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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오늘의 인용-'무(無)로부터의'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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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무(無)에서 만들어졌다는 교리는 우리에게 우주의 아찔한 우연성에 유의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모더니스트의 예술작품이 흔히 그러하듯이 우주도 자칫 창조되지 않았을 수 있으며, 생각 깊은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우주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의 그림자 속에 언제나 놓여 있다는 얘기다. '무(無)로부터의' 창조는 하느님이 지독히 영리해서 기본적인 원자재 없이도 뭐든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증거가 아니라, 세상이 어떤 앞선 과정의 필연적 결과, 피할 수 없는 인과(因果) 사슬의 결말이 아니라는 사실의 증거다. 어떤 형태로든 앞선 인과관계가 있었다면, 그것은 세상의 일부여야만 할 터이므로, 어떤 인과관계도 세상의 기원으로 여겨질 수 없다. 세상 곧 우주가 필연적인 게 아니기에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을 선험적인 원칙으로부터 추론해낼 수 없다. 그 대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정확히 관찰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과학의 역할이다. 따라서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교리와 리처드 도킨스의 과학자라는 직업 사이에는 흥미로운 관계가 있다. [...]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러므로 엄격한 인과관계에 대한 비판이자. 디치킨스(도킨스와 히친스)가 개인적으로건 정치적으로건 그토록 소중히 여겨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유의 증거다. 세상은 어떤 실리적 목적도 없이 오직 그 자체만을 위하여 [...] 존재하는 무척 희귀한 부류에 속한다. 이 범주에는 하느님 외에 예술과 악(惡)과 인류가 포함된다. 조지 부시와 달리 하느님은 간섭주의적인 지배자가 아니다. 과학이 존재하고 리처드 도킨스라는 인물이 가능해지는 것도 세상이 지닌 이 자율성 덕분이다. 디치킨스는 과학 연구에서 하느님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흥미롭게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 아퀴나스의 생각 역시 똑같았다. 과학은 원래 무신론적이다. 과학과 신학은 대부분의 경우에 같은 종류의 대상을 다루지 않는다. 치과 교정학과 문학비평의 대상이 다르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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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신을 옹호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강주헌 옮김, 모멘토, 2010), pp.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