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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태커: 오늘의 에세이-21세기를 위한 생명철학

 

21세기를 위한 생명철학

Biophilosophy for the 21st Century

 

―― 유진 태커(Eugene Thacker)

 

영혼-고기-유형

생명에 관한 사유에 대한 접근방식은 여태까지 세 가지―영혼(soul), 고기(meat), 그리고 유형(pattern)―가 있었을 뿐이다. 이 삼위 안에 생기 있고, 살아 있으며, 활기차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있다. '영혼'은 그저 스콜라철학적, 신학적, 인격적 영혼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 생명 원리(프시케), 생명의 조직 원리이다. 식물들의 식물적인 영혼, 동물들의 생기 있고 감각적인 영혼, 그리고 인간들의 이성적인 영혼이 있다. 영혼들의 위계는 나누어 위계화하는 생물학적 신학인 존재의 대연쇄와 다르지 않다. 반면에, '고기'는 육체적 물질, 사유하지 않는 메커니즘, 시계 장치 유기체, 데카르트에 의해 서술된 동물적 기계(bete machine)인데, 동물이든 기계이든, 그것은 아무 차이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 메커니즘은 고기로서의 생명, 그리고 생명이 없는 것으로서의 고기에 관한 사유이다(생명이 없는 생명이 고기 또는 기계이다). 마지막으로, '영혼' 및 '고기'와 구분되는 제3의 접근방식, 즉 '유형'이라는 접근방식이 있다. 유형에 관한 강조는 두드러지게 탈근대적인 현상, 사이버네틱스, 정보 이론, 자기조직화의 지형인 듯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다. 또 다시, 생물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을 구분짓는 표식으로서 형상(에이도스)과 '영혼'을 동일시한다. 그것은 그것들의 조직 양태, 그것들이 시간에 따라 자기실현하는 방식 속에 존재한다('그것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살아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와 현대의 자기조직화 연구는, 전체가 부분들의 합보다 크다는 점을 되풀이하는 것 외에도, 둘 다 조직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혼', '고기', 그리고 '유형'은 삼위를 형성한다. 또한 그 삼위는 삼부작이다. 중앙에는 영혼이, 오른편에는 고기가, 그리고 왼편에는 유형이 위치한다. 프시케에서 메커니즘과 동물 전기를 거쳐 '제뮬(gemmule)'과 '판겐(pangen)을 거쳐 DNA와 '생명의 암호'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규정하는 구색맞추미를 연속적으로 전환하고, 교환하고, 교체하며, 대체하는 사유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렇지만, 이 세 가지 접근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프시케 다음에 데카르트의 시계 장치가 이어진 다음에 유전 암호가 이어지는 식으로 어떤 주기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에, 삼위-삼부작으로서 그것들은 일종의 초상, 얼굴, 얼굴성(faciality), 검은 구멍들과 하얀 벽들의 마당을 형성하는데, 그것 속에 그리고 그것 위에 흔히 이렇게 쓰여져 있다. '생명은 자체의 본질이 연역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 본질이 모든 연역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영혼-고기-유형. 이것들 각각은 생명체, 유기체에서 정점에 이르는 중요하고, 보편적이며, 외재적인 조직 원리인 생명력을 상정한다. 우리는 이것을 생명 원리―탐구 분야 전체를 조직하는 핵심 개념―로 단순히 부를 수 있다. 각 접근방식은 자체의 구색맞추미들에 있어서 상이하지만, 생명에 대한 서술을 최소한 보장하는 선험적인 장소―'저곳에...'라고 가리키며 말할 수 있게 하는 것(또는 아마도, '그것은 살아있다...살아있어!' 또는 '다리가 두 개 이상인 것이라면 무엇이나 사살하라!')―가 계속 존재한다. 그런 조직 원리들을 상정할 때, 영혼-고기-유형 삼부작은 경계들―생물/무생물, 유기/무기, 생기 있는/생기 없는, 또한 동물/기계, 인간/동물, 인간/야생, 종, 인종, 개체군, 유전체...―도 명확히 표현한다. 우리는 이런 실천을 분절화의 경계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생명 원리들과 분절화의 경계들은 서양이 생명에 관한 사유를 끊임없이 재발명해온 두 가지 방법이다.

