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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오늘의 인용-과학, 기술과 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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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자면, 고전주의에 심취했지만 여전히 낭만주의의 열정으로 충만한 카르두치에게도 이성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은 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기술의 산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학과 기술이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를 먼저 가려야 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사람들은 기술에서 모든 것을 기대하고 요구한다. 그리고 파괴적인 기술과 생산적인 기술을 구별하려고 하지 않는다. 컴퓨터에서 스타워즈 게임을 하는 아이는 유스타키오관으로부터 확장된 기관처럼 핸드폰을 사용하고, 인터넷으로 채팅을 하며 컴퓨터나 전화가 없는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과학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중 매체는 기술에 과학의 이미지를 뒤섞었다. 그래서 대중이 실제로는 과학의 진정한 측면이 무엇인지 모른 채 과학이 곧 기술이라 믿게 혼동시킨다. 나는 과학에서 기술은 분명히 하나의 응용이자 결과이지, <제일 실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기술은 당신에게 즉시 모든 것을 제공하지만, 과학은 천천히 나아간다. 폴 비릴리오는 우리 시대를 두고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더 정확히 꼬집어 <속력의 최면에 걸린 시대>라고 표현하고 싶다. [...] 오늘날 우리는 콩코드기를 타고 3시간 30분 만에 유럽과 뉴욕을 횡단 가능한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 우리는 간혹 이메일이 빨리 열리지 않거나 비행기가 연착하면 분노가 치밀 정도로 속력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이처럼 기술에 탐닉하는 것은 과학의 실행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과학이 아니라 마술에 영원히 의지하는 것이다.

 

과거에 마술이 무엇이었으며, 가면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오늘날의 마술은 무엇인가? 마술은 중간 과정들을 거치지 않고 한순간에 원인에서 결과로 이동할 수 있다고 믿는 억측이다. 가령 내가 원수의 인형에다 바늘을 꽂으면 그가 죽고, 주문을 읊조리면 고철이 황금으로 변하고, 또 망령들을 불러내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따위다. [...]

 

마술은 원인과 결과의 긴 연결 고리를 무시한다. 특히 원인과 결과 사이에서, 그 관련성이 반복되는지 시험하고 또 시험하는 과정을 설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원시 문명에서부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 현대의 인터넷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신비주의의 무리를 이끄는 마술의 매력이다.

 

마술에 거는 신뢰와 희망은 실험적인 과학의 출현으로도 전혀 풀어지지 않았다. 원인과 결과의 동시성에 대한 열망은 과학의 사생아로 보이는 기술로 이동했다.

 

[...] 기술은 우리가 원인과 결과의 고리를 보는 시각을 잃어버리게 하려고 가능한 모든 것을 한다.

 

[...] 윈도즈는 베이직 언어 역시 자취를 감추게 했으며 사용자는 버튼을 눌러서 이미지를 거꾸로 돌리고, 멀리 있는 사람과 통화를 할 수 있었으며, 천문학적인 계산의 결과들을 얻는다. 하지만 그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그리고 그 무엇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사용자는 마술과 같은 컴퓨터의 기술만을 경험하는 것이다.

[...]

오늘날 대중 매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과학[...]은 오직 그의 마술적인 모습뿐이다. 과학이 노출될 때에는 기적과 같은 기술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간혹 과학자와 대중 매체 사이의 사악한 협약이 존재한다. 이는 과학자가 대중 매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거나 진행 중인 연구를 알리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은 연구 자금을 조성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중 매체에 비친 연구는 중대한 발견인 것처럼 전달되기에, 성과가 금방 드러나지 않으면 실망감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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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초자연적 현상에 관한 믿음을 규제하는 이탈리아 위원회[...]의 기관지에서 실비오 가라티니는 어떤 약을 복용해서 단시간에 회복하는 것은 약효가 발휘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다른 설명이 있다. 빠른 회복은 자연적인 치유로 일어난 것이고 약은 단지 심리적인 효과로만 작용했다는 것과 치유가 먼저 일어나고 약효는 뒤늦게 발휘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능성을 대중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마술의 정신세계는 예측된 원인과 기대하는 결과 사이에서 언제나 확신을 주는 한 단락의 과정만을 보기 때문에 대중은 이 가능성을 믿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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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의학 드라마 「ER(응급실)」[...]에서 그린 박사는 [...] 독감 환자에게 항생제를 처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독감 치료에 항생제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인종 차별을 운운하며 환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환자는 항생제와 치료 사이의 마술적인 관계만을 보왔으며, 대중 매체가 항생제의 효능을 알려 준 것이다. 모든 것은 그 짧은 단락으로 요약되었다. 여기에서 항생제 알약은 기술의 결과물이다. 반면 독감의 원인과 치료에 관한 연구 과정은 대학의 연구실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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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매체를 향해 마술 정신을 버리라고 요구해 봤자 소용없다. 대중 매체는 시청자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원인과 결과에서 마술의 전형을 끌어내도록 강제되었다. [...] 아주 강력한 독감 백신의 연구가 어떻게 시작하고 있는지를 신중하게 설명하는 기사도, <마침내 독감이 정복되었다>[...]는 승리의 소식처럼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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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의 의무는 성실하게 연구에 임하는 것뿐만 아니라 올바른 지식으로 대중을 계몽하는 것이다. 때때로 이탈리아 과학자들은 과학을 보급하는 일이 연구하는 일보다 더 품위가 떨어지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 스티븐 제이 굴드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과학자들은 과학의 대중화에 이바지했다. 마술이 아닌 과학의 참다운 신념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는 대중 매체에 기대해서는 안 된다. 과학계가 앞장서서 어린이들부터 시작해 집단의 의식 속에 점차 이를 완성해 나가야 한다.

 

내 담화의 최종적인 결론은, 오늘날 과학자가 누리는 명망은 그릇된 추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여전히 인간의 정신을 강하게 매료시키는 마술의 두 형태, 전통적이고 기술적인 마술에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거짓 약속들과 어긋난 희망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후 과학의 여정은 더욱 험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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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가재걸음: 세계는 왜 뒷걸음질 치는가>>(김희정 옮김, 열린책들, 2012), pp. 137-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