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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풀러: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인터뷰 2

 

-아래 글은 호주의 좌파 미래주의자 웹사이트 Acheron LV-426에 실린,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Science: The Art of Living)>>이라는 책에 관한 스티브 풀러의 두번째 인터뷰를 옮긴 것이다.

 

 

Q1.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은 과학과 종교 사이의 관계에 관한 당신의 세번째 책입니다.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당신이 이런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논리적 진전을 나타냅니까?

 

A1. 당신이 세 권의 책―즉, <<과학 대 종교?(Science vs. Religion?>>, <<유래에 반대한다(Dissent over Descent)>>, 그리고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을 훓어본다면, 제가 '휴머니티'라는 이름으로 장려할 그런 과학-종교 세계관―한편으로 인문학과 신학을 과학으로 포함하는 폭넓은 '비센샤프트(Wissenschaft)'적 의미로 이해되는 '과학',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피조물들 가운데 인간들의 신에 대한 독특한 근접성을 상정하는 아브라함적 종교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관해 점점 더 솔직해지고 있다는 점을 알 것입니다. 이 세 권에 앞서 출판된 한 권의 책, <<새로운 사회학적 상상력(The New Sociological Imagination)>>(Sage, 2006)은 '인류지향 세계관'으로서의 이런 독특한 조합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 세계관이 '사회과학'이라고 부르는 특수한 지식체를 쌓아 올리고자 하는 관심―(유감스럽게도) 아마 우리 자신의 시대에 감소하고 있는―도 정당화해 왔다고 믿습니다. 저는 2011년에 출판될, 가장 최근에 제가 쓴 책, <<휴머니티 2.0: 21세기 사회사상을 위한 토대(Humanity 2.0: Foundations for 21st Century Social Thought)>>(Palgrave Macmilan)에서 이 세계관에 대한 미래 전망을 다룹니다. 모든 사람이 아는 대로 보수적이고 때때로 반동적이기까지 한 방향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는, 이 개념의 현재 문화정치가 아니라, 주로 그것의 지속하는 지적 내용을 위해 '지적 설계'(ID)가 이 개념에 주요합니다. 자연 세계가 가능한 최선의 기계로서 구성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관념은 과학 탐구에 부여된 중요성, 그리고 그것의 추구 강도와 응용 범위를 고무시키는 데 항상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지적 설계는 세계의 창조 이야기들의 배경을 참조할 때 매우 직관에 반하는 듯한 그런 관념―대(大)기술자로서의 신―을 낳습니다.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이 제공하는, 이전의 제 책에는 없었던, 부가적인 특정한 점은 '프로트과학'―과학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빚을 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인쇄술을 통해) 개신교도들이 성경을 자신들의 손으로 가져온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예컨대,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이 과학을 점점 더 자신들의 손으로 가져오는 나름의 그런 운동을 과학 자체가 현재 겪고 있다는 관념―입니다. 이 관념에 대해 최근에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이 맡고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가운데 하나에서 대담을 하며 저를 "이성의 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Q2. 저는 당신이 선행 작업들에 관한 라우팅과 스캐폴딩 작업이라는 학술 스포츠에 너무 빠져 있지는 않다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점에 대해 당신이 저를 용서할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저는 그것이 역사적 연속과 단절이라는 쟁점에 대해서도 보다 폭 넓게 언급한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저는 끝까지 할 것입니다. 이 책을 고전사회학과 관련지어 맥락화하는 것이 도대체 도움이 됩니까? 구체적으로 저는, 과학과 종교의 양립가능성에 관한 당신의 예증이 과학주의라는 스킬라(Scylla)와 몽매주의라는 카리브디스(Charybdis)를 피하고자 계획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베버와 같은 권위자는, 인간들을 억누르고 그들의 소명을 정하는 권력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성의 조건 자체―전문화, 합리화, 그리고 지성화―인 세계에서 작동하는 "영혼이 없는 전문가들"과 "가슴이 없는 향락자들"의 등장을 경고했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이런 비교를 수정하기를 바랄지도 모른다고 짐작합니다. 그렇다면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을 베버주의에 대한 하나의 교정책으로서 언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진리와 이해의 추구가 그것들이 가장 완전하게 번성할 수 있는 공동체적 맥락 속에 자리잡게 된다는 점을 의미할 것입니다. 당신이 이 책에서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과학자들과 함께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St. Bernard of Clairvaux)가 이른 선례를 세운 사람으로 인용될 수도 있을 듯합니다.

