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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포프킨: 오늘의 인용-피에르 가상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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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Pierre)] 가상디(Gassendi)는[...] 십칠 세기 초의 천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1592년에 프로방스에서 태어났고, 디니으(Digne)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십육 세에 그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었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에 그는 1612년에 디니으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그는 엑스에서 철학 강사에 되었고, 그 다음에 그레노블(Grenoble)의 참사회 의원이 되었다. 상당히 이른 나이에 가상디는 자신의 방대한 과학적 연구를 시작했고, 페이레스크(Peiresc) 같은 엑스의 몇몇 선도적인 지식인들의 도움과 격려를 받았다. 자신이 가르쳤던 철학 강좌 덕분에 가상디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자신의 방대한 비판을 축적할 수 있었는데, 그것의 첫번째 부분은 1624년에 그의 최초의 출판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 반대하는 역설적 연습들(Exercitationes Paradoxicae adversus Aristoteleos)>>로 발행되었다. 이 책에 이어 여러 과학적 저작들과 철학적 저작들이 출판되었는데, 그 덕분에 가상디는 지성계에서 대단히 유명해졌고 그의 평생 친구가 될 마랭 메르센(Marin Mersenne)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1633년에 가상디는 디니으 대성당의 본당 신부로 임명되었고, 1645년에는 파리의 콜레주 드 프랑스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1648년에 가상디는 은퇴하였으며 1655년에 사망했다.

 

"새로운 과학"과 "새로운 철학"의 형성에 있어서 그의 대단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가상디의 명성은 십칠 세기 전체에 걸쳐 그의 적수 데카르트의 이론들과 겨루었던 자신의 이론들 덕분이 아니라 주로 데카르트의 <<성찰>>에 대한 그의 비판 덕분에 존속했다. 또한 그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부활시키는 데 수행한 역할 덕분에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꽤 최근까지 독립적 사상가로서의 가상디의 지위는 대체로 무시되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그에 대한 데카르트의 평가 때문일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일반적으로 그가 지금에서야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있는 엄청나게 두꺼운 라틴어 대작들로 자신의 생각을 제시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생전에 가상디는 대단히 중요한 지적 경력을 거쳤는데, 그것의 전개는, 아마도 르네 데카르트보다도, J. H. 랜들(Randall)이 "근대 정신의 형성"이라고 불렀던 것을 가리키고 예시한다. 가상디는 회의주의자로서 자신의 철학적 여정을 시작했는데, 몽테뉴(Montaigne)와 샤홍(Charron)의 저작들뿐 아니라 1621년에 발간된 판본의 섹스투스를 읽으므로써 명백히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의 "과학적 피론주의(scientific Pyrrhonsim)"가 당대의 사이비과학자들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가상디의 공격의 근거로서 역할을 수행하였고 가상디를 테트라드의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특히 "새로운 과학"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흥미의 견지에서, 인간주의적 회의주의의 부정적이고 패배주의적인 태도가 불만족스럽다고 깨달았다. 그 다음에 그는 피론주의와 독단주의 사이의 중도를 추구하고 있다고 공표했다. 그는 에피쿠로스주의적 원자론에 대한 자신의 잠정적인 가설적 구성물, 즉 여러 측면에서 근대 영국 철학의 경험주의에 가까운 구성물에서 이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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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포프킨(Richard Popkin), <<회의주의의 역사(The History of Scepticism)>>(2003), pp. 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