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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임 라트카우: 오늘의 인용-환경사의 눈가리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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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환경 운동 덕분에 옛 역사가들은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었던 일련의 주제들에 관해서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시대를 의식하는 환경사도 나름대로 눈가리개를 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눈가리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상당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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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운동에 역사의식이 부족한 것은 환경 운동이 그들의 진짜 전사(前事)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환경 문제와 그를 막기 위한 전략들이 20세기에 이르러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에는 농지에 비료를 과도하게 주는 것이 환경 오염의 주된 원인이지만, 지난 수천 년 동안은 오히려 비료의 부족이 인간에게 가장 민감한 환경 문제였다. 오늘날의 문제가 과거의 문제를 올바로 바라볼 수 없도록 시야를 흐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지구의 광범위한 지역에서는 사적 경제의 이기주의가 무분별하게 날뛰며 파괴적 결과들을 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안정적인 소유권이나 상속권이 토지와 과실수를 보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현재의 상황 때문에 과거를 올바로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

 

현재의 상황이 야기하는 눈가리개들은 이밖에도 더 있다. 피임 기구들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성적 욕구의 조절이 인간 본성에 대한 강제적이며 신경질적인 억압으로 여겨지지만, 과거의 상황에서는 인구 증가를 막아 주는 제동 장치로 인간과 환경의 조화를 촉진할 수 있었다. [...]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게으름의 법칙으로 오늘날 게으름은 환경에 대한 무책임한 행동을 야기하기 일쑤지만, 나무를 자르고 운반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던 시대에는 최상의 환경 보호자였다. 오늘날의 환경 의식에 기반한 이상주의적 사고에 고착된 역사가들은 과거의 환졍 보존적인 일상적 행동 유형들을 인식할 수 없다. [...] 과거 '제로 성장'의 세계, 절약과 영원한 순환의 세계는 오늘날 '자연과의 조화'란 개념이 펼치는 친절한 세계가 아니었던 적이 너무도 많다. [...]

 

환경사의 또 다른 걸림돌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을 중심에 두고, 인간적인 관심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는 역사를 욕구하는 환경 원리주의자들이다. 이런 역사가들에게는 자연 자원과 타협점을 찾으려는 수천 년에 걸친 인간의 노력이 방해물이거나 자연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끝없는 시도로만 보인다. [...]

 

[...]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난 환경사 대 인간 중심주의적 환경사'라는 이름의 전선에서는 거짓된 싸움만이 벌어지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다. 원전 비평을 무시하지 않는 한, 역사가는 언제나 문헌을 통해 문헌을 생산하고 전승했던 이들의 관심사와 시야를 깨달을 수 있다. 게다가 '손대지 않은 자연'이란 이상은 처녀성 숭배가 낳은 환상일 뿐이다. 객관적인 환경사는 인간이 순수한 자연을 훼손한 방식을 다룰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다양한 결합들에서 나타나는 조직 과정 및 자체 조직 과정, 그리고 탈구성 과정을 다루어야 한다. '자연에 적응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널리 쓰이는 이 개념 또한 자연을 주어진 것, 영원히 변치 않는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하게 내재되어 있다. 인간 환경 의식의 역사는 자연의 권리에 대한 의식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위기 경험을 통해 형성된 역사, 장기적으로 인간의 삶과 문화의 자연적 근간에 대한 의식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

 

[...] 환경사에서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란 개념은 인간에 의해 형성된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무시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환경 원리주의자들은 파리 한 마리도 해치지 못할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철학은 종국적으로 인류의 90퍼센트가 사라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므로 그들의 철학에 대해 갖는 불쾌감은 근거가 충분하다.

 

[...] 환경 원리주의의 핵심은 문화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서는 손대지 않은 자연, 여유 공간, 빈 공간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아닐까? "지구의 모든 곳이 구석구석 인간의 손으로 파헤져진다는 것은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어쩐지 섬뜩해지는 상상"이라고 리흘(Riehl)이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합리적인 의미에서도 옳은 지적이다.

 

[...] 올바른 환경사는 인간과 인간의 작업을 다루어야 할 뿐만 아니라 양과 낙타, 습지와 휴경지도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자연이 독자적인 삶을 가지고 있으며, 결코 인간 행동의 구성 요소나 인간들이 행하는 담론의 인용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환경사는 자연의 연관 관계들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영향을 미친 결과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환경 연구가 생태 담론의 영향으로 매우 특별한 것이 되면서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감각을 소홀히 한다면, 오히려 그 때문에도 발목이 잡힐 수 있다. 두엄 더미와 분뇨 웅덩이는 현실적인 환경사의 중요 주제이다. [...] 머리를 과도하게 중시하는 환경사는 중요한 것은 허리 아래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또 사회 과학자들이 즐겨 비난하는 '생물학주의'를 지나치게 두려워해도 생각에 눈가리개를 씌울 수 있다. 인간과 환경 간의 일차적이며 근본적인 연관 관계는 인간이 생물학적 유기체라는 사실로부터 생겨난다.

 

[...] 외적 자연과 인간 내의 자연 사이에는 내밀한 연관 관계가 있으며, 인간은 이를 늘 감지해 왔다는 사실이 궁극적으로 환경사의 내적 통일성을 보장해 줄 것이다. '환경 의식'은 그 핵심에 있어서 상당 부분 건강 의식이며 건강 의식으로서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질병은 외적 자연과 내적 자연 사이에 내밀한 연관 관계가 있음을 위기를 통해 늘 새롭게 느끼게 해 준 근본적인 경험들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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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하임 라트카우(Joachim Radkau), <<자연과 권력: 인간과 자연, 갈등과 개입 그리고 화해의 역사>>(이영희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2), pp. 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