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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바지니 & 로렌스 크라우스: 대담-철학 대 과학

 

 

철학 대 과학: 어느 것이 삶의 큰 의문들에 대답할 수 있는가?

 

―― 줄리언 바지니(Julian Baggini) 대 로렌스 크라우스(Lawrence Krauss)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는, 우리가 우주에 관해 더욱 더 많이 알게 됨에 따라 과학자들이 다른 분과학문들에 그들의 표식을 새기기로 점점 더 작정하게 된다고 두려워한다. 여기서 바지니는 이론물리학자 로렌스 크라우스에게 그의 동료들 사이의 "임무 변화"를 둘러싸고 이의를 제기한다.

 

줄리언 바지니(JB): 우주에 관해 과학이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틀림없이 우주와 과학 둘 다에 외경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리학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비교될 때, 과학자들은 우쭐함을 느끼고 나머지 우리들은 얼마간 부러움을 느끼기가 쉽습니다. 특히 철학자들은 실험복 선망으로 괴로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취가 그렇게 명료하고 반박할 수 없기만 하다면! 분과학문의 가치를 끊임없이 정당화해야 하는 의무로부터 해방된다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그렇지만―그리고 저는 당신이 "그러나"라는 낱말이 나올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저는 과학이 최근에 약간의 임무 변화를 겪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성취한 점에 만족하지 않은 채, 다른 학문분과들의 영역을 지배하기를 원하는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철학의 문제들에 관해 소유권이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여태까지 역사는 많은 철학적 쟁점들이 성장하여 집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살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과학은 한때 자연철학이었고 심리학은 형이상학 옆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과학적이지 않는 인간 실존에 관한 몇 가지 쟁점들이 있습니다. 저는 단순한 사실들이, 예를 들면,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지 아니면 그른지에 관한 쟁점을 도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말했고 글로 적었던 것들 가운데 일부는 당신이 과학의 제국주의적 야심들 가운데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은 여전히 철학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의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과학이 얼마나 많이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로렌스 크라우스(LK): 과학에 관한 친절한 말씀과 당신의 관대한 태도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그러나"에 대해서 그리고 저의 제국주의적 야심에 대한 당신의 감각에 대해서 저는 그것이 결코 제국주의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답할 수 있는 의문들과 대답할 수 없는 의문들을 구분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림짐작으로, 대답할 수 있는 모든 의문들은 결국 경험적 지식의 영역, 또한 과학으로 알려진 영역으로 진입합니다.

 

예를 들면, 도덕에 관한 당신의 의문에 대해서, 과학은 도덕적 결단을 위한 근거를 제공하는데, 그 결단은 경험적 증거에 근거하는 이유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에만 분별 있는 결단입니다. 경험적 증거에 근거해야 하는 행위 결과에 대한 어떤 지식이 없다면, 저는 "이유"만으로는 무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행위가 무엇을 산출할지 제가 모른다면, 저는 그것이 도덕적인지 아닌지에 관해 분별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신경생물학과 진화생물학과 심리학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도덕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떤 잘 규정된 생물학적 구성물들로 환원시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숙해지는 주요한 철학적 의문들은 집을 나가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특히 물리학 및 우주론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원인과 결과, 있음과 없음에 관한 모호한 철학적 논쟁들―저의 새 책이 출간된 이래로 제가 다루어야 했던―이 이것의 매우 좋은 사례들입니다. "비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 지겨울 때까지 논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정말 무력하다고 저는 주장할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정말로 관심을 품고 있는 의문, 즉 사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생성되고 진화할 것인지에 대한 그 어떤 통찰도 제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JB: 저는 당신이 아마도 예상하는 것보다도 더 많이 당신의 입장에 공감했습니다. 저는 이제 과학자들이 형이상학의 많은 전통적 의문들에 가장 잘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며, 당신은 "왜 무(無)가 아니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그것들 가운데 하나라고 능숙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씀하듯이, "성숙해지는 주요한 철학적 의문들은 집을 나가는 것들"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빠뜨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당신이 핵심적인 구분은 대답할 수 있는 경험적 의문들과 대답할 수 없는 비경험적 의문들 사이에 놓여 있다는 원리를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 주장은 주요한 철학적 의문들은 집을 나가지 않은 채 성숙해지는 것들, 모든 사실들이 수집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는 중요한 의문들이라는 것입니다. 도덕적 의문들이 제일 중요한 예입니다. 그 어떤 사실적 발견도 옳고 그름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덕적 의문들은 공허한 의문들 또는 사이비 의문들이라고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에 관해 더 잘 생각할 수 있고 더 세련된 논쟁들도 벌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비인간 인지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됨에 따라, 동물 윤리와 관련하여 우리가 내리는 결론이 바뀌었습니다.