 

외재적 생명

이런 사유에는 내향적 측면과 외향적 측면이 존재한다. 내향적 측면은 종과 류들을 분리하고, 정리하며, 서로 관련시킨다. 외향적 측면은 무생물들에 대해 생물들의 경계와 위치를 관리하여 하나의 도구, 영속적인 저장고를 가능하게 만든다. 자체를 내적으로 처리하고, 거르며, 분화시킨다는 점에서 내향적 측면은 대사적이다. 그것은 생명분자들의 파괴와 생산, 기관들의 조직화, 종과 인종들의 생성이다. 외향적 측면은 면역학적인데, 그것은 경계, 교섭, 추이들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타자 구분이고, 자체의 환경과 교섭하고 자체의 환경을 감지하는 유기체이며, 다른 육체들과 접하며 살고 있는 개체이다. 외향적 측면이 사물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할 때까지 내향적 측면은 그야말로 좋다. 일례는 전염병이다. 전염병은 개별적 유기체에 한정될 수 없는데, 바로 그것의 본성이 유기체들 사이를 지나가는 것이며, 그리고 점점 더 종 경계들(그리고 국경들)을 통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염병에 대한 분석 단위는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내향적 측면이 환영이라고 밝혀질 때까지 외향적 측면은 아무 문제 없이 경계들을 관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외향적 측면이 개별 유기체를 자체의 환경과 구분되는 것으로 상정하고, 그래서 도구적 관계, 영속적인 저장고를 확립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향적 측면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이 개별 유기체―그것의 생물학적, 생리학적, 인지적 과정들―에 관한 전 범위의 이해라고 가정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 각각은 정말 자체적으로 포개진 외향적 측면이 아닌가? 그러므로 내향적 측면과 외향적 측면은 끊임없이 서로 복잡하게 만들고, 그래서 들뢰즈가 하듯이, 그것들의 관계를 일종의 접힘(안으로 접힘, 바깥으로 접힘, 발달과 아무 관계도 없는 발생학)로 서술하는 것은 부정확하지 않다.

 

영혼-고기-유형. 또 다시, 마치 유전자 기술과 정보 기술이 내향성과 외향성의 가장 고등한 양태라고 의미하는 것처럼, 이것은 텔로스(telos)가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연결망, 집단, 그리고 다중의 시대에, 제3의 접근방식―유형이라는 접근방식―이 생명과학(유전학, 유전체학), 보건(생명공학 산업), 기술(인공생명, 인공지능, 연결망), 전쟁(생물테러, 신종 전염병), 그리고 심지어 대안적인 과학적 관점들(생물복잡성, 창발)에서 지배적이다. 새로운 활기찬 유형이 모든 종류의 체계들―전지구적 경제들, 사회적 체계들, 이민 유형들, 정보 교환들, 이동 무선 통신 등―에 속속들이 퍼져 있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명에 관한 사유의 나누어 위계화하기 심성을 제거했는가? '유형'은 새로운 '영혼'일 뿐인가? 전통적으로, 생명 원리에 관한 이런 의문들은 생물학의 철학이라는 영역 아래 포섭된다. 그런데 생물학의 철학을 뒤집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이런 사유(영혼-고기-유형)와 이런 이원론적 방법(생명의 원리들, 분절화의 경계들)을 뒤집고, 그 대신에 생명철학을 고려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문제가 되는 것은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라, 바로 '생명 자체'일 것이다. 생명의 내재적 특성을 고려하는 대신에, 생명을 외재적인 것으로, 항상 자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고려하는 것은 어떤가? 생명(본질, 조직 원리)을 중심에 두는 대신에, 생명을 주변부에 위치하는 것으로 고려하는 것은 어떤가? 외재적 생명, 항상 자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생명, 주변부적 생명...

 

