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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크리츨리: 오늘의 인용-정치는 국가 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헤게모니적 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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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더스드룀(CC): 당신은 오늘날 정치에 대한 일반적 반응은 세계로부터의 수동적 물러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당신은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거나 진단하고 싶습니까?

 

사이먼 크리츨리(SC): 저는 현재 상황에 관해 생각하기 위한 최소한 세 가지의 정치적 범주가 있습니다. 군사적 신자유주의, 신레닌주의, 그리고 신무정부주의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저는 군사적 신자유주의가 서양 세계의 상태를 가장 잘 특징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범주의 핵심에는 민주주의와 인권 담론의 어떤 보편화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통일이라는 이념이 있습니다. 이 이념은 궁극적으로 군사력으로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다른 체제들이 자본주의의 논리,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수용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 체제들이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폭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군사적 신자유주의의 논리입니다. 세계는 영구적인 전쟁 상태, 혼돈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듯이, "피가 샴페인처럼 기분 좋게 흘러 넘치고 있는", 자체를 산산조각내고 있는 세계에 직면하여, 물러서서 스스로를 섬으로 만들고, 눈을 감으며, 나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는 척하는 것은 유혹적입니다. 이런 반응―그럴듯하고 정합적이지만, 제가 거부하고 싶은―이 제가 수동적 허무주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CC: 그러나 정반대의 반응―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의무적으로 선거에 참여하는 것,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현하는 것―도 거리를 두는 한 가지 방식일 수 있지 않습니까? 최소한 이것은 지젝이 자신의 책 <<폭력에 관하여>>에서 주장하는 듯 보이는 것입니다. 때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여러분이 할 수 있을 가장 난폭한 것이다."

 

SC: 여기서 저는 결코 지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의 논변은, 체계적 폭력―상징적 폭력뿐 아니라 실제적 폭력―에 의해 규정되는 세계에서는 뒤로 물러서서 성찰하며 기다릴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 경우에, 이것은 강박 신경증적 입장이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저는 지젝을 [...] "슬로베니아의 햄릿"이라고 부릅니다. 햄릿은 폭력에 의해 규정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데, 여기서는 세상이 어지럽고, 자신의 아버지가 부당하게 살해당하며, 왕과 사회적 위계의 질서가 붕괴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햄릿은 행동할 수 없습니다. 용기가 부족한 그는 복수 행위를 꿈꾸며,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지젝에게서도 행동의 직접성에 대한 이런 공포를 발견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모자가 있지만 토끼가 없다."  저는 그 진단을 이해할 수 있지만, 저는 그것이 순전히 비관주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고려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 저항 형식들―상상력이 풍부한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해서 행동을 시도하는 저항 형식들―입니다. 이것이 신무정부주의―새로운 연합 형식들, 등가성의 새로운 연쇄들의 가능성의 표명으로서―가 필요하게 되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지젝과 달리, 저는 저항과 시위의 반자본주의 운동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CC: 이 논의 덕분에 우리는 당신의 작업에 대한 지젝의 주요한 비판인 듯 보이는 것에 이르게 됩니다. 지젝은 당신이 옹호하는 저항 형식들, 국가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저항 형식들은 소용이 없다고 비판합니다.

 

SC: 그렇습니다. 지젝이 저에 맞서 제시하는 논변은 이런 요구들이 무력하다―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저항 형식들은 무력합니다. 심지어 정치적 저항의 역사는 하나의 긴 실패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68년 파리의 학생 시위는 실패였습니다. 5월에 사건이 발생했는데, 1968년 6월 23일에 이미 드골이 선출되어 권좌에 복귀합니다. 그리고 실패들의 목록은 이어집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저항의 효과가 흔히 회고적으로 경험된다는 점입니다. 저는 정치적 저항을 국가라는 영토 내의 정치적 권력의 층위에 있어서 유효성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망상, 레닌주의적 망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논변은 그야말로 국가 권력 대 무(無)권력의 논변입니다. 지젝의 경우에, 저항은 소용 없습니다. 저항은 항복입니다. 우리는 국가라는 영토를 장악해야 하는데, 이것 또한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이 제시하는 논변입니다. 이것은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레닌의 비판입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비현실적이고 부르주아적이다. 그들은 용기와 냉혹함이 부족하여 정치적 현실의 잔혹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레닌에 따르면, 해야만 하는 것은 국가가 궁극적으로 소멸되도록 국가를 장악하는 것입니다. 명백한 역사적 반대 사실은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 대신에, 볼셰비키 혁명은 소비에트 연합이라는 형식으로 국가의 가장 기괴한 격상과 인간적 재난들을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지젝과 저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그야말로 레닌과 무정부주의 사이, 또는 마르크스와 바쿠닌 사이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70년대에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에서 바쿠닌은 마르크스를 은밀한 비스마르크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마르크스가 어떤 대가을 치르더라도 은밀히 바라는 것은 국가 권력이라고 말합니다. 레닌과 지젝에 맞서, 저는 권력을 장악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단순히 판단될 수 없는,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틈새 거리의 헤게모니적 표명으로서의 정치를 옹호하는 논변을 전개합니다. 그리고 다른 쟁점―자본주의가 지속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저는 지젝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것을 인정합니다만, 훨씬 더 의기 소침한 상태로 그렇습니다. 현재의 전지구적 경제 위기로 어떤 자본주의 모형이 끝나고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는 종말의 시작을 겪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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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먼 크리츨리(Simon Critchley) 인터뷰 모음집, <<불가능한 객체들(Impossible Objects)>>(2011), pp. 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