 

과학주의라고 폄하하여 불리는 것은, 어떤 의문이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진지한 의문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다룰 수 없는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지만, 그것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이해할 수 있으며, 얼마간 진지하고 심각한 마음으로 이렇게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 삶의 제거할 수 없는 특징이라고 저는 응답할 것입니다.

 

제게는 당신이 이것을 수용하지 않고 과학적 관점을 인정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옳지 않습니까?

 

LK: 사실상, 저도 당신이 아마도 예상하는 것보다도 더 많이 당신의 입장에 공감했습니다. 저는 철학적 논의들이 사실들에 관해 성찰할 수 있게 함으로써 여러 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의사 결정에 스며들 수 있지만, 사실들의 유일한 원천은 경험적 탐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과학적으로 다룰 수 없는 문제들에 관해 결단을 요구하는 인간 삶의 여러 특징들이 있다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인간사와 인간들은 너무나 혼돈스럽기 때문에 모든 단계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데 있어서 이유만으로는, 그리고 심지어 경험적 증거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앨리스를 통해서 아침 식사 전에 여러 불가능한 것들을 믿을 필요성을 제시헀을 때 루이스 캐롤(Lewis Carroll)이 옳았다고 저는 생각한다고 제가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잠에서 깨기 위해 매일 그것을 행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마도 우리는 자기 직업, 또는 자기 배우자, 또는 자기 자신을 좋아합니다.

 

제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여전히 시간적으로 불변인 상태로 남아 있는 정도입니다. 오늘 과학적으로 다룰 수 없는 것이 내일은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통찰이 어디에서 비롯될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발견의 항해를 매우 흥미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실적 발견물들이 도덕적 의문들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를 고려합시다. 철기 시대 문서들은 동성애가 "그르다"고 주장했을 것이지만, 다양한 종들에서 동성애적 행동의 빈도에 관한 과학적 발견들은 개체군의 얼마간 일정한 부분에서는 동성애가 전적으로 자연적이고 그것이 명백한 부정적인 진화적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확실히 이것은 동성애가 생물학적으로 근거가 있으며, 유해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그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사실상 저는, 당신이 비인간 인지에 대한 우리의 연구가 우리의 윤리관을 변화시켰다고 주장할 때 당신은 실제로 과학의 영향과 관련하여 이 점에 동의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왜 무가 아니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과학자들이 가장 잘 다루는 의문이라는 점에 당신이 동의하는 것을 듣게 되어 기쁘다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왜"라는 의문들은 실제로 "어떻게"라는 의문들이라고 제가 주장했듯이, 당신도 모든 "왜"라는 의문들은 존재하지 않을 "목적"을 전제하기 때문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점에 동의할 것입니까?

 

JB: 현재 비사실적 의문인 듯 보이는 것에 대해 언젠가 과학이 대답할 수도 있을 가능성을 미리 배제하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적절히 회의적인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너무 서둘러서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을 과학자들에게 너무 이르게 건네주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동성애 사례가 적절한 실례입니다. 저는 동성애가 그르다고 생각하는 주요한 이유들이 낡은 사고방식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서술하는 방식에 따르면, 우리가 동성애가 "선천적으로 '그르지'" 않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과학이 동성애적 행동이 "전적으로 자연적이고", "명백한 부정적인 진화적 영향을 미치지 않고", "생물학에 근거하고" 있으며, "유해하지 않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윤리적 판단 형식과 과학적 판단 형식을 뒤섞는 것입니다. 동성애는 도덕적으로 수용할 수 있지만, 과학적 이유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은 결코 진화적 영향과 자연적인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강간이 자연적이며 진화적 이익도 있다는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을 개진한 사람들도 이것 때문에 강간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데 많은 노력―슬프게도 비판가들이 무시했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부정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들이 개진되었습니다. 어떤 성적 행동들의 자연성에 관해 과학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윤리적 성찰에 스며들 수 있지만, 그것의 결론을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이 점에 관해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젠가 철학자들보다 과학자들이 이런 문제들을 더 잘 다룰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수용하는 것과 그것들을 너무 이르게 건네주는 것은 다릅니다.

