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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크리츨리: 오늘의 인용-무한하게 요구하는 무정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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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 [Seferin James]: 당신이 제시하는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당신은 하이데거의 정치학이 그의 철학에 드리워져 있다는 의문에서 시작합니다. 이것 덕분에 당신은 레비나스를 거쳐 하이데거적 사유 전통에 이르기까지 입수할 수 있는 윤리적 자원을 고려하는 당신의 박사학위 논문 <<해체의 윤리(The Ethics of Deconstruction)>>를 적게 됩니다. 그 다음에 당신의 최근 저작 <<무한하게 요구하기(Infinitely Demanding)>>에서 당신은 파시즘에 대한 의문에 의해 고무된 이 궤적을 일종의 평화주의적 무정부주의를 향해 지속하는 듯 보입니다.

 

SC [Simon Critchley]: 여기서 약간의 배경은 저의 정치적 궤적이 지난 십 년 또는 십오 년 사이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는 점입니다. 상당한 정도로, 이것은 외부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과 더불어 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에 의존했습니다. <<무한하게 요구하기>>에서 당신이 발견하는 것은 제가 가지고 있었던 일단의 만남들 전체―사람들이 마르크스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던 2000년과 2001년의 강독 모임들―에서 생겨난 마르크스와의 관계를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관심이 있는 것에 암묵적인 신뢰를 품었습니다. 저는 대학원생들이 말하고 읽는 것에 매우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르크스 강독은 실제로 제가 마르크스와 가졌던 장기적인 관계에서 생겨났지만, 또한 긴박감―마르크스로 돌아가서 그의 사유가 어떤 자원을 지녔는지 그리고 어떤 자원을 지니고 있지 않는지를 다루어야 한다는 긴박감―에서 생겨났습니다. 정치경제학 비판은 서술적으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적절하고 흥미로운―특히 <<자본>> 3권에서 신용에 관한 마르크스의 진술들은 엄청나게 예지적입니다―반면에, 마르크스에 있어서 정치적 행위자와 정치적 주체에 관한 쟁점은 제게 항상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같은 사람의 영향을 받고 시작되었는데, 라클라우는 세계의 상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수용하려고 노력한 다음에 그람시를 사용함으로써 마르크스에 있어서 정치적 주체성과 집단 의지 형성의 본질에 관해 다시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람시는 항상 제게 대단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항상 가장 지적이고 분별 있는 마르크스주의자인 듯 보였습니다.

 

SJ: <<무한하게 요구하기>>에서 당신은 여전히 헤게모니라는 개념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SC: 그렇습니다. 저는 정치란 헤게모니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정치는 집단 의지 또는 공통 감각의 형성, 라클라우가 등가물들의 연쇄라고 부를 것의 형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당신은 공통의 투쟁을 둘러싸고 선에 대한 매우 다른 관념들을 지닌 상이한 이익 집단들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가치중립적인 진술입니다. 그것은 좌파만큼이나 우파에 대해서도 참입니다. 사실상 더 참입니다. 미합중국에 오바마가 등장하기 전에, 정치에서 그 기법을 특별히 잘 사용하고 있던 것은 우파였습니다. 제게는 헤게모니가 그야말로 정치의 논리입니다.

 

무정부주의를 향한 이동은 어떤 형식들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점점 커지는 좌절감이었을 뿐입니다. 제게는 1999년 11월에 벌어졌던 시애틀 시위와 함께 미디어에 나타나는 정치적 전개가 무정부주의라는 관념으로 가장 잘 포착되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활동가 집단들과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정부주의의 본질에 관해 다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문제였습니다. 이것 덕분에 저는 <<무한하게 요구하기>>―바로 첫번째 발표가 되는 책―에서 당신이 발견하는 입장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저는 항상 마르크스에 대한 바쿠닌의 비판에 매우 공감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은밀한 비스마르크주의자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은 국가 형식의 은밀한 애호가들이고 그들은 새로운 형태들의 권위를 갈망합니다. 무정부주의적 전통은 그것에 대해 항상 주변부적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슬라브 국가들과 라틴 국가들에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위대한 무정부주의 사상가들은 러시아인들과 이탈리아인들입니다. 학문적으로, 강단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항상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 작동하는데, 그것의 본질을 논의할 수 있는 정교한 이론―마르크스주의적 이론과 그 이론이 발달과 맺는 관계―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읽어야 될 일련의 매우 어려운 책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세미나에서 잘 작동합니다.

