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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제이 우드: 큰 의문들-지적 겸손은 어떻게 과학적 통찰을 낳을 수 있는가?

 

 

지적 겸손은 어떻게 과학적 통찰을 낳을 수 있는가?

 

―― W. 제이 우드(W. Jay Wood)

 

"덕 인식론자"로 알려진 철학자들은 지적 생활의 재화―지식, 지혜, 이해 등―는 열린 사고방식, 학습 능력, 그리고 지적 용기 같은 지성적 기질의 성숙한 특성들이 부족하거나 정반대의 악덕들로 특징지워지는 사람들보다 그런 미덕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더 쉽게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나는 "지적 겸손(intellectual humility)"이라는 미덕에 집중하여 그것이 과학적 지식의 탐색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묻는다. 나는 지적으로 겸손한 과학자들이 이 미덕이 부족한 과학자들보다 지식 및 다른 지적 재화를 획득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 지적 겸손은 간접적으로 과학적 통찰을 낳는다. 그것은 우리의 인지 능력을 과도하게 충만하게 하거나 과학적 기법들을 개선시킨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능력과 실천들을 더 효과적인 방식들로 정향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과학자들 자신들을 변화시킨다.

 

겸손은 논란이 많은 술어이다. 겸손을 자신이 실제보다 더 낮게 또는 덜 성취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잘못 서술하는 사상가들도 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겸손으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수술실에 들어가는 외과의사를 지적으로 유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겸손을 자신의 참된 강점과 약점들에 대한 솔직하고 냉정한 평가을 수행하는 능력으로 서술하는 사상가들도 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정직 또는 진실성인데, 이것들은 틀림없이 정직한 자기평가를 방해하는 여러 형식들의 교만을 억제할 수 있는 겸손의 능력의 도움을 받는다.

 

겸손은 교만, 또는 여러 형태의 과도한 자기애―그저 몇 가지만 나열하면, 이기적 야심, 속물근성, 자만, 오만, 건방짐―으로부터 두드러지게 자유로운 사람들을 특징짓는 깊이 닻을 내리고 있는 성향이다. 이것은 흔히 지나친 자기 배려가 지식, 지혜, 또는 타인들의 복지에 대한 더 유덕한 관심에 의해 압도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겸손은 교만의 싹틈을 감지하고 감시하는 데 작동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장 성숙한 형식일지라도, 교만의 유혹을 받을 수 있는 반면에, 겸손은 대립적인 성향들을 극복할 필요가 없다.

 

주목받고자 하는 우리의 일상적 욕망을 억제하는 도덕적 겸손에 대조적으로, 겸손을 지적 겸손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지적 겸손을 비롯한 지적 미덕들은 우리의 지적 노력, 연구, 글쓰기, 학술회의, 그리고 일상적 형식들의 지적 교류에서 가장 명백히 작동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매우 규정적이어서 우리는 지적 재화―지식, 이해, 보증 등―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적 겸손은, 다양한 지적 재화에 대한 추구를 흔히 좌절시키는, 타자들을 지배하려는 온당치 못한 관심, 또는 비판에 대한 과도한 저항 같은 여러 형태의 교만에 대항한다.

 

속물근성과 우월주의는 사유에 실천에 있어서 더 낮은 계급이나 계층의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경시하는 반면에 스스로를 우월한 사람들과 관련시키는 성향을 공유한다. 과학적 연구자들이 무턱대고 자신들의 사유학파, 자신들의 사유 방식을 지지하고 대안들보다 훨씬 더 낫다고 믿어서 부당하게도 다른 관점들, 방법론들, 또는 실천들을 부정할 때 그들은 이런 악덕의 지적 변양태를 드러낸다. 우리는 행동주의 또는 인문주의적 심리학자들의 치료법적 기법들을 깔보는 속물적인 프로이트주의자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때 그들은 프로이트적 실천을 보완하거나 교정할 수도 있는 통찰들을 놓칠 위험을 무릅쓴다. 지적 우월주의의 가장 과도한 형태들 가운데 하나가 과학주의를 낳는데, 과학주의는 물리과학의 경험적, 실험적 방법들만이 참된 지식을 산출한다는 견해로서 여타의 분과학문들은 그저 억견을 교환하게 내버려둔다. 이렇게 해석될 때, 이런 형태의 지적 교만은 지적 재화의 성장에 잠재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과 관념들로부터 단절될 위험을 무릅쓰는 닫힌 사고방식을 강화한다.

 

이데올로기적 우월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세계적으로 저명한 영장류 동물학자 제인 구달(Jane Goodall)은, 자신이 전적으로 무정한 편파적이지 않은 관찰자로서의 과학자라는 지배적인 독단을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때때로 기진맥진하게 하고 위험한, 그리고 삼십 년에 걸친 침팬지들에 대한 자신의 연구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그 자신이 시인한 바에 따르면, 제인 구달은 자신이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바로 그것들을 사랑했다. 그는 침팬지들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들의 신뢰를 계발하는 데 여러 해를 보냈으며, 그리고 그 다음에서야 다른 어느 누구도 관찰하지 못했었던 침팬지의 행동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부분적으로는 그가 자기 당대에 매우 지배적이었던, 무정한 관찰자로서의 과학자라는 통상적인 정통에 저항했기 때문에 그의 지적 성취가 이루어졌다.