 

LK: 다시 한번, 미묘한 의견 불일치가 겨우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지성을 갖추고 있고, 그러므로 사회적 조화라는 명목으로 다양한 다른 생물학적 경향들을 압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과학이 우리의 도덕적 신념들을 수정하거나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부정이 생물학적 사실이라는 사실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것에 대한 그 어떤 "절대적인" 비난도 수정해야 합니다. 게다가, 많은 도덕적 신념들이 사회마다 다르다는 점은 그것들이 학습되고, 그러므로 심리학의 영역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다른 것들은 더 보편적이고, 그러므로 신경세포의 회로로 엮어진(hard-wired) 것, 즉 신경생물학의 문제입니다. 도덕적 판단으로의 후퇴는 내가 소박하다고 생각하는 자유의지에 대한 어떤 종류의 착시적 믿음을 너무나 흔히 가정합니다.

 

저는 주제를 바꾸고 싶습니다. 저는 "왜 무가 아니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과학자들이 가장 잘 다루는 의문이라는 점에 당신이 동의하는 것을 듣게 되어 기쁘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더 일반적으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왜"라는 의문들은 실제로 "어떻게"라는 의문들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신은 동의하십니까?

 

구체적으로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1595년에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풀러는 한 가지 중요한 "왜"라는 질문―왜 여섯 개의 행성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대답은 각 면이 정다각형―삼각형, 사각형 등―으로 구성될 수 있고 면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크기가 증가할 구에 의해 외접될 수 있는 다섯 개의 플라톤적 고체에 놓여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 구들이 행성들의 궤도들을 분리시킨다면, 궤도들의 태양으로부터의 상대적인 거리들과 그것들의 수는, 심층적 의미에서, 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습니다.

 

그때 "왜"라는 의문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그것에 대한 대답이 우주의 목적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질문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섯 개의 행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게다가 우리 태양계가 유일하지도 않고 반드시 전형적이지도 않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의문은 이렇게 됩니다. "우리 태양계는 어떻게 현재대로 분포된 행성들의 수를 갖는가?"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예를 들면, 우주의 다른 곳에서 생명을 발견할 확률을 규명할 것입니다. "왜"라는 의문은 "어떻게"라는 의문으로 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아무 증거도 없는 목적을 전제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왜"라는 의문은 더 이상 그 어떤 유용한 의미도 없습니다.

 

JB: 저는 그것이 미덕인지 아니면 악덕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철학에서는 미묘한 의견 불일치와 관련하여 "겨우"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윤리에 대해서는 아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가까워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떻게"라는 의문과 "왜"라는 의문 사이의 차이를 검토합시다.

 

또 다시, 여기서 저는 많이 동의합니다. 저는, 예를 들면, 과학은 "어떻게"라는 의문들을 다루고 종교는 "왜"라는 의문들을 다루기 때문에 종교와 과학 사이에는 결코 아무 갈등도 없다는 논변을 납득하지 못합니다. 그 둘은 그렇게 쉽게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한 기독교도가 신이 왜 빅뱅이 있었는지 설명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있어서 신의 역할에 관해서도 무언가를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왜"라는 의문들이 "어떻게"라는 의문들로 적절히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분명한 사례는 인간 행위와 관련된 것인데, 그것에 대한 적합한 설명들은 "왜"라는 의문들이 없다면 거의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행동합니다.

