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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풀러: 오늘의 인용-과학적이란?

 

과학적

Scientific

 

의미론적 조사를 받게 될 다음 낱말은 과학적(scientific)이라는 낱말인데, 이 낱말은 각 의미가 동의어로 쉽게 식별되는 세 가지 의미 가운데 무엇이나 가질 수 있다.

 

과학의 - '과학적 방법'에서처럼 과학의 한 특성

과학화된 - '과학적 농경'에서처럼 과학의 응용

과학주의적인 - '과학적 사회학'에서처럼 과학의 모방

 

이 세 가지 동의어는 과학적 탐구의 실제 수행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거리에 따라 배열되었다. 이런 점에서, 2와 3을 분리시키는 의미의 미묘한 차이가 특히 중요한데, 자신들이 이전에는 거주하지 않았었던 영역들을 식민화하고 있는 과학자들(2)과 과학자들의 승인을 끌어내기 위해 스스로를 재구성하고 있는 그런 영역들의 거주자들(3) 사이의 차이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알려진 대담한 추상화의 위업에 의해 학제간 교환의 방향으로 이 차이를 감추었다. 환원주의는 그 움직임이 누구에게서 비롯되든 무엇이든 간에 과학의 규칙을 자체의 정상적인 분과학문적 경계를 넘어서 확대하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오늘날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유지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경제의 '평형' 모형들은 에너지 보존과 소비에 대한 십구 세기 설명들에서 비롯된 것인 듯 보인다. 이것은 경제학자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물리학자들의 사례인가, 아니면 서로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기 위해 물리학을 차용하는 경제학자들의 사례인가? 부정적인 일자리 시장 때문에 그 구분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었음이 판명되는데, 물리학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경제학으로 옮겨 가서 자신들의 필요 이상의 솜씨를 혁명적인 새로운 전문지식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기 떄문이다.

 

최소한, 일단 어떤 영역에 공인된 과학의 방법이 수입되었다면, 그 영역은 과학적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물론, 철학이 최신 과학을 자체의 사변들의 토대로, 또는 최소한 그것들에 대한 궁극적인 제약으로 간주할 때처럼 과학에 대한 실체적인 믿음들도 수입될 것이다. 적절한 몇 가지 사례들은, 마음의 본성은 뇌 지도를 작성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 좋은 사회에 대한 비밀은 인간들의 유전자적 구성을 명확히 규명함으로써 해명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 또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의문들은 기본 입자들과 힘들을 발견하는 물리학자들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사례는 두 가지 흥미로운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 환원주의적 프로그램의 실행은 지식을 습득하고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기법들의 도입을 포함하는데, 그 기법들은 결국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종류들을 제한한다. 둘째, 환원주의적 대답들을 제공하는 데 필요한 자원은 "환원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이런 의문들을 추구하는 데 필요했었던 자원을 크게 넘어선다. 이전 세대들에서는 증거 제공에 의해 행해졌었던 작업을 거의 재정적 충당이 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연구 프로그램에 더욱 더 많은 돈을 소비하면 할수록, 그것이 그릇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더욱 더 가정하지 않을 수 있다.

 

더 넓은 화판 위에 그림을 그리면, 우리는 과학의 영향이 집중되어 있는지 또는 사회 전체에 분산되어 있는지의 견지에서 '과학적'이라는 낱말의 의미론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 그 영향이 집중되어 곳에서 과학과 사회의 경계면은 하나의 현장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고, 그 영향이 분산되어 있는 곳에서 그 경계면은 하나의 과정이다.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면, 현장들은 인류학적 연구 대상들이고, 과정들은 사회역사적 연구 대상들이다. 그 결과는 그림 3.3에 나타낸 과학과 사회의 "상호침투"이다. [...] 나는 과학적 사회적 영향의 상쇄 과정들, 즉 그림 3.3의 C와 D에 관한 몇 가지 언급을 할 것이다.

 

   사회화된 과학 과학화된 사회 
 현장으로서의 과학/사회

A 과학이 사회적 제도들과 일반적인

   사회적 경향들을 재생산한다 

 B 사회가 과학에서 자체의 완전한

    잠재력에 이른다

 과정으로서의 과학/사회

C 과학이 대중화됨에 따라 확산된다

 

 D 사회가 과학의 지배를 받게 됨에

    따라 표준화된다 

그림 3.3  과학과 사회의 상호침투

 