 

A2. 여기에는 두 가지 점이 있는데, 첫 번째는 고전사회학에 관한 것입니다. 마르크스, 베버, 그리고 뒤르케임이라는 성 삼위일체에만 전념하면, '사회학'은 '근대사회'가 대체하려고도 하고 완전하게 만들려고도 한 것으로서 종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세 사상가―사회학의 창시자 오귀스트 콩트도 역시―는 모두 오랜 기간동안 큰 일들을 하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하도록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구원 종교들의 힘을 파악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세속 세계가 근원적인 형이상학은 거부하면서도 계속해서 이런 감성에 올라타 있다는 점을 알아챘습니다. 이것은, 사회학이 이후에 직접적으로(마르크스, 뒤르케임) 또는 간접적으로(베버)로 다룰 수 있는 다양한 형식들의 '나쁜 믿음'과 '탈주술화'을 낳았습니다. 제가 35년 전 학생이었을 때 고전사회학의 이런 면이 꽤 명백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면, 성 삼위일체는 오랜 감성들이 어떻게 결코 전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표현들로 복귀하는지에 관한 위대한 이론가들인 파레토와 프로이트에 의해 보완됩니다. 오늘날 사회학의 종교적 기원들에 관한 인식의 결여는 사회학 내부의 관심 대상으로서 '사회'(일원적 존재자로서 이해되는)의 쇠퇴를 반영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두 번째 점은 '미신'에 관한 것인데, 저는 그것을 종교가 독점권을 지닌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실상 과학에 대한 우리의 믿음 대부분은, 엄밀히 말하자면, 미신적입니다(1997년에 출판된 <<과학(Science)>>이라는 제목의 제 첫 번째 책에서 주장한 점입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과학에 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소수인데, 그들은 인식적 권위의 문제에 관해 압박을 받을 때 어느 과학자나 어느 이론을 거명해야 할지 알 뿐입니다. 게다가 과학의 경우에는 원가 계산이 거의 없는데, 신자들의 일상 생활을 둘러싼 비참함 가운데서 주기적인 기적으로 그들을 함께 엮는 종교와 매우 흡사하게 '뛰어난 발견들'에 대해 주어지는 평판은 과학이 저지른 실패와 재앙들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과학을 허섭스레기로 통째 내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과학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을 때 그것을 과학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과학의 성과를 평가할 때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과학의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 때문에 그 믿음을 무리하게 유지하게 되지 말아야 합니다. 원래 개신교도들은 비슷하게 역설적인 점 때문에 가톨릭의 권위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신자들이 교회에 충성을 공표하고, 자신들이 참으로 그것을 믿고 있는지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교리를 반드시 직접 대면하지는 않는 채 다양한 의례를 수행하기를 요구할 뿐입니다. 이런 관행은 확실히 많은 기독교도들을 같은 천막 아래 붙들어 두었지만, 그것은 믿음 행위 속의 어떤 특정한 인식적 내용도 비웠습니다.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에서 서술된 그런 종류의 '프로트과학자들'은 과학에 대해 정확히 같은 식으로 느낍니다. 그것이 그들이 인터넷에 기반을 둔 기획들―가장 인상 깊은 것은 위키피디아―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까닭입니다.

 

Q3. 양자 신비주의는 포스트모던 몽매주의의 카리브디스의 한 예로서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금기시되는 주제에 이릅니다. 당신에 관해 가장 큰 오해들 가운데 하나는 당신이 "무엇이든 괜찮은"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자"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당신은 이전에 메타상대주의(metarelativism)에 대한 선호를 표현했습니다. 당신은 이 술어를 당신의 새 책인 이 책에서 "프로트과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계지을 수 있습니까?

 