 

SJ: 그것은 끊임없이 적용될 수 있고 상당히 미묘한 차이가 있는 이런 응용들에서 논의될 수 있는 분석 모형을 제공합니다.

 

SC: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이론화하기 쉬운 반면에, 무정부주의는 항상 이론화에 대해 의심을 나타냈습니다. 그것은 바쿠닌-마르크스 관계까지 거슬러 올라 갑니다. 바쿠닌은 결코 진정으로 편하게 지내지 못합니다. 그의 글쓰기―편지와 가끔의 텍스트들―는 개입입니다. 마르크스가 산출한 그런 종류의 이론적 대작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많은 무정부주의자 집단들 사이에는 자신들의 활동이나 실천을 이론화하기를 꺼리는 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경우에, 실천이 핵심이고 이론화는 그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 때문에 강단에 무정부주의자들이 더 적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정부주의는 상호부조, 협동, 직접민주주의의 이념 등에 바탕을 둔 정치 이론이라는 의미에서 맥락적 담론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강단화된 마르크스주의의 형식들보다 제가 현재 작업하고 있는 이런 맥락에서 본질적으로 훨씬 더 그럴듯합니다. 암묵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인 소규모 공동체, 일반적으로 종교적 공동체들에 관한 관념들을 둘러싼 미국의 정치적 담론과 종교적 담론 안에는 어떤 자의식이 있습니다. 무정부주의는 작동합니다. 여기서 그것은 더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또한 그것은 활동가 집단들이 실제로 기능하는 방식에 더 가깝습니다. 흔히 이해관계가 매우 다른, 흔히 단일한 쟁점으로 연결되는, 또는 흔히 종교적 책무로 연결되는 이질적인 다양한 활동가 집단들의 견지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제게 무정부주의의 핵심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우처럼, 일단의 신학적 계명이 아니라, 실천에 대한 일단의 윤리적 관심사입니다.

 

SJ: 저는 더 넓은 무정부주의 전통에 대한 당신의 관계를 논의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무한하게 요구하기>>에서 당신이 관심을 갖는 윤리적 요구가 우리를 개체주의에서 떼어내어 사회에 대한 더 상호부조적인 경험을 향해 끌고 가기 때문에 당신은 스스로를 일종의 상호부조주의자로 간주할 수 있습니까?

 

SC: 그렇습니다. 제가 상호부조주의자로 묘사되어 기쁩니다. 최근에 제가 계속 행하고 있는 작업은 신비주의적 무정부주의에 관한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제게 이 주제는 기묘한 새로운 출발점이지만, 저의 암묵적인 편견 또는 가정은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사악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환경에서 인간들―그리고 그들은 올바른 환경에 처해 있지 않습니다―은, 할 수 있다면, 협동적으로 그리고 신뢰에 바탕을 두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막는 것은 국가의 법률, 관료지배 체제 등입니다. 저는 인간의 사악함을 자연적 사실이라기보다 사회역사적 산물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원죄의 중요성 그리고 원죄와 정치 사이의 관계로 되돌아 갑니다. 제게는 모든 형태들의 권위주의가 원죄에 관한 어떤 관념에 의존하는 듯 보입니다. 본질적인 인간의 결함에 관한 어떤 관념을 믿고 있다면, 교회, 국가 등의 제도를 통해서 그 결함을 교정하는 한 방식으로서 어떤 형태의 권위주의를 향해 이끌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암묵적으로 상호부조주의자입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현재 시점에 무엇이 가능한가? 저는 그것에 관한 다른 견해를 얻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많든 적든 국가 형식에 묶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것에 묶여 있는 것은 유감이지만, 저는 예견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해 그것에 묶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정부주의는 연방주의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것은 연방주의적 정치와 관련된 것입니다. 저는 유럽연합이 국민국가에 대한 신념을 버리겠다고 결정한다면 유럽연합은 급진적인 형태의 연방주의로 개종할 것이라고 상상할 때가 있습니다. 경제가 매우 극적인 방식으로 지역적인 것들로 복귀할, 도시, 마을 등의 연방에 바탕을 둔 본원적으로 탈중심화된 유럽 지역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