C의 경우에, 사회 전체에 걸쳐 과학적 정신의 비판적인 경향을 퍼뜨리는 데에 대한 계몽주의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관념들이 일반적으로 순환됨에 따라 소실될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은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다. 도대체 인식될 때, 과학은 독단으로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과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의학적인 획기적 업적들과 자연의 이상한 현상들에 대한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기사들에 의해 자극받으며, 그리고 그것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화제들(예를 들면, 장래 자식의 유전자에 기반을 둔 결함들)에 동화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이기적 유전자' 또는 '블랙홀' 같은 비교적 난해한 문제들에 의해 자극받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과학에 대한 비판적 관여의 이런 결여가, 최소한 과학의 지속적인 생존을 목적 자체로 간주하면, 과학에 꽤 유익한 듯 보였다. 지식과 관심은 독특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 (여기서 민주주의 체제의 안정성이, 비교적 만족해서든지 순전히 무관심해서든지 간에, 정치적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인구 집단에 의존하는 방식에 관해 생각하자.)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이 과학에 관해 종교적 믿음을 유지하고 있는 때에 과학이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향유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이 과학에 대한 더 철저한 지식을 갖춘다면 지지가 증가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옳지 않다. [...] 아무리 기묘한 듯 보일지라도, 거대한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통치의 작동과 대체로 흡사하게, 오해받고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과학은 대중적일 것이다. 따라서 "과학의 대중적 이해"에 진정으로 헌신하는 운동은 과학의 미래에 대해 오히려 뜻밖의 어떤 결과들을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현업 과학자들은 과학에 대한 사회적으로 수용할 만한 규정에 기여하는 사람들 가운데 소수일 뿐이다. 나머지 기여자들에는 다른 분과학문들(특히 사회과학)에 종사하는 실무자들이 포함되는데, 그들은 당대의 과학적 모범들을 본떠 자기 분야들을 모형화한다. 과학정책 입안자들도 포함된다. 그리고 특히, 불교를 물리적 실재의 양자적 층위에서 나타나는 인과관계의 붕괴로 독해하는 과학대중화론자들도 포함된다. 이런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결론을 내리기는 쉽다. 그렇지만, 과학 공동체가 매우 퉁명스럽게 그들과 의절한다면, 과학은 자체의 고상한 사회적 지위를 재빨리 상실할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적 정부들이 소수만이 직접적으로 득을 보고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관계할 수 없는 활동들에 수십 억 달러를 투자하고 싶어 하는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사회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면, 대중의 상상에 스며드는 형편없는 은유들과 설익은 이해들 모두가 광범위한 사람들로 하여금 과학적 연구의 엘리트적이고 이질적인 세계로 자신들의 경험과 전통들을 투사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마도 놀랍지 않게도, 대중이 자체의 '이해'에 의해 과학정책을 스스로 장악하기를 바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능력이 향상되었다고 느낄 때에만,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메시지에 대한 이런 희석에 공개적으로 반대한다.

 

D의 경우에, 사회가 과학의 지배를 받게 되는 주요한 방식은 현실에 대한 일상적 이해들의 자연화를 통해서이다. 이 과정은 자연 세계에 대한 '인지적 관여' 또는 '환경적 적응'의 정도로서의 동물적 본능, 상식, 그리고 과학적 방법 사이의 이른바 연속성로서 가장 잘 인식할 수 있다. 술어들의 이런 융합은 호모 사피엔스를 규정하는 대부분의 특징들에 대한 선행자들이 동물계 전체를 걸쳐 최소한 맹아적 형태로 발견될 수 있다는 다윈주의적 관념에 흔히 기반을 두고 있다. 예를 들면, '인지'는 기억과 예견에 의해 진화적으로 향상된 지각으로 판명된다. 그런데 그 다음에, '과학적 지식'이 우리 종―아마도 무엇이든 어떤 종―이 진화시켜온 최선의 적응 양식일 것이라는 점을 전적으로 분명히 한다. 결합하면, 이 두 견해는 결국 과학의 추구가 인간의 타고난 '호기심', 또는 그런 동물적 경향의 자연적인 연장이며, 그리고 종교적 근본주의 또는 정치적 권위주의 같은 명백히 반과학적인 추세들이 우리의 완전한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하게 막는다는 결론을 승인한다.

 

이런 입장의 장기적인 제도적 결과들에 자연주의자들이 '인지' 또는 '지능'이라는 표제어 아래 유적으로 함께 묶는 전 범위의 인간의 적응 솜씨를 평가하기 위한 '과학적' 기준―일반적으로 물리학에 의해 고무된―의 도입이 포함되었다. 이런 경향의 가장 노골적인 예는 어린이 발달에 대한 장 피아제(Jean Piaget, 1896-1980)의 영향력 있는 모형임에 틀림없는데, 그 모형에 따르면 유년에서 사춘기까지의 인지적 궤적은 서양 물리과학의 지난 2000년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 듀이(Dewey)만큼 민주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도 관련된 견해를 보유했다. 명백히, 피아제도 듀이도 물리학에서 많은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지능 검사,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인지심리학의 초기 지지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그랬다. 그들의 경우에,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나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같은 위대한 물리학자의 연구노트들을 자신들의 사유 과정들에 대한 스스로 끌어낸 규약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 전적으로 자연스러웠는데, 그럼으로써 그들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심적 사건들에 대한 이례적으로 훌륭한 목격자로 만들었다. 과거가 매우 쉽게 잊혀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50년 안에 누군가가 초심자들이 과학의 기본 원리들과 기법들을 획득하는 방식에 대한 모형으로서 어린이들의 개념 획득에 유의함으로써 이런 전개를 뒤집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과학자의 인식적으로 훌륭한 태도를 얻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진보적인 듯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희망찬 표현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최소한 그들이 무엇이든 어떤 다른 것으로 변신하기 전에, 과학자로 만들기 위한 전략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이십 세기 대부분 동안 학생들의 '형식적 추리' 능력은 고전역학의 "연습문제들'의 낙수적 판본들을 푸는 데 필요한 연립방정식들을 성공적으로 구성하고 조작하는 것에 의해 평가되었다. 그런 시험들에 의해 측정되는 솜씨가 실제 취업 전망과 얼마나 무관한지에 상관없이, 그런 시험들에서 적절히 해내지 못하는 것은 경력 선택과 이동성을 심각하게 방해했다. 따라서, 교육제도의 '민주화'는 점점 더 늘어나는 수의 사람들이 학위를 수여받고 취업이 되기 전에 일련의 동일한 표준화된 시험들을 치른다는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가리킨다. 확실히, 모든 사람들을 공통의 성취 기준에 따르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개혁들은 '민주적'이었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대안적인 발전 경로들, 특히 창고에서 일을 하는 것과 같은 그런 경험에 기반을 둔 경로들을 사실상 제거했다. [...] 여전히 물어야 되는 질문은 이렇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또는 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직업을 추구할 수 있기 전에 자신들이 제대로 된 작은 물리학자임을 증명해야 하는가?

 

― 스티브 풀러(Steve Fuller), <<과학(Science)>>(1997), pp. 3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