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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툴민: 오늘의 인용-근대성을 인문주의에 길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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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16세기 인문주의와 17세기 엄밀과학을 양자택일 식의 <선택적 대안>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양자의 긍정적인 성취를 골고루 취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상황으로 짐작컨대, 더욱 다급한 현안은 인문주의의 합리적이고 관용적인 [...] 유산을 되새기는 일이지, 엄밀과학의 체계적이고 완전지향적인 유산을 [...] 유지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 두가지 유산 모두가 필요하다. 어느 한가지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완벽한 이론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뉴턴과 데카르트가 귀감이겠지만, 이론이 실천 속에 맥박처럼 고동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인문학이 꼭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엄밀과학과 인문학을 철저히 구획한 기왕의 근대관으로부터 벗어나서, 인문주의라는 근대의 반쪽을 철학과 과학이라는 나머지 반쪽과 다시 봉합하는 일이다. 이것은 철학과 과학의 구원을 모색하는 길이기도 하다. 17세기 이성주의 수단만을 가지고는 이러한 과제를 수행할 수 없다. 이론의 [...] 모든 주장은, 실천과 경험이라는 그것의 뿌리 속에서 증명되지 않는다면 아무 위력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우리의 과제는 물려받은 근대를 개혁하는 일, 아니면 회개라도 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과제는 <근대성을 인문주의에 길들이기> humanizing modernity라고 할 수 있다. [...] 우리의 충고는 다음 세가지 방면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는 자연과학들과의 관계에서, 둘째로는 철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작업에서 의미가 있다. 셋째로는 국민국가의 절대성이 와해되고 있는 오늘날 상황에서, 자연과학들이며 철학을 정치적 실천에 응용하려는 작업에서 의미를 갖는다. 사실상 이런 기준에서 근대적 사고와 실천이 저지른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한 유익한 작업은 벌써부터 한창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20세기 말 현시점에서 추진하고 있는 자연과학들은 [...] 기계론 철학[...]으로부터 한참을 벗어난 것들이다. 오늘날의 과학들은 경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기하학으로부터 빌어온 <확실성>과 추상적 이론적 관념에만 의존하는 형식적 체계와는 다르다. 비록 자연과학들이 인류에 미친 악영향이라는 기준에서 자연과학들의 실용성 자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점차 커져가고 있는 추세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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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이 근대적 골격 속에 안주하면서 인간 사고의 <합리성>과 자연 메카니즘의 <인과성>을 엄격하게 구분하던 시절에는, 뉴턴의 기계론적 공리들이 나머지 모든 과학적 관념들을 위한 모델이었다. 그렇지만 근대적 골격이 무너진 지금,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과학자는 더이상 버티기 힘들다. 이론적 과학과 실천적 기술공학, 즉 <순수> 과학과 <응용> 과학도 예전처럼 예리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뉴턴이 추구한 이론적 엄격성과 베이컨이 추구한 인문주의적 실천 사이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인문주의에 어울리는 목표를 향해 과학이며 기술공학이며 의학의 재정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자들과 그들의 근대관을 인문주의에 길들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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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코스모폴리스에 대한 향수는 그것이 의존한 자연 이미지가 덧없는 것이었음을 드러낼 뿐이다. 물체들이 유일한 중력중심의 주의를 고정 궤도를 따라 운행하는 안정된 물리체계의 이미지, 즉 태양과 행성들의 이미지는, 태양왕과 백성들을 위한 모델이었다. 17세기적 상황에서는 이러한 모델이 건설적인 목적을 수행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성적 실천이라는 미명 하에 그 모델을 독립적 개체들의 세계에 대해 경직되고도 무리하게 덧씌우려는 시도는, 20세기 말의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은 오히려 상호의존성이며 문화적 다양성이며 역사적 변화가 강조되는 추세이다. 과거에는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라는 미덕을 갖춘 것으로 추앙받던 사회적 패턴이, 오늘날에는 <진부함과 비적응성>이라는 악덕으로 변해가고 있다. 정확성이며 엄격성이며 체계성 등. 재기불능으로  무너져버린 근대적 요구들이 계속해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강압하려 든다면, 우리의 사고와 제도는 안정되기는 커녕 경직될 위험이 높다. 우리의 사고와 제도를 지속적으로 수정해감으로써 새로운 상황의 새로운 요구에 대해 슬기롭게 대처할 가능성마저 사라질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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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 툴민(Stephen Toulmin), <<코스모폴리스: 근대의 숨은 이야깃거리들(Cosmopolis: The Hidden Agenda of Modernity)>>(이종흡 옮김, 1997), pp. 2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