A3. 제 저작에 공감을 하는 사람들―그리고 스스로를 포스트모던주의자와 상대주의자라고 부를 사람들을 포함합니다―은 아무도 저를 포스트모던주의자나 상대주의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오해는 몇 명의 같은 지적/문화적/정치적 적들을 가질 수도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통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으로 간주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 쟁점에 대한 프로트과학의 관련성은, 개신교도들은 기독교의 보편적 열망을 포기하지 않으며, 프로트과학자들도 그렇다는 점입니다. 개신교는 상대주의적 형식의 기독교가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사람들을 그들의 특수한 종파들에 가입시키기 위해 갈등을 유발할 정도까지 매우 적극적으로 전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상대주의는 관용이 목적 그 자체로 간주되는 조용한 정치와 관련되는 경향이 있습니다.(이것이 '메타상대주의적' 주장인데, 즉 그것은 상대주의를 상대화합니다.) 그렇지만 과학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리라고도 알려진 어떤 (신성한) 종점에 이르기 위한 공통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고 상정하기 때문에 그들이 일상적으로 서로의 신앙 기반에 이의를 제기하는 그런 갈등을 필요로 합니다. 과학의 커다란 제도적 혁신은 명료하게 정의된 경기 규칙을 벗어나지 않은 채 전용 공간에서 잠재적으로 꽤 휘발성이 있는 이 기획을 추구해 왔다는 것입니다. 괴테의 말을 되풀이하며 포퍼가 말했듯이, 과학에서는 우리의 관념들이 우리 대신에 죽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과학 기득권층은, 16세기의 가톨릭 교회와 매우 흡사하게, 그것이 비판적인 탐구 노선들을 억압하더라도 갈등을 전적으로 회피하도록 거의 제도화되어 있습니다.

 

Q4. 생명윤리도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을 특징짓는 듯 보이는데, 당신은 이 책에 생명윤리에 관한 논의를 포함시킬 것을 고려했습니까? 확실히 당신이 논의하는 과학/종교 주제들과 어떤 관련성이 있을 기독교 생명윤리에 실질적인 일단의 작업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겠지요? 그것이 해방신학과의 좌/우 관련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프로트과학을 통해 정치의 도덕화(선 대 악)를 대체하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저는 당신이 그것을 비켜 갔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찰스 W. 콜슨(Charles W. Colson)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공정한 요약입니까?

 

A4. 당신은 흥미로운 점을 제기합니다. 만약 당신이 인류는 이른바 '건설 중인' 집단적 기획이라는 관념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기독교 생명윤리―또는 그 점에 대해서는, 강한 자연법 의식에 의해 보증되는 어떤 생명윤리도―를 다루는 것은 어렵습니다. 주요한 걸림돌은, 우리의 동물적 존재의 유전적 특징, 예를 들면, 출생 전의 발생 순간이나 유전체 상의 핵산 유형을 읽어낼 수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구획짓기 기준이 있는 것처럼 자연법 신봉자들이 인간적인 것을 본질화하는 경향입니다. 여기에 생명윤리에 관해 의견의 일치를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그리고 다윈의 추종자들(최소한 보수적인 사람들)의 주목할 만한―그리고 흔히 악마적인―제휴가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것의 경계에 관해, '정상인' 대 '장애인'에 대한 판단의 견지에서도 비슷한 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다른 지점은, 기독교도들은 '장애인들'의 품위를 떨어뜨리거나 그들을 절멸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신체 장애자 차별'에 관한 그레고 울브링(Gregor Wolbring)의 원칙이 이런 사유 노선 전체에 대한 유용한 해독제라고 인식하는데, 그것은 '정상'의 지위가 복지경제학자들이 '지위재'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암시하며, 그래서 '정상인' 또는 '장애인'으로서의 어떤 사람의 지위는 인간 수행능력에 관한 사회적 기대의 항상 변하는 규범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적으로 신체가 정상인 인간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원칙적으로 항상 협상에 달려 있는 것이며, 다시 말해서, 모든 권리는 시민권입니다.

 

Q5. 저는 다른 한 각도에서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이라는 이상에 접근하고 싶습니다. 최소한 처음에 그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어떻게 어떤 활동을 목적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나게 하는데, 이것은 우리를 베버의 "가슴이 없는 향락자들"의 진영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이 책은 당신이 선호한 제목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유미주의 그 자체가 중심적인 관심사인지 묻고 싶습니다.

 

