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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하만: 오늘의 인용-탈대륙적 철학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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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저는 분석 철학과 대륙 철학 사이의 "간극을 연결하기"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이 세대의 과업이라는 점에 대한 거의 보편적인 의견일치가 있는 듯 보이지만 말입니다. 사실상, 이런 간극 연결하기는 분석 철학 체제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동화주의적 기획인 듯 보입니다. 그것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는 대륙 철학의 표준적인 영웅들(헤겔, 하이데거)이 "주류" 분석 철학적 언어로 재서술된다는 것이며, 그리고 저는 그 결과가 항상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대륙 철학자들이 분석 철학적 사상가들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할 것인데, 그들의 스타일과 그들이 발견한 것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극단으로 가서 그 간극이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까? 저는 하나의 실재가 존재한다고 믿지만, 하나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세계에는 많은 동물 종들과 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왜 단 하나의 철학 학파가 있어야 합니까? 다양한 사유 생태계들이 있어야 합니다. 통일 운동은 항상 당대의 지배 권력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며, 그리고 우리의 경우에는 공교롭게도 분석 철학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수자 운동을 계속 진행해야 하며, 몇 가지 지나친 것들을 털어버릴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지난 세기 동안 대륙 철학은 독단적으로 반실재론적이었고, 또한 우리는 과거 철학자들에 관해 논평하며 이것이 자동적으로 철학적인 행위라고 믿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그것은 그럴 수 있지만, 흔히 그렇지 않습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또한 우리는 우리를 위한 모든 혁신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프랑스에 너무나 크게 의존했습니다. 우리 자신의 사유에 대해 책임을 질 시기입니다.

 

대륙 철학이 다음에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제 블로그에서 제시했던 공상을 전개할 것입니다. 제가 레이 브래시어, 이언 해밀턴 그랜트, 그리고 퀑탱 메이야수와 함께 네 명의 최초 "사변적 실재론" 철학자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공동의 집단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사이에는 느슨한 지적 친화성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철학의 칸트적 교착상태를 거부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실재론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둔감한 형식의 통속적 실재론을 옹호하지 않으며 결국 몇 가지 매우 기묘한 결론들에 이르는 한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사변적입니다.

 

제 블로그에서 묘사했던 공상에 따르면, 대륙 철학의 미래는 사변적 실재론의 갈라진 네 갈래 사이에 벌어지는 엄청난 내전일 뿐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중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생각하기에 문제가 되는 네 입장들이 대륙 철학에서 가능한 새로운 입장들에 대한 꽤 훌륭한 선택지를 제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랜트는 들뢰즈적 전통에 대한 새로운 방향들을 암시하는 "사이버 생기론자"일 것입니다. 브래시어는 인지과학이 현상학에서 발견되는 "통속 심리학"을 제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단호한 허무주의적 과학 애호가입니다. 메이야수는, 우리 네 명 가운데 홀로, 인간-세계 상관관계가 불가피하며 외부에서 공격하는 대신에 내부에서 급진화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입장은, 한편으로는 현상학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화이트헤드와 라투르에서 차용하는 객체지향 형이상학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공상을 계속해 나가면서 2050년의 대륙 철학은 이 갈래들의 하나 이상으로부터 뚜렷하게 계승될 것이라고 예측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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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엔니스(Paul J. Ennis)의 인터뷰 모음집 <<탈대륙적 목소리들(Post-Continental Voices)>>에 실린 그레이엄 하만과의 인터뷰 내용에서 옮김(pp. 17-8).