생명철학 대 생물학의 철학

그렇다면 생명철학은 무엇인가? 우선 생명철학은 생물학의 철학과 같지 않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의 철학으로 불리는 것은 통합적인 측면과 계열적 측면, 즉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 둘 다를 지니고 있다. 수평적 차원은 유기체의 본질 또는 조직 원리의 일부(성장과 쇠퇴, 생식과 발달, 진화적 적응)로 간주되는 유기체의 보편적 특성들에 대한 해명이다. 수직적 차원은 서양 사상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자연사까지, 다윈의 진화까지, 유전학과 생화학의 새로운 종합까지 이르는 이런 사유의 역사적 전개이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의 철학은 생물학적 지식의 철학적 차원들을 강조하고 확장한다. 진화, 생물학적 결정론, 이원론, 기계론, 그리고 목적론과 관련된 쟁점들은 비교해부학, 생리학, 유전학, 생화학, 발생학, 세균설, 발달 체계 이론 같은 생명과학의 맥락에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생물학의 철학은 앞에서 언급한 생명에 관한 사유에 대한 세 가지 접근방식, 즉 영혼-고기-유형을 특징 짓는다. 또한 생물학의 철학은 생명의 원리와 분절화의 경계들을 식별하는 이중의 방법을 수행한다. 그것은 '생물은 무생물과 다른가?'라는 의문―존재론적 의문―을 '생물에 대한 연구(생물학)은 다른 연구 분야들과 다른가?'라는 또 하나의 의문―인식론적 의문―의 맥락 속에서 제기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생명철학은 단순히 생물학의 철학의 대립물인가?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생명철학은 확실히 생물학의 철학의 삼부작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영혼-고기-유형 접근방식을 통과하는 방식이면서, 제기된 다음에 흔히 분류를 둘러싼 인식론적 관심사들로 환원되는 존재론적 의문들의 본원성을 그것과 함께 고려한다. 생물학의 철학은 생명의 본질을 서술할 '생명' 개념을 명확히 표현하는 데 관여하는 반면에, 생명철학은 생명을 끊임없이 변형시키는 사물들을 명확히 표현하는 데 관여한다. 생명철학의 경우에, 생명=다양체. 생물학의 철학은 모든 생명에 대한 보편적 특성들의 도출로 진전되는 반면에, 생명철학은 생물을 항상 자체의 외부로 데리고 가는 관계들의 연결망을 알아냄으로써 진전된다. 내재적 특성들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외재적 도표. 생물학의 철학은 (특히 20세기에) 생명을 수로 환원시키는 데(메커니즘에서 유전학으로) 점점 더 관여하는 반면에, 생명철학은 다른 한 종류의 수, 생명을 관통하는 수(조합적인 확산하는 수, 그래프, 집단, 그리고 집합들의 수)를 본다. 생물학의 철학은 자체에서 모든 생기론('생기론'은 생물학의 저주스런 말들 가운데 하나이다)을 추방하기 위해 메커니즘을 갱신하는 반면에, 생명철학은 자체에서 모든 신학을 추방하기 위해 생기론을 갱신한다(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수는 생기론적이다).

 

인공생명(A-lif)이 아닌 '하나의 생명(A life)'

생물학의 철학과 관련된 어려움―'동물적인 것'에 관한 거의 모든 철학적 사유와 관련되어 있듯이―은 생명에 관한 우리 사유의 인간형상주의에 저항하는 것이다. 생물학의 철학의 접근방식, 즉 영혼-고기-유형이라는 접근방식은 인간에 관한 개념을 중심에 두고 격상시킴으로써 그것이 생명과 동형적일 뿐 아니라 생명보다 더 높아질 수도 있다('정점'으로서의 '생명 자체' 그리고 기초 또는 토대로서의 '단순한 생명'). 이것은 생명에 관한 우리의 사유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것이 인간적인 것에 대해 질적으로 구분되는 비동물적 지위를 잡아 두는 동시에 인간적인 것을 거대한 연쇄의 정점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물적, 자연적, 생물학적 세계와 함께 하는 인간의 피곤한 드라마이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그 세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고, 추상적 지식 체계를 만들어내고, 세계와 삶을 구성하며, 영적인 것을 열망한다(동물성에 관한 하이데거의 테제를 상기하자. 돌은 세계가 없고, 동물은 세계 속에서 빈곤하며, 인간은 세계를 구성한다). 그것은 결국 비극적이고 터무니없는 드라마다. 현대의 생물예술 행위들은 이런 드라마에 대한 논평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그것들은 다다이즘적 포유동물, 여분의 귀, 날개 달린 돼지, 활동주의적 곡물, 그리고 '흐릿한 생물학적 사보타주'를 만들어낸다.

