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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로버트: 오늘의 인용-지식을 생태학적으로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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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정치는 정치학자들이 믿는 것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정치는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코스모스의 건설, 즉 공통세계의 점진적 구성이다. 이런 거대한 전환에 공통적인 것은 이제 정치란 충돌하는 코스모그램[cosmogram, 코스모스의 그림]들에서 고뇌어린 선택하기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사벨 스땅제가 그 기획 전체를 가르키기 위해 제시했던 탁월한 이름, 즉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라는 술어는 어떤 확장된 형식의 세계주의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코스모스의 정치를 의미한다.  ―― 브뤼노 라투르

 

[...] 나의 테제는, 인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그리고 그것에 유의미하게 개입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독립적인 생태학적 영역들―자연 생태계, 매체 생태계, 그리고 지식 생태계―이 수행하는 구성적 역할을 이해할 필요가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위의 도표[근대적 코스모그램]는 지식 생태계들의 개념적 힘을 시각적으로 이해하려는 내 자신의 최근의 노력을 나타낸다. 이 도표는 두 가지 주요한 원천―자연의 이분화에 대한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비판과 [...] 자연과 문화 사이의 분리에 대한 브뤼노 라투르의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평축은 세계가 두 가지 유형의 성질들, 즉 일차 성질과 이차 성질로 나누어져 있다는 믿음을 나타낸다. 수직축은 게다가 세계가 두 개의 극, 즉 자연과 문화로 나누어져 있다는 믿음을 나타낸다. 이 두 축의 교차는 존재론적 층위에서 사실과 가치를 분리를 초래한다. 내 테제는 이런 개념적 배치가 자체의 논리적 내용과 무관하게 정동적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지식에 관해 생태학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진리를 서술하는 것으로서의 지식에 덧붙여 정동을 일으키는 것으로서의 지식이라는 견지에서 지식을 이해해야 한다. 다른 진리 체제들을 희생하고 어떤 진리 체계들을 강요하는 한에 있어서 코스모그램은 행위주체성이 있으며, 사회들이 철학, 정치, 육체, 건강, 생태, 종교, 그리고 인간 경험의 본성에 관한 주장들을 통제함에 있어서 정당하다고 느끼는 도구로서 작용한다.

 

이런 정동들 가운데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자연의 이분화의 여파로 근대인들―사실상 감각할 수 있는 모든 존재자들―은 부차적인 지위로 격하된다. 감각과 존재의 분리가 지배하는 세계관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등 시민들이다[...]. 감각은 모든 성질, 가치, 경험을 지니고 있지만 어떤 존재론적 실재도 향유하지 못한다. 존재는 존재론적 실재를 향유하지만 생명체들의 일상 경험에서 어떤 발판도 지니고 있지 않다. 나는 이런 사태를 위 도표의 오른쪽 구석("정치가 있을 뿐 사실이란 없다; 가치들이 있을 뿐 진리란 없다")과 왼쪽 구석("사실들이 있을 뿐 가치란 없다; 진리가 있을 뿐 정치란 없다)에 나타내었다. 이 사태는 삼인칭적 객관적인 과학적 이해로부터 획득되는 지식을 일인칭적 구체적 삶의 행실, 목적, 그리고 욕구과 통합해야 하는 정치에 대해 끔찍한 소식이다.

 

내가 이해하는 대로의 정치적 삶의 목적은 공통세계를 구성하려는 투쟁이다[...]. 한 층위에서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사회적 관계들을 벼리고 전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코스모그램을 만들어내기를 요구한다. 한편으로 나는, 인간들과 비인간들의 다양한 종들로 이루어진 더 유의미한 집합체들을 설계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민감하고, 취약하며, 재구성될 수 있는지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대한 더 정교한 이론들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리 작업의 일부가 코스모그램들의 비인간적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조개, 산호, 그리고 참나무들 가운데에 있는 존재자들이며, 게다가 특별히 미묘하고 분산된 코스모그램들의 생태계들 가운데에도 있는 존재자들이다. [...] 이 작업은 부분적으로 "충돌하는 코스모그램들에서 고뇌어린 선택하기로 정의되며", 덧붙여 새로운 코스모그램들의 생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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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 로버트(Adam Robbe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