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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오늘날 훌륭한 교사로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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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에서 벌어진 교육에 관한 논의들로 판단할 때, 많은 사람들이 수업을 단순한 정보 교환으로 여기는 듯 보입니다. 이 모형에서 교사는 정보를 지니고 있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전달하여야 합니다. 학생들이 교사가 표현하는 방식에 근접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반복할 수 있을 때 그들은 배운 것입니다..

 

이것은 수업과 학습 중에 일어나는 일에 관한 꽤 빈약한 관념입니다. 훌륭한 교사는 학생들의 정신이 형성되는 인지 생태계와 모든 수업이 필연적으로 욕망 또는 전이를 포함한다는 사실 둘 다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점들 각각을 차례로 다룰 것입니다. 우리는 뇌 또는 정신이 역사에 걸쳐 고정된 구조 또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은 기술적 환경, 매체 생태계에서 발달하며, 그리고 이것이 학생들이 정보를 생각하고 배우며 처리하는 방식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월터 옹, 프리드리히 키틀러, 마셜 매클루언, 그리고 에릭 해블록 같은 이론가들이 논증했듯이,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이 우리가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 우리가 정보를 보유하는 방식, 우리가 보유할 수 있는 정보의 종류, 그리고 우리의 시간 감각과 정동성의 본성에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면, 글쓰기가 없었던 문자 이전의 문화들에서는 문화적 지식이 노래와 암송된 시를 통해 전달됩니다. 이것은 노래의 운율적 본성이 특히 생물 기억에 보관되는 데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우리가 여러 주, 여러 달 동안 노래를 통해서 알파벳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까닭입니다. 노래는 알파벳 학습의 부차적인 특징이 아니라, 기억에 새기는 기법입니다.

 

그런데 저 매체에서는 행해 질 수 없지만 이 매체에서는 행해 질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헤겔의 <<논리학>> 같은 것을 말하기를 통해서 전달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종이 자체가 헤겔의 변증법에 관해 생각하기 위한 필요조건입니다. 종이는 사유의 부차적인 받침대 또는 단순한 나르개가 아니라, 사유 자체를 위한 조건입니다. 구술 문화에서는 가능하지 않는 사유와 지식의 형식들이 문자 문화에서는 가능합니다. 사실상 문자 문화는 우리 뇌의 바로 그 본성을 바꿉니다. 당신의 뇌가 글로 쓰여진 텍스트의 생태계에서 발달한다면 그것은 다르게 작동합니다. 예를 들면, 시간 감각이 다릅니다. 소설이나 헤겔의 <<논리학>>을 읽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앞 부분에서 읽은 것을 기억하고 다가올 것을 예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선형적 시간 관념을 낳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술 문화의 노래는 순환적 시간 경험을 초래할 것인데, 문화적 정보를 새기기 위해서 이 노래들은 변주되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흔히 교사들은 학생들과 관련하여 부딪치는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학생들이 멍청해졌거나 아니면 교사들이 그들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고 암시합니다. 이것이 놓치고 있는 것은 우리 학생들의 정신들이 발달하고 있는 매체 생태계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주로 인쇄물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문화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정신들은 인쇄물, 영상물, 육체적 상호작용(비디오 게임들과 관련된 종류의 배치), 노래, 하이퍼링크로 구성된 혼성 매체 생태계에서 발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인쇄 문화 패러다임의 지배를 여전히 받고 있는 교실에서 특별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인지와 시간성의 매우 다른 구조를 낳는다고 추정합니다. 예를 들면, 하이퍼링크와 시청각 컴퓨터 및 텔레비전 매체를 생각합시다. 시간적으로 이 매체들의 구조는 매우 다릅니다. 소설처럼 앞에 오는 것이 나중에 오는 것 속에서 유지되는 선형적 전개 대신에 이제는 과거로 도약하고, 이제는 미래로 도약하는 일종의 명멸하는 시간을 얻게 됩니다. 그 경우에 동시성이 다양한 장소들에 걸쳐 퍼지며, 어느 것이나 어떤 다른 것과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고전 소설들이 일종의 매끈한 선형적 형식으로 전개되고 기하학적 증명이 단계별 전개를 필요로 하는 반면에, 현대의 정신들에 대한 현상학적 공간과 시간은 선형적 시간의 연속성을 탈강조하는 비선형적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생태학적 환경에서 발달한 뇌들의 경우에, 이것은, 예를 들면, 소설이나 철학적 저작을 읽을 때 특별히 어려운 점들을 제기합니다. 이런 뇌들에는 가다머에 의해 서술된, 기억와 예상을 포함하는 해석학적 시간 지평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성찰>> 또는 스피노자의 기하학적 저서인 <<윤리학>> 같은 것을 읽기는 특히 어렵게 됩니다.

 

요점은 학생들이 학습 동기를 상실했다거나 교사들이 교육에 서툴다는 것이 아니라(그들은 부담이 점점 더 가중되고 있지만), 우리 뇌가 형성되는 발달 환경의 결과로서 우리 뇌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가 구조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대안 현실 게임과 컴퓨터 게임을 할 때 그리고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 다양한 활동에 참가할 때 젊은 세대가 보여주는 창의성과 발명성을 고려하면, 이 새로운 뇌 구조들에는 대단한 지능이 존재함이 분명합니다.

 

교육적 유효성은 이 생태계를 고려하여 그것에 적절히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 강의들은 어느 정도 하이퍼텍스트처럼 조직됩니다. 확실히 저는 학생들이 우리가 읽는 텍스트들의 체계적 구조를 이해하기를 원하지만, 또한 저는 이 텍스트들의 요소들과 개념들을 예시하는 한 방식으로 대중 문화, 역사, 과학, 일화, 그리고 이야기의 요소들 사이를 왔다갔다 합니다. 이런 식으로 저는 학습물에 대한 정교한 이해를 발달시킬 수 있는 다중적인 입력을 만들어내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이것은 즐겁고, 경이감을 계발하며, 유머, 충격, 그리고 놀라움을 유발하는 부가적인 이점이 있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모든 훌륭한 수업은 정동적 차원도 포함합니다. 문제는 학생들이 주의력 결핍 장애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교육자들이 학생들의 내면에 정동을 불러 일으키는 방법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현재 우리가 신경학과 인지과학으로부터 알고 있듯이, 정동은 기억의 생산에 중요합니다. 그 결과, 학습이 일어나려면 유머, 즐거움, 슬픔, 혐오, 그리고 경이에 대한 경험들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욕망이 없다면 어떤 학습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제 요점은, 우리가 "배울 욕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훌륭한 교사는 자신들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학생들의 욕망과 연결하는 방법들을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앉아서 비행기 날개의 유체역학에 관한 전문 지침서(이것은 공학자 친구의 사무실에 우연히 놓여 있을 것입니다)를 읽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제가 이 책에서 무언가를 기억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것은 그저 제가 그 지침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공학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체역학이 제 삶과 업무의 어떤 측면과도 그야말로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텍스트로부터 무언가를 기억하려면 저는 그것이 제 삶의 기획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향연>>에서 이미 인식했듯이, 훌륭한 교사는 학습물이 학생들의 삶 속에서 그들이 묻고 있는 의문들에 대응하는 것으로 여기게 될 만큼 그 학습물로 학생들의 내면에 전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학습의 전제조건입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학생들은 텍스트들이 제기하고 있는 의문들을 배울 것이지만, 도대체 그 텍스트들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려면 처음에는 학생들이 그 텍스트들이 자신들의 의문들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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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의 인터뷰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