 

생명철학은 생명에 관한 모든 인간형상주의적 개념들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그런데 이런 비인간형상주의적 생명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여전히 또 다시 낡은 술어('유형')을 새로운 술어('다양체')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하는가? 문제는 그저 유명론적인 것이 아니며, 그저 논리의 게임이 아니다. 문제는 '생명'과 '사유' 사이의 바로 그 관계이다(캉키엠과 푸코 둘 다 가장 정확한 생명 개념은 생명 자체일 것이라고 인식한다). 생명철학은 비인간적 생명, 비유기적 생명, 익명적 생명, 불명확한 생명―들뢰즈가 '하나의 생명(a life)'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접근방식이다. 그러나 수법은 내부로부터 관행적인 생물학적 사유를 무화시키는 것이다. 생명철학은 배타적으로 생물학적인 생명을 모면하는 생물학적 생명의 양태들에 집중한다. 미생물, 전염병, 내부 공생, 기생, 군집, 덩어리, 무리, 인공생명, 유전 알고리듬, 생명경로, 영리한 먼지, 똑똑한 군중, 넷워 등, 우리로 하여금 생명-다양체 관계를 생각하도록 요청하는 동물 모음집이 있다.

 

생명은 X이다

생물학의 철학의 중요한 의문은 생명의 본질, '생명 원리'와 관련되어 있다. 생명은 X―X가 공교롭게도 형상이든, 메커니즘이든, 생명력이든, 선택이든, 암호이든 간에―이다. 전후 시대 동안 유전학자들에 의해 고무된 '생명 자체'라는 개념은(유전자 '코딩 문제') <<영혼에 관하여>>뿐 아니라 자신의 '생물학적' 저작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표명된 개념의 갱신이었다. '생명 자체'라는 바로 그 개념의 함의는 '생명'이 일자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생명은 하나의 것, 본질적으로 하나의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생명은 X이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이 자체의 모순적 본성을 드러낼 때조차도 그 모순은 생명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핵심이다. 일례는 동물 이동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이 동물을 움직이게 하는가?', 즉 그것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 문제는 동물 '전기'와 '감수성'과 '생기력'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열역학을 동물생리학에 응용함으로써 재개되었다. 곧 동물이 열역학의 법칙들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동물을 흐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명력'이 있었다.

 

오늘날 자기조직화와 창발에 관한 연구와 관련하여 비슷한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 의문은 바뀌었지만, 그것의 문제 형식은 동일하다. '단순한 국소적 행위들이 어떻게 복잡한 전체적 유형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자기조직화의 결과들은 영구히 분석될 수 있고(예를 들면, '개미 군체 최적화') 컴퓨터 과학에 응용될 수 있다(예를 들면, 영화의 CG, 통신 라우팅). 그런데 중요한 한 신비주의적 요소가 그것의 핵심에서 산출되는데, 외부의 조정 인자(환경, 유전자, 청사진)가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제어가 있을 수 있는가? 또 다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명 자체', 부재하는 중심. 이런 의미에서 생명은 사유의 법칙들을 좇는다. 그것은 자기동일적이고(살아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을 때까지 계속 살아 있다), 비모순적이며(무언가는 살아 있는 동시에 살아 있지 않을 수가 없다), 배중적이다(무언가는 살아 있거나 아니면 살아 있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며, 생명에는 회색 지대가 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생명'과 '사유'는 공통의 접점을 발견한다. 생명철학은 '생명 자체'의 변증법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그것은, 자연과 문화, 생물학과 기술, 인간과 기계의 양극단들 사이에 영원히 사로잡힌 '생명 자체'라는 개념을 폐기한다. 그 대신에 생명철학은 항상 가로지르고 연결망을 형성하는 개념들―분자적인 것, 다양체, 동물되기, 생명저항...―을 전개한다. 그런데 핵심은 단순히 들뢰즈주의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명하거나 벗어나는 것―정동의 해부, 싹트는 생명, 웨트웨어(wetware), 전(前)생기적 변환, 유기적 부드러운 제어, 추상적 성, 분자적 공격, 지리철학, 그리고 들뢰즈가 '차이/분화의 수리생물학적 체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존재, 시간, 수