 

자만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치 있고 우수한 고등한 의견을 보증되지 않은 채로 형성하도록 재촉하는 교만의 한 형태이다. 자신이 뛰어나다는 과장된 의식으로 괴로워하는 자만에 빠진 과학자가 겸손이 이런 형태의 교만을 막아주는 과학자보다 더 쉽게 비판에 저항할 것이라는 점은 생각하기 쉽다. 범례적으로, 모든 과학적 결과들은 재현되어야 하며, 그리고 훌륭한 과학적 실천을 구성하는 견제와 균형 체계가 빈번하게 이전의 결과들을 교정한다. 논문들은 심사받아야 하고, 데이터는 정확성에 대해 평가받아야 하며, 그리고 실험 결과들은 재현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기교정 규율로서, 비판을 받고 어떤 특수한 이론이나 실천이 불완전하거나 맞지 않다고 인정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 과학에 중추적이다.

 

적절하게 겸손한 과학자들이 자연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자신들의 예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민감하다. 과학철학자 이스라엘 셰플러(Israel Scheffler)는 교정에 대한 이런 개방성을 "놀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부르는데, 지적 겸손은 확실히 이것에 기여한다.

 

이십 세기의 가장 유명한 이론물리학자들 가운데 두 사람은 놀라움에 대한 대조적인 감수성을 제시한다. 아인슈타인의 뛰어난 전기작가 로널드 클라크(Ronald Clark)는 아인슈타인이 우주에 통계학적 우연을 허용하는 우주의 비결정성을 수용하기를 완강하게 거부했다고 서술한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유명하게도 "우주로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의 사례라고 불렀던 견해이다. "아인슈타인은 설득당하기를 거부했다"고 클라크는 서술하며,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이루어진 가장 새로운 발전으로부터 단절된 채로 자신의 경력을 끝냈다. 언젠가 노벨상 수상자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Subramanyan Chandresekhar)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정점에 이르는 나이를 훌쩍 지나서 어떻게 물리학에서 혁신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는지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의 대답은 아인슈타인의 경우와 계몽적인 대조를 이룬다.

 

더 나은 낱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어떤 오만을 개발하는 듯 보인다. 이 사람들은 대단한 성찰들을 품었었고 엄청난 발견들을 이루었었다. 그 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한 분야에서 매우 의기양양하게 성공했다는 사실이 그러므로 틀림없이 옳은, 과학을 바라보는 특별한 방식을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과학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의 기저에 놓여 있는 그런 종류들의 진리는 가장 강력한 정신들도 초월한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보여왔다.

 

자연은 자연의 모든 방식이 단일한 과학자의 시각의 틀 내에서 포착될 수 있다는 거대한 자만을 쫓아낼 방법이 있다. 겸손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이런 교훈에 민감하게 만든다.

 

과학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데, 일반적으로 중요한 지식과 기술적 능숙함을 나누어주는 선임연구자들 밑에서 보내는 장기적인 도제수업 기간 후에 과학자가 된다. 현업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획득한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지식의 저장물의 수혜자들이다. 이 사실과 약간의 겸손은 과도한 자율―우리로 하여금 타자들에 대한 의존을 인정하고 그들로부터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게 하는 일종의 교만―에 맞서 틀림없이 작동할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은 과도한 자율에 동반되는 교육 불가능성과 싸우면서 우리가 지도를 더 잘 수용하게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 겸손은 선임연구자들로 하여금 연구집단의 중요한 구성원일 바로 그 도제들의 훈련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부당하게 집중하도록 재촉할 수 있는 자기중심주의와 싸운다. 지적으로 유덕한 과학자들은 지식을 획득할 뿐 아니라 지식을 나누어주는 데도 관심이 있다.

 

지배는 타인들에 대한, 그리고 확장하여 자신의 환경에 대한 통제의 과도한 수행과 향유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 일종의 교만이다. 지배에 사로잡힌 과학자는 자연을 이해되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라기보다 지배자에 적합하도록 정복되고 사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런 사고방식은, 그것이 유전적으로 능력이 향상된 인간 만들기를 의미하든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기를 의미하든, "행해질 수 있다면, 행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겸손이 가능하게 만드는 통찰은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다. 그것은 과학의 방법들과 과학적 지식의 용도가 도덕적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밝힌다. 악명 높은 나치와 터스키지 실험들도 지식을 산출했지만, 지독한 비용을 치렀다. 원자폭탄이 끔찍하게 사용되는 것을 목격한 후에,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였던 유명한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그 계획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후회하게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어떤 상스러운 것도, 그 어떤 유머도, 그 어떤 과장된 표현도 전적으로 진압할 수 없는 어떤 있는 그대로의 의미에서, 물리학자들은 죄를 알아버렸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상실할 수 없는 지식이다." 겸손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또는 최소한 비용을 전적으로 고려하지는 않은 채, 지식을 추구하려는 파우스트적 유혹에 대항한다.

 

과학적 지배의 정신은 통제, 인간의 지배에 대한 복속, 그리고 자연으로 하여금 자체의 비밀을 드러내도록 강요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반면에, 지적으로 겸손한 과학자들은 자연의 모든 작동에서 나타나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대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우주의 94%가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최근에 발견에 대해서 놀라는 것이 적절한데, 그 발견은 현재 우리의 지각적 파악을 넘어선다. 우리가 한 다중우주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우주의 부분들이 영원히 불가사의하게 남아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사실을 강화한다. 그런데 인간들에 의한 의도적인 무모함이 자연의 미묘한 균형을 뒤집을 수 있다―어떤 경우들에는 돌이킬 수 없게―는 점은 전혀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다. 자연에 대한 존중을 조장함으로써 겸손은 어쩌면 과학자들이 자연과 조화롭게 공존하면서 자연으로부터 배우도록 자극할 것이다. 지배가 아니라 겸손이 미래 세대의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즐길 수 있는 더 거주할 만한 세상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