SJ: 무정부 체제에 대한 레비나스적 이해의 핵심적인 측면들 가운데 하나는 개체적 자율의 극복입니다. 당신이 세력들, 그리고 국가의 조작들에 의해 개체화되는, 감시가 흔히 개체적 감시인 정치적 상황의 맥락에서 개체적 자율의 종말―많은 층위들에서 꽤 그럴듯한―을 이론적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개체화가 그야말로 거부되는 것의 일부가 되지 않습니까?

 

SC: 좋은 질문입니다. <<무한하게 요구하기>>에서, 그리고 후속적으로 그 주제를 둘러싸고 수행한 작업에서 제가 제기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점은 자유라는 관념, 개체적 자유라는 인간주의적 관념에 바탕을 둔 무정부주의라는 관념을 책임의 무정부주의로 대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해방에 대한 요구보다도 악행에 대한 식별에 바탕을 둔 무정부적 형태의 시위 조직―반전 시위 또는 반지구화 시위 같은―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악행과 관련된 분노. 그것은 무정부주의의 핵심이 자유라는 관념이라기보다 책임이라는 관념이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제 친구이자 직접 행동이라는 쟁점에 관해 뛰어난 데이비드 그레이버 같은 사람의 글을 읽으면, 그는 자유와 자율에 관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단순한 관념을 얻었습니다. 레비나스적 차원은 무정부주의가 관련되어 있는 것은 책임, 무한한 책임의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자율, 자율에 관한 어떤 모형에 반대하는 제 논변이 관련되어 있는 것은 양심이라는 관념입니다. 제 어법으로, 디비쥬얼(dividual, 나눌 수 있는 것)이 양심이 한 개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조직하고 해체하는 방식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그리고 이것이 데리다와 레비나스와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을 점입니다―저는 개체적 자율를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문제가 되고 있는 타율의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급진화하려고, 그것을 심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레비나스적이자 데리다적인 주체는 그것 이전의 개체주의적인 자율적 선행자보다 더 책임성이 있으며, 그리고 자율은 포기하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이른바, 악화되고, 급진화됩니다. 레비나스 같은 사상가들에는 무정부주의자 집단들에게 매우 유용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SJ: 당신은 무한한 요구에 관한 이런 윤리적 경험이 무한한 헌신과 양심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무한한 책임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한한 요구라는 이 관념과 관련하여 양심의 경험에 관해 부연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한한 요구는 잘못된 것에 맞서, 사회의 부정의에 맞서 행동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것은 지독하게 윤리적이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포함할 수 있습니까? 당신의 행동들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서, 당신은 그것들이 윤리적인지 비윤리적인지에 상관없이 그것들의 무게를 감당해야 합니까?

 

SC: 무엇을 의미하십니까? 글쎄요, 그렇습니다. 절대적으로. 당신은 두 가지 모두의 방식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무한한 요구, 논변이 조직되는 방식은 현대 자유민주주의에는 동기 부족이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이 부족이 주체성의 층위에서 보완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윤리적 요구는 제가 대면하는 특수한 다른 사람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제게 가하는 요구는 제가 충족시킬 수 없는 요구입니다. 그것이 기본적인 직관입니다.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은 마비가 아니라 세계 속 활동에 대한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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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먼 크리츨리(Simon Critchley) 인터뷰 모음집, <<불가능한 객체들(Impossible Objects)>>(2011), pp. 6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