생물학의 철학은 인식론적 노력인 반면에, 생명철학은 존재론적 노력이다. 생물학의 철학은 '어느 범주?'라고 묻는 반면에, 생명철학은 '영향을 받고 있는가 또는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생명철학은 끊임없이 존재론들을 만들어내는데, 그것들 가운데 아무것도 최종적이지 않고, 그것들 가운데 아무것도 지속적이지 않다. 일례로서, 아마도 하이데거가 근대성에 대한 철학적 관심을 관심을 규정하는 것으로 지적했던 것―존재 또는 현존재―이 새천년을 견인하는 관심사들 가운데 하나―'생명 자체' 또는 조에(zoe)/비오스(bios) 구별의 문제―로 치환되었다. 우리는 존재, 시간, 그리고 일자에 대한 형이상학적 거대 관심사들에 관해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다. 생명철학은 이런 관심사들의 치환과 변형인데, 존재가 아니라 '생명 자체'의 문제, 우리로 하여금 생기 있는 것에 관한 관념과 생기론을 다시 생각하도록 요청하는 관심사이다. 마찬가지로, 시간에 대한 관심은 변이, 변형, 변화―차이와 반복(차이의 반복과 각 반복의 차이)에 대한 관심이 되었다. 사건, 생성, 그리고 잠재태-현실태 짝에 대한 현대의 관심은 이것의 후속 변양태들이다. 마지막으로 일자의 명령―존재는 일자이고, 시간은 일자이고, 주체는 독특하며, 동일성은 일자의 확인, 심지어 윤리적 사유에서 타자의 기묘한 같음의 확인이다―전체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질문을 제기하도록 요청한다. 일자-다자 이분법을 넘어서 사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수'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에 의해 제기되는 의문이지만, 그것은 이미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 존재한다. 머리카락, 진흙, 그리고 먼지. 일자-다자를 넘어서는 다양체 개념이 있는가? 그런 개념은 '수'에 대한 단순한 비난에 대항할 수 있는가(양 대 질, 외연도 대 강도, 펼침 대 접힘)? 다양체를 관통하는 수 개념(증식하는, 만연하는 수)이 있다면, 그리고 다양체가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면, 영혼-고기-유형이라는 생물학의 철학의 삼위에서 벗어날 살아 있는 수―생기론적 수―가 있는가? 바디우가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 닫힌 것과 열린 것, '수와 동물' 사이의 분리라고 부르는 것 대신에 동물 수(animal number)가 있는가? 그러므로 존재, 시간, 그리고 일자는 "생명 자체", 생성, 그리고 수로 재조합되는데, 이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생기론, 잠재적인 것, 그리고 다양체를 고려하거나 다시 고려하도록 요청한다.

 

생명이 아닌 것

생물학의 철학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때, 그것은 '비(非)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반대 의문을 거의 묻지 않는다. 확실히 죽음은 비생명이다. 그런데 바위, 의자, 구름도 그렇다. 컴퓨터, 점심, 또는 국민국가는 어떠한가? 그것들도 비생명인가? 인형은 어떠한가? 기억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긍정적인 의문에는 비생명이라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분류가 함축되어 있다. 비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보다 더 낫게, 우리는 비생명, 생명이 아닌 것, 살아 있지 않게 되는 것이 되는 생물에 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예비적 예로서 네 가지를 제시한다.

 

1. 집단 지능: '집단 지능'은 현재 '사회적 곤충들'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와 컴퓨터 과학(특히 소프트웨어 알고리듬과 다중행위자 체계들)을 결합하는 학제간 연구 분야를 서술하는 데 사용되는 술어이다. 개별적으로 '멍청한' 곤충들의 집단이 집단적으로 자기조직화하여 먹이를 찾아다니거나 둥지를 세울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단순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나 로봇들이 집단으로 자기조직화하여 복잡한 업무들을 수행한다. 이런 국소적 행위-전체적 유형 접근방식은 전체적 층위에서 '지적인' 또는 의도적인 행동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런데 또한 우리는 '집단 지능'이라는 술어를 의문시하고 용도 변경할 수 있는데, 이런 사유의 경향은 조직과 질서의 보증이 될 더 높은 층위의 통일성을 항상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초유기체' 또는 '집단 정신'이라고 부르자. 그것의 함의는 의도적인 활동이 다자로서의 다자가 일자에 관한 갱신된 개념에 복속되는, 모든 집단 현상을 메타개체화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행위는 개체화 이후에 와야 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그렇지만 곤충 집단들과 다른 동물 집단들(패거리, 무리, 떼)과 관련된 독특한 것은 그저 지도자가 없다는 점이 아니라, 전적으로 분산된 제어와 비슷한 것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곤충 사회들의 정치적 역설은 이렇다. 제어와 창발, 주권다양성 사이의 이런 균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집단 지능 분야의 역설적 의문은 이렇다. 그것은 코드화될 수 있는가? 사실상 우리는 분산된 제어를 제작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능력이 집단 지능을 식별하는 데 제한되어 있고 그것을 제정하는 데는 무력한 수동적인 관찰자 층위에 묶여 있는가? 집단 지능을 정치적 개념으로 만들기 위해 행위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집단 지능이 존재한다면, 그 '지능'은 확실히 좌절감을 줄 정도로 익명적인 비인간형상주의적 지능, '하나의 생명'의 지능이어야 할 것이다.

