고 생태학적으로 경도된 사람들이 민감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객체지향 존재론은 반동적인 퇴행적 움직임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은데, 객체들은 자율적이고 물러서 있다는 그것의 테제에서 객체들을 그것들이 맺는 관계들과 분리시켜, 체계적 관계들과 상호의존성에 대한 탐구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고 존재자들이 서로 관련되는 방식을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감소시키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내게 객체지향 존재론이 무엇에 적합한지에 대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온티콜로지의 틀 내에서, 잠재적 고유 존재와 국소적 표현 사이의 구분은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들이 출현했을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여기에는 두 항이 아니라 항이 있다. 잠재적 고유 존재, 국소적 표현, 그리고 외부관계들. 국소적 고유 존재는 객체의 능력과 역량들을 가리킨다. 이런 능력과 역량들은 항상 물러서 있고, 하만이 "감각적 객체"라고 부르는 것 안에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그 어떤 국소적 표현도 항상 넘어선다. 국소적 표현은 객체의 현실화된 성질을 가리킨다. 생물학적 견지에서 우리는 국소적 표현을 객체의 표현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관계들은 객체들 사이의 외재적 관계들이다. 외부관계들은 국소적 표현의 산출, 즉 물러서 있는 객체가 세계 속에서 여러 측면에서 구현하게 될 표현형을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다시 말하자면, 외부관계라는 개념은 어떤 객체가 객체들의 그물코 또는 내가 "끌림의 체제"라고 부르는 것에 편입될 때 그것에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생태주의자들과 변증법적 사상가들은 우리로 하여금 관계적인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한 점에 있어서 옳았지만, 그들이 객체는 바로 그것의 관계들이라고 주장할 때 그들은 존재론적 층위에서 그리고 생태학적 실천의 층위에서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존재론적으로, 많은 생태학적 사유가 관계들은 항상 객체들에 내재적이라는 테제―즉, 자연은 조화로운 관계적 전체라는 테제―를 옹호하기 때문에, 그들은 일종의 실용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생태주의자(머튼이 아니라)는 존재란 이런 내재적 관계들의 그물코라고 말하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외부 객체들의 개입이 이 질서를 붕괴시킨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전적으로 적절하다. 생태계가 붕괴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이 의문에 대한 가능한 유일한 대답은, 관계들이 객체들에 외재적이라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집합체의 붕괴가 가능할 수 있으려면 객체들이 새로운 관계들을 맺는 것과 그것들이 다른 객체들과 분리되는 것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관계들로부터의 이런 자율성 같은 것이 없다면, 다윈의 기묘한 가설을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관계들의 외재성 같은 것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리적 부동(geographical drift)을 통한 종 분화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관계들의 외재성 같은 것이 없다면, 현재 큰두꺼비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일 또는 수백 만 년 전에 큰 소행성이 지구를 강타했을 때 일어났던 일 같은  집합체 바깥에서 온 행위자들의 개입이 담당하는 역할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 생태주의자들과 변증법적 사상가들이 정말 관심을 갖는 것은 내재적 관계들이 아니라, 오히려 국소적 표현들이 우연적이고 이질적이며 외재적인 관계들을 통해 산출되는 관계들의 외재성이다. 실천의 층위에서, 생태이론가들이 외재적 관계들과 이것들이 산출하는 국소적 표현들에 대단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생태이론가들이 "프래킹(fracking)"으로 알려진 과정을 통한 천연가스의 시추를 분석할 때,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해류, 생선, 야생 생물, 물 공급, 그리고 인체들에 있어서의 새로운 표현형과 국소적 표현들의 산출이다[...]. 그런 생태학적 분석의 전체적 전제는 객체들이 물러서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런 분석은 다르게 될 수 있는, 또는, 내 표현법에 따르면, 상이한 국소적 표현들을 겪을 수 있는 객체들의 공작[...]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사유 노선의 실천에 대한 중요성을 만난다. 나는 이 비유를 싫어하지만, 객체지향 존재론이 좋은 부기 또는 회계에 해당하는 여러 측면들이 있다. 온티콜로지가 거부하는 것은 존재자를 자체의 국소적 표현들로 환원하는 것이다. 존재자는 항상 다른 조건에서는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유에는 해방적 차원이 존재한다. 객체는 자체의 현실태 또는 국소적 표현과 등치될 수 없기 때문에, 객체는 자체의 국소적 표현들을 항상 넘어서기 때문에, 다른 세계와 다른 삶의 방식을 창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환경"이 비밀리에 통합되어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로 다루어질 때 우리는 일종의 비극적인 세계관에 이르게 되는데,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내재적으로 상관되어 있고 상호의존하는 것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이것이 모턴이 "과도한 객관주의(over-thereism)"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가 얽혀 있는 것이라기보다 우리 바깥에, "저곳에" 있는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다루어진다.

 

모턴의 사유 전체에 걸쳐 긴장을 감지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으로, 모턴은 공시적인 것 또는 사물들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는 통시적인 것, 발생적인 것, 그리고 존재자들이 "기묘한 낯선 것들"인 방식을 강조한다. 기묘한 낯선 것이라는 개념은 존재자들이 물러서 있는 방식 또는 그것들이 결코 자체의 현실태들로 단순히 환원될 수 없는 방식을 가리킨다. 반면에, 모턴이 강조하는 통시성은 이미 소쉬르적 그리고 심지어 데리다적 통시성/지연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난다. 소쉬르적 통시성은 공시성에 의해 엄격히 견인되는 반면에, 다윈적 통시성은 전적으로 새롭고 놀라운 방향들로 발달을 추동하는 사건, 우발적인 것, 외부자들의 도래, 기묘한 낯선 것들과의 만남들에 의해 단속된다. 다시 말해서, 다윈적 통시성은 관계들을 맺지만 전적으로 관계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상호작용하는 물러서 있는 객체들의 통시성이다. 그런 것이 객체지향 존재론의 통시성인데, 여기서 공작은 항상 새로운 객체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이고 생성이고 객체들의 감각적 표현들은 항상 우연적인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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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