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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그레이: 오늘의 인용-근본주의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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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근본주의자들은 근대적 탈주술화를 가져온 주원인이 과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권위의 원천이던 종교의 지위를 과학이 무너뜨렸는데, 그럼으로써 인간의 삶이 대단치 않고 우연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 대가를 치렀다고 말이다. 그들은 우리의 삶이 무언가 의미를 가지려면 과학의 힘이 꺾이고 신앙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학은 우리가 원한다고 우리 삶에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힘은 테크놀로지에서 나오는데, 테크놀로지는 우리가 어떤 의지를 가지느냐와 상관없이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고 있으니 말이다.

 

종교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현대 세계의 병폐를 치유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자신이 치유한다고 자처하는 그 질병의 증상이다. 그들은 전통 문화를 무조건 재건하고자 하는데, 이런 태도는 근대 특유의 기이한 환상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우리 좋을 대로 믿을 수 없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삶들이 남겨 놓은 흔적들이다. 세계관이라는 것도 우리 좋을 대로 우리 좋을 때 불러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 지나가고 나면 전통적 생활 방식은 되살릴 수 없다. 어떤 방식이건 전통을 되살리는 일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더하는 일이다. 과학이 좌우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아무리 원한다 해도 과학 이전의 세계관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한편, 과학 근본주의자들은 과학이 사심 없는 진리의 추구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과학이 인간의 필요 중 어떤 것을 충족시키고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과학은 희망과 검열이라는 두 가지 필요를 충족시킨다. 오늘날에는 과학만이 진보라는 신화를 지탱해 주고 있다. 사람들이 진보의 희망을 붙들고 있다면, 그것은 진보를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희망마저 놓았을 때 닥칠 상황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20세기의 정치적 기획은 실패했거나, 약속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성취를 남겼다. 그러나 과학에서의 진보는 전자 제품을 사거나 새로운 약품을 사는 것과 같은 일상의 경험에서 늘 확인할 수 있다. 과학은 우리에게 윤리와 정치가 주지 못하는 것, 즉 진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시 말하지만, 과학만이 이단자를 침묵시킬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과학은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다. 과거에 교회가 그랬듯, 과학은 주류를 따르지 않는 독립적 사상가들을 파괴하거나 주변부로 몰아낼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 과학은 어떤 청사진도 내놓지 않지만, 당대의 주류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검열함으로써 '확고하게 확립된 단일한 세계관'이라는 안락한 환상을 유지한다. [...] 그 단일한 세계관이야말로 과학이 갖는 호소력의 주된 원천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종교가 의심과 회의의 성소가 되어가는 와중에, 과학은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기적을 약속하면서[...], 불확실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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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권위는, 과학이 인간에게 환경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준다는 데서 나온다. 아마 가끔씩은 과학이 우리의 실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 기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본질이 진리 탐구라고 믿는다면 이는 전前과학적인 생각이며 과학을 인간의 필요에서 떼어 내 자연적이지 않고 초월적인 무언가로 만드는 것이다. "과학이란 곧 진리 추구"라고 믿는 것은, 진리가 세계를 지배하며 진리는 신성하다는 신화적인 믿음을,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념을 되살려 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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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그레이(John Gray),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김승진 옮김, 이후, 2010), pp. 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