 

2. 머리 없는 동물성: 생물학의 철학은 생명의 통일성('생명은 X이다')에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은 이 통일성을 개별적 유기체에 결부시킨다. 자연사의 분류에서든, 다윈적 종화에서든, 유전체 연구에서든 간에, 생물학은 항상 개체에서 시작한다. 개체가 출발점, 기본적인 연구 단위이다. 이런 모든 층위들에 걸쳐서 유기체가 여전히 중심적이다. 유기체들은 종을 형성할 뿐 아니라, 또한 그것들은 분자들과 세포들로 구성된다. 유기체들이 미시적 생명관과 거시적 생명관 사이의 이상적인 중개 지점이다. 그러므로 개별적 유기체들의 비교를 바탕으로 인간을 동물 위에 올리는 철학을 발견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홉스, 로크가 그렇다. 개별적 유기체는 인간이 동물, 야수, 야생 위에 올라서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다. 이것은 특히 집단과 관련될 때 그렇다. 여기서 곤충들이 특권적인 사례 연구, 비인간의 범형적 사례일 것이다. 사실상 정치 사상은 바로 이 점에 관해 인간과 곤충을 흔히 대조해왔다. 홉스는, 인간과 곤충 둘 다가 '사회적'이지만, 인간만이 주권자를 확립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곤충들도 생산하고 제작할 수 있지만, 인간들은 제작하기 전에 추상하고 계획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집단들도 개체들이다. 집단은 그것에 앞서 존재하는 개체들로 구성되며, 집단 자체는 메타개체를 형성한다('종', '인종'), 그런데 외재적 집단 동물들, 패거리, 무리, 떼라는 다양체 동물들도 존재한다. 그렇다. 무리는 개별적 곤충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무리, 패거리 등이 사실상 유기체의 반전들이라면 어쩔 것인가? 그것들이 다자가 일자에 앞서 존재하는 사례들이라면 어쩔 것인가? 병정개미 한 무리가 그것에 대한 형태발생적 측면을 갖는다. 무리 전위, 야영지, 그리고 갈라지는 행도들이 있다. 그런데 무리, 패거리, 떼, 집단도 바로 무형태성과 무형상성에 의해 규정된다. 그것들은 '얼굴' 외에는 그 어떤 '머리'도 없다. 그것들은 머리 없는 동물들, 지도자가 없는 동물성이다. 그것들은 머리나 꼬리가 없는, 다감각적, 다정동적, '무정형적이지만 조정된' 동물성이다.

 