A5. 일반적으로 이해되듯이, '유미주의'는 이 책에서 중심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책략'의 견지에서 그 총서의 '삶의 기예[예술](art)'라는 주제를 해석하는데, 즉 삶이란 자연적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떤 목적 의식을 갖고서 살아지는 것인데, 이것은 그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계획된 어떤 종류의 규율을 함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적인 집중과 구속된 관찰에 대한 가치를 유지함으로써 과학은 분명히 '예술'을 구성합니다. 막스 베버는 분명히 이런 기예의 뛰어난 수행자들과 해석자들에 속합니다. 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 이데올로기가 부분적으로는 명공으로서의 신과 인간 사이의 낭만주의적 유비에 의해 고무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데, 그 유비는 지적 설계가 과학혁명을 고무하는 데 수행한 역할에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과학혁명가들은 그 유비를 동일성으로 변환시키려는 경향이 훨씬 더 컸는데, 즉 그들은 신처럼 창조할 뿐 아니라 신이 어떻게 창조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Q6. <<인간과학의 역사(History of the Human Sciences)>>에 게재된 최근의 논문에서 당신은, H. G. 웰스(H. G. Wells), J. G. 크라우더(J. G. Crowder), 그리고 왈데머 캠퍼트(Waldemar Kaempffert)―그들 모두는 "당대의 발전을 미래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의 지렛대로 사용했"습니다―를 인용하며, 더 주관적인 옹호 저널리즘은 그것이 권위주의와 맺은 역사적 관계에 의해 어느 정도 오염된 반면에 유미주의의 유산은 대체로 무해했다고 주장합니다. 당신은 자신의 책을 일종의 옹호 저널리즘으로 기꺼이 특징짓고 있습니까?

 

A6.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상 이 책은 한 편의 옹호 저널리즘인데, 과학은 신학이 전통적으로 그것에 부여해 온 그런 종류의 세계관 형식의 정당화를 필요로 한다고 저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학이 그 일을 책임지고 있는지는 또 하나의 다른 문제인데, 특히 신학이 실제로 사목적 기능에 매우 많이 열중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습니다. 인간 역사에서 위험을 추구하는 궁극적인 집단적 기획으로 이해되는 과학은 불확실한 세계에서 위안과 안전 의식을 주로 제공하고자 하는 신학 형식들과 불편하게 동거합니다.  물론 모든 신학이 이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더 천년왕국적인, 해방론적인 형식들의 신학은, 인류의 신적인 특질의 인식을 통한 인류의 권능 강화를 강조하는 성경 주제들을 이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채 이 노선을 일관되게 밀어붙이기는 어려운데, 이것은 특히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에서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해방신학의 창시자)에 이르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신학의 함의를 각각 당대 과학과 정치에 대한 반체제적 독법으로 밀어붙인 최근에 경험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물론 과학 자체도 신학만큼 많이 권위주의적 제재라는 문제를 겪습니다. 이것은, 과학은 포퍼 자신이 (트로츠키에 인사하고 쿤을 무시하며) '영구혁명'이라고 부른 것 속에 있을 때 정말 있어야 할 곳에 있다고 옹호하는, 말하자면, 전문가 견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추리와 경험을 사용하여 근본적인 가정들까지도 시험하는 포퍼주의적 순수주의자―아마도 저―에 의해 예리하게 기록됩니다.

 

Q7. 그래도 근대세계에서 일어나는 인간 조건의 임시직화를 가장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흔히 자연법 전통을 자신들의 목적으로 전환하는(즉, 다시 찰스 W. 콜슨 증후군) 보수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런 견지에서, 당신이 이 책에서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테야르의 저작들은 누군가에 의해 일종의 옹호 저널리즘으로 희화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테야르는 자신이 "매우 열등하고 불쾌하다"고 여긴 "인간 대중"을 경계해야 하는 엘리트에게 사회화의 지도력을 위임했습니다. 자연의 위계적 구조는 그대로 둔 채, 테야르는 "생명의 불합격품들"을 처리하는 우생학적 조치를 자유롭게 권했습니다(<<인간 에너지(Human Energy)>>(Collins, 1969), pp. 132-133). 이것은 장애인들을 희생하여 "도덕적 권역"을 확대하고 싶어하는 피터 싱어(Peter Singer)가 표현한 욕망에 대한 당신의 비판적인 이전 입장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어야 합니까?

 