 

이것을 하나의 편리한 허구, 착각이라고 서술하는 매우 단호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 행위에 대한 진정한 설명은 "어떻게"라는 층위에, 특히 뇌가 어떻게 정보를 수신하고, 처리하며, 행위를 산출하는지에 놓여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왜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을 위해 희생했는지 알고 싶다면, 순전히 신경학적인 대답은 완전한 대답이 아닐 것입니다. 완전한 진실은 "왜"도 작동했다고 말하는 것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사실상 본질적으로 사랑은 신경세포들의 발화와 호르몬들의 분비의 산물입니다. 생화학적 관점과 심리학적 관점이 어떻게 들어맞을지 명백히 당황스럽고, 그리고 자유의지에 관한 당신의 말씀이 시사하듯이, 인간의 자유에 관한 우리의 소박한 가정들은 거의 확실히 틀렸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과학이 사랑 같은 것들이 대답이 될 인간 행위에 대한 "왜"라는 의문들을 묻는 것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니면 그것은 낭만적인 허튼 소리입니까? 당신이 귀찮게 이런 대화를 하는 이유가 없습니까? 그저 당신의 뇌가 이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이 대화를 하고 있습니까?

 

LK: 글쎄요. 저는 확실히 이 대화를 즐기고 있으며, 그것이 명백히 제가 대화를 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 즐거움이 인간들이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엮이는 것을 즐겁게 만드는 신경세포의 회로로 엮어진 과정들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의문을 뒤집어서 사랑 같은 것들이 신경세포들의 발화와 생화학적 작용들로 결코 환원될 수 없을 것이라고 당신이 생각하는 이유(당신이 "왜"라는 의문을 용납하실 것이라면)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맞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의식을 지배하는 순전히 "물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맞다고 시사하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우리는 이미 진화생물학의 견지에서 희생의 여러 측면들을 이해합니다. 많은 경우에, 희생은 한 집단 또는 친족의 생존에 유익합니다. 유전자들의 전달이 기초적 의미에서 행위를 추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사람들에 대해, 이 경우에는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진화적으로 이해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거시적 규모에서 연구되는 그런 사회적 행위들을 미시적 규모의 생물학적 반응들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상상의 큰 도약이 아닙니다.

 

순전히 실천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계산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가까운 미래에 할 수 없을 것이고, 아마도 항상 그럴 것입니다만, 우주에 관해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때문에 저는 항상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기가 두렵습니다. 물리학의 법칙들에 의해 배제되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불가피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저는 제가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방에서 모든 입자들의 운동을 계산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 저는 물리적 거동을 계산하기 위해 평균량들을 취하여 통계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누가 알겠습니까?

 

JB: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 때문에 철학은 언젠가 불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도 자체 범위에 한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수용해야 합니다.

 

저는 우주에 물리 과학의 재료보다 더 많은 재료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의 행동이 물리학 또는 생물학만으로 도대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항성들과 같은 재료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재료는 자체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조직되어 보존과 페르미온들의 근저만을 검토함으로써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의식 같은 것들이 창발했습니다. 최소한, 저는 그것들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물리학자들이 시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즐겁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공할 때까지, 저는 유일하게 진정한 의문들은 과학적 의문들이고 나머지는 잡소리라고 하는 그 어떤 주장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참이라면, 이 대화도 잡소리에 지나지 않겠지요?

 

LK: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본질적으로 의견 일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제 대화들 가운데 많은 것이 잡소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고 추측하지만, 어쨌든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학이 모든 층위에서 좋은, 실재에 대한 완전한 견해를 낳을 수 있을지에 대한 대답을 정말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과 저는 물리적 실재는 존재하는 전부라는 점에 근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그야말로 우리는 과학의 방법들을 통해서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그리고 얼마나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관해 상이한 수준의 낙관주의를 품고 있습니다. 저는 자연에 관한 의문들을 계속 제기하고 실험을 통해서 자연이 대답하도록 함으로써 가능한 진보에 계속해서 놀랄 것입니다. 항성들은 사람들보다 이해하기가 더 쉽다고 저는 예상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 기획이 매우 흥미로운 것이 됩니다. 불가사의한 것들이 삶을 살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고, 만약에 우리가 대답해야 할 대답할 수 있는 의문들과 풀릴 수 있는 수수께끼들이 더 이상 찾아낼 수 없는 날이 온다면 저는 슬플 것입니다.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은 우리가, 최소한 어떤 분야들에서, 우리 자신의 성공의 희생자들이 되어버린 방식입니다. 우주 전체에 관한 한, 우리는 이해에 대한 안내자로서의 경험적 탐구의 한계에 놀랍도록 가까워져 있을 것입니다. 그것 이후에 우리는 좋은 관념들에만 의존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항상 훨씬 더 어렵고 덜 믿음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