3. 분자적 분자들: 애초에 우리는 분자들이 '분자적'이지 않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것이 터무니없게 들릴지라도, 분자를 전체적 일단의 합성과 분석 단위들의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기체, 기관, 조직, 세포, 분자. 각 생명과학은 명사(해부학, 생물학)일 뿐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 분석되고 합성되는 동사('해부하기', '생물화하기')이기도 하다. 합성의 최소 단위는 무엇인가? 또한 이것은 분석의 최초 단위이다. 구성하기, 분해하기. 개체화 과정이, '생명의 구성 요소들'에 관한 것이든, '생명의 암호'에 관한 것이든 간에, 생명에 관해 사유하는 데 중요하다. 생물학에는 항상 '십의 제곱들', 개체들을 계층화하는 거대한 존재론적 현미경('DNA는 RNA를 만들고, RNA는 단백질을 만들며, 단백질은 우리를 만든다'라는 분자유전학의 주문)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척도, 또는 계층, 또는 층위화와 아무 관계도 없다면 어쩔 것인가? '바로 그' 분자들(단백질이나 핵산들)에 대한 탐색의 중요성을 무화시키고, 그 대신에 분자들의 관계성, 분자들의 연결망 동력학,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분자들의 일시적인 존재(생명복잡성)에 집중하는 분자생물학의 전적으로 잊혀진 역사가 있다. 한편으로 생물학은 분자들이 구성되고 분해된다(어떤 단백질들은 분자들을 분해하고, 다른 단백질들은 분자들을 구성한다)고 말해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미생물들에 대한 피상적 관찰은 분자들의 본원적 수평성―공생 박테리아, 감염 바이러스, 그리고 미생물들 사이의 수평적 유전자 전달―을 보여준다. 전염병은 분자적이지만, 또한 그것은 사회적, 기술적, 경제적, 정치적이다. 그렇다. 전염의 연결망들이지만, 또한 감염, 수송, 접종, 위생, 감시의 연결망들이다. 연결망들의 이런 압축, 이런 위상공간적 심화는 분자들의 결과가 아니지만, '분자적'이다. 척도(미시 대 거시)와 아무 관련도 없지만, 국소적이면서 전체적인 미생물적 생명. 유전자 표현, 세포 대사, 그리고 세포막 신호 전달이라는 공통적인 생물학적 과정들도 일상적으로 연결과 관계들(미생물-동물-인간)을 만들어내거나, 또는 오히려 조립체들을 통한 일의성을 만들어낸다.

 

4. 생명과 비슷한 죽음: 우리는 새로운 기술들이 "생명과 비슷한" 방식들에 관해 흥분하여 말하는데, 그것들은 기술―생명이 없는 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흉내내는 특질이나 행동들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생명과 비슷한 것이 표상의 범주('타원형 초상화'의 생명과 비슷한 성질)인지, 수행의 범주('장막 뒤의 사람은 신경쓰지 마라')인지, 아니면 흉내내기의 범주('무엇이 실재적인가, 네오?)인지는 결코 명료하지 않다. 우리 자신의 강박은 생명과 비슷한 것을 끊임없이 욕망하면서도 그것에 관해 걱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화기들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바라지만, 그것들이 바른 말을 할 때에만 그렇다. 대중문화에서 과학소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형상을 한 기술적 생명체―인간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기술과 생명의 융합체―를 만들어내는 줄거리들을 반복적으로 연출한다. 생명과 비슷한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접근방식은 결코 생명이나 기술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죽음의 생명성일 것이다. 사실상 생명과 비슷한 것들의 귀신학 전체가 고려되어야 한다. 대중문화에서 호러 장르는 생명과 비슷한 죽음에 관한 많은 예들―좀비(살아 있는 죽은 자), 뱀파이어(죽지 않은 자), 환영(탈육화된 정신), 그리고 악마(홀린 생명)―을 제공한다. 이것은 사라지는, 스스로를 넘어서는, 스스로를 흥분시키는 생명의 생명성이다. 생명과 비슷한 죽음의 이런 모습들에 흔히 무섭게도 양가적인 행위자들―살아 있는 죽은 자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 뱀파이어의 '나쁜 피', 내 기억을 지배하는 환영,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악마적 분리―이 내재하는 것은 틀림 없다. 생명과 비슷한 죽음은 우리의 지적 기계들의 축하할 만한 생명성이 아니라, 살고 있지 말아야 하는 생명체, 부정한 생명체를 향한 양가적 태도이다. 이런 생명과 비슷한 죽음은 열이 없는 생명―걸어다니는 죽은 자, 가장 저급한 동물들(박쥐, 쥐)이기도 한 불멸의 존재자, 물질화된 정신, 인식할 수 없게 왜곡된 친숙한 얼굴―이다. 결국 이것에는 기술과학적 측면이 있을 것이다. 생명과 비슷한 죽음의 한계 사례는 유기적인 것이 무기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비물질적인 것과 더 이상 구별될 수 없는 지점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나노기술의 영역, 무기적 생명이라는 관념, 프로그램이 가능한 물질, 발견되지 않은 '신비한 매질'이다.

 

오래된 생명(또는 크툴루의 생물학)

'21세기를 위한 생명철학'은 애매한 진술이다. 생명철학은 정보 연결망, 생명공학, 나노기술, 또는 지능형 소프트웨어로 시작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유가 생명철학적 사유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불(동일성 속의 무형상성), 흐름(강으로 들어가는 것) , 그리고 육체(성장과 쇠퇴를 통한 안정성)라는 세 가지 예에서 무기적 생명을 언급한다. 모두에 대한 공통의 로고스는 변화이다. 그의 대립자―그러나 여러가지 면에서 그의 보완자―는 파르메니데스인데, 모두가 하나라는 그의 개념은 다양체를 일의성에 대한 또 하나의 형식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리스 원자론자들, 무한히 조밀하고 활동적인 입자들이 있다...