A7. '우생학'에 대한 가장 분별있는 태도는 그것을 정상적인 사회적 재생산 과정들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는 술어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생학에 관계하기 위해 사육 농장, 불임 클리닉, 그리고 가스실을 숙고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속하는 계급 격차들, 그리고 그것들과 관련된 영양, 보건, 그리고 소득 흐름의 유형들은 사회 구조의 모습으로 자연선택 작업을 항상 수행해 왔습니다. 사회 구조의 무심한 재생산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일을 돕고자 1860년대에 '우생학'이라는 말을 새로 만든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에게 이 점은 매우 분명했습니다. (그의 주요한 근심거리는 영국의 세습 상원이었습니다.) 사실상 골턴은 자신이 과학적으로 자기의식적인 사회 정책을 위한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우생학을 간주하는 바대로, 단순히 진화생물학을 인간에게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는 까닭은, 우생학을 계속 떠나지 않고 있는 주요한 윤리적 구름은, 그것의 옹호자들이 인류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전적으로 특정한 모험적인 정책들에 관계하는 것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지는 대신에 자신들은 '자연'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처럼 우생학적 정책들을 나타내는 경향이기 때문입니다. 우생학 옹호자들이 그들의 작업을 익명적으로 부과된 과학적 명령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기획으로 일관되게 나타내었더라면, 그것은 이른바, 대규모의 수입과 자원 재분배를 요청하는 급진적인 경제 정책들의 불가지론적 정신에서 더 많이 토의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상 저는, 그것의 구체적인 결과가 무엇이든 바로 이런 식으로 우생학이 정치적 담론으로 정상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현재는, 당신이 말한대로, 우리는 우생학이 그저 '일상적으로', 즉 낙태를 할지, 안락사를 시킬지, 또는 유전자 조작을 할지에 관해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많은 선택을 통해 수행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것들의 집단적 결과는 정의상 하나의 부산물입니다. <<새로운 사회학적 상상력(New Sociological Imagination)>>에서 저는, 우생학에 대한 자유시장적 접근방식이 자연선택의 간접적인 작동과 비슷해지는 이 사태를 '생명자유주의(bioliberalism)'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골턴이 등장하기 전 시대로 되돌아가는 긴 행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Q8. 그래서 저는 이런 종류들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 사회인식론에 중추적인 인식적 정의의 원리―즉, 사람들을 자신들의 담론들/행위들의 의도된 결과들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아닌―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의 의식은 당신이 서술한,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의 목적들 가운데 하나를 보충하도록 의도된 것입니까? 이 책에서(135쪽) 당신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불공평한 일"이라고 쉽게 선언하는" 점에 관해 논의하는데, 이런 용이함이 어떻게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과거에 대한 단축된 관점과 그의 미래에 대한 무한정 연장된 관점과 결합된, 그것의 사전 비개연성에 대한 어떤 의식을 이용하는"지 서술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 죽음을 "제 시간보다 미리" 일어난 것으로 취급하게 됩"니다.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의 한 가지 목적은 이런 시간적 비대칭성을 교정하여 더 균형잡힌 시각으로 한 사람의 생의 가치를 바라보는 데 필요한 정서를 획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일 것입니다. "이것은, 예를 들면, 관련된 생명사회적 배경에 대한 원숙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망자는 이미 자신의 잠재력에 이르렀었다는 깨달음을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래서 이제 다른 사람들을 그런 성취를 진척시키기에 더 좋은 자리에 위치하게 둡"니다. "시간적 비대칭성"이 부당하다고 결정할 때, 어떤 증명 기준이 "잠재력", "성취", 그리고 "관련된 생명사회적 배경"의 지표인지에 관해 상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A8. 이것은 꽤 복잡하지만 중요한 쟁점입니다. 첫 번째 점은, 인간은 '과학적으로' 살 수 있다는 바로 그 생각이 신과 인간은 정도가 다르지, 종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상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적 종교들과 근대과학은 엉덩이가 붙어 있는데, 신은 과학이 알 수 있는 것의 창조자입니다. 사실상 이것은 과학적 판단들이 항상,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개선되기도 하는, 신적인 판단들의 열등한 판본들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이런 맥락에서 '신'은 실재의 이해가능성의 원천일 뿐 아니라 모든 시점과 지점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서 있는 존재인데, 저는 이것을 '초월'에 대한 조작적 정의로 간주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신의 정신에 동등하게 현전하기 때문에 신은 미래를 잘 아는 만큼 과거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과거를 미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어서 그저 과거를 무한정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는 생물은 동물입니다. 물론 인간은 이런 의미에서 최소한 동물이며, 그리고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세계를 아는 방식으로서의 귀납의 매력을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과학의 신적인 목적들 가운데 하나는 과거와 미래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서 대칭성을 산출하는 것인데, 이것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불신하는 것과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 둘 다를 의미합니다. 대체로 근대성은 우리를 동물 이상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바로 이런 시간적 균형―즉 둘 다 동시에 추구되는, 과거에 대한 해체주의적 태도와 미래에 대한 실험적 태도―를 불어넣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 이런 일반 전략은 우리가 개별적 삶들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함의를 명백히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현재 우리가 뜻밖의 죽음들을 '불공평한 일'이라고 판단한다―일단 우리가 미래 전망에 관한 더 큰 지식을 지니게 되면 과장된 일이라고 간주될 수도 있는―는 그런 견지에서 그렇습니다.

