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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 오늘의 인용-혁명의 역사인가, 명시화의 역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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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혁명의 거창한 이야기는 완전히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인물들을 그들이 알지도 못했고 지향하지도 않았던 미래의 선구자로 만드는 이 연대 착오를 역사학자들[은] 몹시 싫어[합니다][...]. 안타깝게도, 과학의 경우에는 이러한 회고의 이야기가 앞으로도 창창하게 잘 나갈 겁니다. 아르키메데스에서 스티븐 호킹에 이르기까지 늘 하나의 거대한 연속적 운동, 하나의 영웅적 몸짓이 있었고 학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운동 혹은 몸짓의 서툴고 과도적인 행위자들로만 여겨지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이런 방법론적 오류를 청산할 수 있다면 이제 (낡고 유한한) 코스모스에서 (근대적이고 무한한) 우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 하나의 코스모스에서 '또 다른' 코스모스로 넘어가는 셈이 되겠지요. 그 또 다른 코스모스에는 옛 존재[자]들과 새 존재[자]들이 모두 다 조금씩 '재배치되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대안적 과학사의 철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주가 아니라] 17세기의 코스모스에서 21세기의 코스모스로 넘어왔다고 해야 할 겁니다. [...]

[...]

과학혁명, 아니 '과학혁명들'이 혁명적이었음을 부인한다는 것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의 얘기가 아닙니다. [...] 결정적인 [...] 사건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동안에도 급진적 혁명에 의한 해석이 암시하는 바와는 전혀 다르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명시화'라는 용어를 제안했는데, [...] 내가 보기에 이 단어는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역사는 명시화의 역사이지, 혁명이나 해방의 역사가 아니다." 그는 역사가 결코 과거와 단절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역사는 언제나 더 많은 요소들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우리는 그 요소들을 이용하여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요소들은 기존에 있던 요소들과 양립할 수 있거나 그러지 못하게 될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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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과학인문학 편지>>(이세진 옮김, 사월의책, 2012), pp. 1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