 

즉각적으로 반대 주장이 제기된다. '생명이 단지 생물학적 생명이고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생명은 아닌 것처럼 우리의 생명 개념에 있어서 우리는 환원적이지 않는가?' 사실상, 생물학적이고 생명의학적 생명이 우리의 '생명정치적' 신흥 체제들의 토대가 되어버린 방식이 문제가 아닌가? 이런 '벌거벗은 생명'이 사회정치적 생명의 알파와 오메가로서 역할을 담당하며, '인구'의 안전을 보호함과 동시에 '벌거벗은 생명'이 공격받고 있으면서 선제 공격의 대상이 되는 예외 상태, 긴급 상태를 만들어낸다. 확실하다. 이것이 분과학문들 사이의 체스 경기 안에서 생명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우리 능력을 차단한다는 점은 제외하고. '생명이란 유전자 암호'라고 말하는 과학자에게 '생명이란 유전학의 특이한 실행"이라고 말하는 사회학자가 있다. '생명이란 물질과 에너지의 자기조직화'라고 말하는 물리학자에게 정치학자는'생명이란 자연 자원을 도구화하기 위한 인간 집단들 사이의 투쟁'이라고 말한다. '생명이란 우리가 은유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는 은유들의 집합'이라고 말하는 인문학 교수에게 '프로그램이 가능한 물질'과 '영리한 먼지'를 설계하는 공학자가 있다. 가끔 괴물들을 만들어내는 상승 작용적 결합, 잡음이 섞인 혼선이 있다. 1980년대에는 혼돈에 관한 이야기가, 1990년대에는 복잡성에 관한 이야기가, 그리고 새천년 무렵에는 연결망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계속된다. 우리는 분과학문들을 없애 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제3의 문화'에 관한 모든 이야기에 대해 우리는 가장 통속적인 일상적 사례들에서 여전히 두 문화를 발견한다.

 

이것은 선언문이 아니다. 그래도, 생명철학에 관하여 다루어야 할 잘못된 개념들이 많이 있다. 생명철학은 '생명'에 대한 소박한 옹호, 지구의 모든 생명의 이타주의적 전일론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생명철학은 생물학의 철학의 두 가지 방법(생명의 원리, 분절화의 경계들)과 이것으로부터 산출되는 분리들에 대한 엄밀한 의문 제기이다. 생명철학은 항상 이렇게 묻는다. '그렇고 그런 분리에서, 그렇고 그런 분류에서 어떤 관계들이 배제되는가?' 생명철학은 자기조직화, 창발, 또는 복잡성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이름에 불과한 것이 결코 아니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이 점에 관해 철학과 생물학 사이의 유익한 교류가 있는 반면에, 복잡성의 과학이 존재론적으로 사유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사유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흔히 복잡성의 과학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초상(비선형적이고 준안정적이며 복잡한 자연)을 만들어내거나, 또는 더 나쁘게도, 모든 비자연적 요소들을 이 새로운 자연 아래 포섭한다(그러므로 자유시장 그리고/또는 '민주주의'가 자기조직적이며 그래서 불가피하다). 모든 것이 생명철학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생명철학의 주요 관심사들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생물학의 토대주의와 생명에 대한 생물학적-생명의학적 규정들이다. 생명철학은 결코 신생기론이 아니며, 생명의 서술의 형언 불가능성과 비환원성을 지지하는 논변을 전개한다. 그런데 이것이 생명철학의 가장 절망적이고 양가적인 측면일 것이다. 생명철학은 정치적 존재론을 도출하려는 시도이며, 그럼에도 또한 그것은 정치적으로 불가지론적이고 심지어 무감각하다. 생명철학에는 르상티망이 전혀 없으며, 이런 '분자적 규모의' 시각을 수반하는 '활기찬 정치'에 대한 헌신이 있을 뿐이다. 생명철학은 생물학의 철학에 의해 배제된 존재론적 의문들을 포착하여 소생시킨다. 왜 '생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