 

Q9. 마지막으로 저는 당신이 곧 출판되는 두 권의 책에 관해 많은 정보를 누설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합니다. 그 중에 <<휴머니티 2.0>>은, 특히 이 블로그의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들립니다. 저는 당신이 트랜스인간주의에 관해 논의하였을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에서 몇 가지 단서들을 얻지만, 당신이 추가할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출판일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A9. <<휴머니티 2.0>>은 2011년 전반기에 출판될 것인데, 그것은 이미 출판사로 넘어가 서평가들이 훓어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체로 트랜스인간주의를 지지하지만, 저는 명확히 그것을 다른 수단에 의해 아브라함적 신학을 존속시키는 운동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몇 명의 자칭 '트랜스인간주의자들'만이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트랜스인간주의는 완전히 반다윈주의적 관념인데, 그것이 다윈의 특정한 종류의 진화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간주할 호모 사피엔스를 계승하는 종에 관한 모든 종류의 규범적 유토피아를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윈의 사촌인 골턴이 승인을 받고자 다윈을 만났을 때 다윈 자신은 우생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는 점을 떠올릴 가치가 있습니다. 다윈은 인간들이 그저 지구에서 몇 백만 년의 시간을 보낸 후에 나머지 다른 종들처럼 멸종되는 또 하나의, 아마 가장 최근의 종일 뿐이라고 정말 믿었습니다. 다윈에게는, 자격은 말할 것도 없고, 트랜스인간주의자들의 흔히 SF적인 열광을 고무하는, 인간들에게 귀속되는 그런 종류의 역량을 시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충 말하자면, 다윈은 인간들이 진화를 제어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지만, 트랜스인간주의자들은 믿습니다. 이 점에 관해 저는 트랜스인간주의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도 역시 그럴 것입니다! 저는 노버트 위너(Nobert Wiener),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 그리고 레이 쿠르츠와일(Ray Kurzweil)과 같은 사람들이 모두 유니테리언 교파―인간들과 신 사이의 가장 직접적인 연결을 상정하는 아브라함적 신앙―의 교도들이라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현재 문화정치적으로 묶여 있는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로부터 지적 설계론을 빼내는, 내가 창조론 좌파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을 올려 놓기 위한 기초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사회적 오명이 '창조론'이라는 라벨에 붙어 있기 때문에 역사 기록에 근거하여 제가 매우 명백하다고 간주하는 것을 장황하게 논할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난 400년 이상 동안 지니고 있는 방식과 강도로 과학을 추구하기 위한 우리의 가장 강한 동기는 우리가 실재를 '이해가능한' 것, 말하자면, 그것에 관한 우리의 합리적 이해가 가능하도록 구성된 것이라고 가정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창조론적' 입장인 까닭은 그것이 실재 그 자체가 우리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가공물에 비견되는 가공물―훨씬 더 클 뿐인―이라고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론 저는 거대한 명공으로서의 아브라함적 신의 어떤 세속적인 하이테크 후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다윈주의자들이 단언하듯이, 실재는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안정된 것들을 산출하는 본질적으로 임의적인 과정들을 통해 우리가 지각하는 질서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면, 애초에 우리는 과학에 그렇게 많은 노력을 결코 집중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의 결과들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형이상학은 과학적 기획이 장기적으로 실패하도록 운명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과학과 그것의 '기계적 세계관'에 부여되는 예외적인 가치는 근대 서양 문화의 명함이었는데, 특히 고대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를 비롯한 세계의 문화들의 배경을 참조할 때 그렇습니다. 창조론의 세계사적 의미에 관한 이 주장은 참이며, 특수한 교파들이나 교리들에 관한 어떤 특정한 주장들과도 완전히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회학적으로 경도된 독자들은 여러 권의 책에서 이 점을 기록해 온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저작을 보라고 권합니다. 물론 '창조론'을 점점 세속화되는 세계에서 종교의 일반적 쇠퇴로부터의 일탈로서 묵살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편리하지만, 그것은 세계사 속의 과학-종교 관계와 그것이 미래에 어디를 향해 나아갈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이해의 견지에서 그릇된 인상을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