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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닛 브라운: 오늘의 인용-다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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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면에서 보면, 그[다윈]은 그렇게 대단한 파급효과를 지닌 글을 출간하리라고 상상조차 못할, 대단히 점잖은 인물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자연철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달리 이단적인 견해 때문에 감금된 적이 없었다. 영국의 시골 사람들은 정치혁명가 토머스 페인에게 했던 것과 달리 밀짚으로 만든 다윈의 인형을 불태운 적이 없다. 콜레조 주교와 달리 다윈은 신성모독으로 고발당하지도 않았다. 반(反)다윈주의 폭동도 일어난 적이 없다. 그 대신 다윈은 1882년 영국의 가장 존경받는 과학자들 중 한 명으로서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묻혔다. 「더 타임스」는 그를 '뉴턴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인'이라고 지칭했다.

 

이른바 '다윈 혁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폭풍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인격 면에서는 널리 찬사를 받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과학의 부흥이 빅토리아 시대의 주된 특징이었다는 점에 크게 힘입은 듯하다. 그리고 그 시대 내내 중산층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세력을 확장한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온갖 논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다윈이 그런 소란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는 점도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그는 전반적으로 과학이 토론과 논쟁을 통해 발전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서로 치고받는 공개적인 논쟁을 싫어했다. 그는 켄트 지방에서 정원을 가꾸는 시골 사람이 되는 쪽을 더 좋아했다. 편지를 쓰고, 친구들을 만나고, 온실이나 서재에서 자그많게 자연사(自然史) 실험을 하는 쪽을 더 좋아했다. 몇 가지 면에서 다윈은 앤서니 트롤럽의 소설에서 막 걸어나온 것 같은 인물이었다. 자기 일과 가족에 충실하고, 과학적 진리를 찾는 일에 헌신하며, 겸손하고 믿음직한 분위기를 풍기는, 키 크고 과묵하며 호감 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많은 신사들이 그러했듯이, 그도 이따금 위장 장애와 수수께끼의 병마에 시달렸다. 빅토리아 시대의 훌륭한 가장이었던 그는 턱수염을 길렀고, 돈을 신중하게 투자했으며,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했다. 좀 의아하게도, 그의 친척들과 가까운 지인들 중에는 교구 신부도 몇 명 있었다. 그는 자연과학자와 사상가뿐 아니라 여행가, 남편, 아버지, 친구, 고용주의 역할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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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닛 브라운(Janet Browne), <<종의 기원 이펙트>>(이한음 옮김, 세종서적, 2012), pp. 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